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66화 (66/350)

16장. 새로운 관계 (4)

16장. 새로운 관계 (4)

짐짓 심각하게 묻는 자오쯔양에게 정환은 자신도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슬쩍 한숨까지 쉬었다.

“일단 급한 불은 잡았습니다. 그 그악스런 쏘련 놈들도 제가 대국에서 쌀을 타내는 데 쓸모가 있다 여겼는지 일단 충성맹세를 하고 제 지시에 따르고 있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조선의 체제 안정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허허, 그거 참으로 다행이구려. 처음 온업담 대사 동무에게 들었을 때는 걱정했는데, 젊은 나이에 대단한 수완이로군. 앞으로도 우리 중국은 언제나 총서기와 장성택 동지의 편에 서서 혈맹의 우의를 지켜나갈 거요. 조선이 총서기 같은 동지를 지도자로 맞이한 건 정말로 홍복(洪福)이 아닐 수 없군.”

‘그럼, 홍복이고 말고.’

아무것도 모르고 먼저 앞서가 차에 탑승하는 자오쯔양에게 속으로 정환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정환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에 정환은 서류를 통해서, 그리고 얼마 전에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충성경쟁 전략이 빠르고 확실하게 효과를 발휘한 덕분이었다.

지난 정치국 회의 이후,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절감한 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권한으로 각종 규제를 만들어 내 옛 권력인 군의 자유와 입지를 축소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 무엇보다 강력한 군을 우선시했던 김일성, 김정일 치하에 있다가 마침내 자신들을 중용해주는 지식인 유형의 지도자를 만난 그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군을 압박해 들어갔다.

인민군 군관들은 군관들대로, 당 간부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동시에 기존에 쥐고 있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정환에게 앞 다투어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 중 하나가 얼마 전 있었던 설 행사에서 발표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직속의 음악단인 조선인민군협주단(朝鮮人民軍協奏團)이 총서기인 정환을 주제로 해서 작곡한 회심의 신곡, ‘총서기 발걸음에 맞추어’였다.

지시를 벗어난 과잉충성을 정환이 싫어하기도 했지만, 특히 그 가사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 얼굴이 두껍다 자부하는 정환 조차도 낯이 붉어질 정도였다.

- 백두에서 구름 타고 내려온 민족의 영원불멸한 령도자, 그 이름 가슴에 벅차올라 목이 메이네...... 아~ 아~ 그 이름 어찌 감히 입술에 담으랴, 위대하신 총서기, 김정환 동지....!! 한 걸음에 대동강을 뛰어넘고 두 걸음에 백두산 천지에 발 담그신다! 반만년 조선민족 모두 총서기 발걸음에 맞추어......

‘참 다른 의미로 인내심을 시험하는 곡이었지.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아.’

무려 300여 명의 협주단 오케스트라가 떠나가라 연주하는 자신의 찬양가에 정환은 참으로 (웃을 수도 없고 울을 수도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함께 자리한 당 간부들은 하나같이 ‘살아보겠다고 애쓴다, 병신들.’하는 뜻이 담긴 냉소적인 비웃음을 머금었었다.

하여튼 이러한 해프닝도 겪어가며 정환은 당과 군 양쪽 모두의 통제력을 확실하게 강화해가고 있었다.

당군 양쪽이 서로를 견제하면서 도를 벗어난 과잉충성이나 비효율이 발생하지 않게 때로는 이쪽을, 때로는 저쪽을 편들어가며, 그리고 동시에 제3의 위치인 내각의 권한을 조금씩 키워갔다.

참으로 절묘한 균형 감각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정환은 지금까지 잘해왔고,  처음의 불안한 입지에서 벗어나 이제는 누구나 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확실한 최고 권력자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재 그의 옆에서 손자를 걱정하는 할아버지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자오쯔양이나 공화국 밖의 사람들은 아직 짐작하기도 힘든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당분간은 자신에 대한 현재 평가(직위상 총서기지만, 아버지 김일성과 김정일이 누렸던 절대권력에는 한참 못 미침)를 유지할 생각인 정환도 그걸 알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다음 행사인 인민군의 사열을 받기 위하여 같은 차량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이동을 시작했다.

차 문이 닫히고 검게 썬팅 된 차창이 올라가자 자오쯔양은 조금 전 보다 좀 더 진지해진 목소리로 정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공식 행사는 끝났으니 공개된 자리에서 물을 수 없는 걸 물을 차례로군. 사실 내가 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베이징에서 이곳 조선까지 급히 온 이유가 고작 농원 자율 경영 같은 걸 참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총서기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요.”

“영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에 대해 물으러 오신 것이겠죠. 대국으로서는 그리 심기가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정환이 먼저 선수를 치자 자오쯔양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그다지 불쾌해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조선은 독립된 주권국가이고 어느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든 그건 총서기와 조선 인민의 자주적 의사지. 하지만 나 역시 이 자리에 놀러온 게 아니며 국가의 녹을 먹는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 말해둘 건 말해두어야겠소.”

“편히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베이징에서는, 그리고 덩샤오핑 동지는 얼마 전 총서기가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우호 의사를 표명하고 조선과 영국이 가까워지는 것을 불편해하고 있소.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하라고 나를 보낸 거요.”

“..............!”

“알겠지만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영국과 오랜 구원(舊怨 : 오래된 원한)이 있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지만, 개인적으로 국가의 복수는 100년이 지나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오. 무엇보다 우리는 아직 홍콩을 영국에게서 확실하게 반환받지 못했소.”

여기까지 말한 자오쯔양은 목소리에 약간 힘을 주어 단호하게 선언했다.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마지막 한 점 까지 과거에 잃은 영토를 찾을 것이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이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총서기도 이 점을 이해하리라 믿소.”

‘예상대로군.’

어차피 처음 영국과 관계 개선을 결의했을 때 예상하던 반응 그대로였다.

비록 일단은 주권국가인 북조선이 타국과 수교도 아니고 고작 학술교류 정도만을 시작했는데도 이런 반응이 돌아오는 것은 국가지도자로서 참으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정환은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다.

아직 공화국을 유지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최소한 그가 구상한대로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연착륙시키고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하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은 그래야만 했다.

그렇기에 정환은 최대한 부드럽게 자오쯔양의 기분에 맞추어 준비한 답변을 입에 담았다.

“물론입니다. 조 - 중 우호관계는 조선 모든 외교 관계의 기초입니다. 이번 영국과의 교류는 어디까지나 개혁개방을 위한 포석일 뿐, 인민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조선은 언제나 대국과 함께 할 것이니 덩샤오핑 동지께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소,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총서기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오. 그러니 여기 와서 듣고자 하는 말을 들었으니 이제 공적인 입장을 떠나 같은 총서기로서 조언을 해주고 싶구려. 늙은 노인네의 노망난 잔소리라 생각하지 말고 마음에 잘 담아뒀으면 하오.”

‘.........이것 봐라?’

목적이 달성되자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인간적으로 접근해오는 자오쯔양에게 정환은 경계심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자오쯔양을 만났을 때부터 베이징의 외교적 입장을 전하는 그에게서는 단호함은 읽혔지만, (외교전문에서나 중국 외교관들에게서나 일관적으로 보히는) 무례함이나 오만함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고 정환이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순간, 자오쯔양은 그런 그의 예상을 좋은 의미로 배반했다.

“이제 우리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한지 10년이 넘었소. 그동안 성과도 많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 그리고 그 부작용의 피해는, 대부분 중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인민들에게 전가되고 있소.”

“.............!!!!”

“도시는 나날이 팽창하지만 시골은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지. 빈부격차는 커지고 돈이 대륙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소. 하지만 그중 가장 창피막심한 일은, 청렴해야할 당 간부들조차 이러한 시류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거요. 아니, 오히려 가장 앞장서고 있지.”

“...............”

쓰디쓴 웃음을 삼키며 자국의 치부를 털어놓는 자오쯔양을 보며 정환은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리속에서 자오쯔양의 내심을 캐내려던 계산도 지금은 잠시 일시정지 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시선이 적은 전용차량 내에서 그들 둘만 있다지만 이 자리는 엄연히 국가수반들 간 외교의 장이다.

그런 자리에서 자국이 부정부패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고백은 어떤 관료라도 절대로 입에 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특히 타국의 수장에게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본다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자오쯔양은 어떤 계산도 없이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감상의 발로이건, 아니면 자국에서 심중에만 담아두던 말이 타국에 오자 갑자기 통제력을 잃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건 간에.

“요새 베이징 대학가에서 중국의 젊은 인재들이 가장 희망하는 직업이 무엇인지 아시오? 바로 ‘탐관오리’요. 당 간부가 되면 기업가들과의 꽌시(关系)를 이용해서 큰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시장경제에서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라고는 하지만, 개혁개방의 열매는 부자와 당 간부들만의 것이오. ..........최소한 지금의 중국에서는 그렇지. 허허...”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이러한 일을 저에게 말씀해주시는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자오쯔양 동지.”

“별 이유 아니오, 총서기가 개혁개방을 결의했다니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달까... 부디 내 말을 잘 듣고 조선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오류를 보고 배워 부작용을 할 수 있는 최대한 줄이라고 충고해주고 싶었소.”

자오쯔양의 허심탄회한 고백에 정환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차 안은 목적지인 사열식장에 거의 도착했다는 경호 군관의 목소리만 인터폰으로 울려 퍼지고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그러한 침묵을 다시 깨트린 것은 이번에도 자오쯔양이었다.

“우리 중국은 집단지도체제를 결의했었소. 대다수가 초등학교도 못 나온 10억 인민들을 데리고 민주주의를 했다가는 나라가 망할 테니 잘 배운 당원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이끌어 모두가 잘 사는 중국으로 가자는 게 초기 건국대업의 구상이었지. 하지만 요즘 들어 그러한 구상에 갈수록 회의감만 드는구려.”

“그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군요. 어느 사회나 소수의 잘 교육받은 엘리트가 나라와 사회를 이끌기 마련입니다. 체제는 달라도 자본주의의 총본산 미국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20%의 소수가 80%를 먹여 살린다.’ 마오쩌둥 동지부터 덩샤오핑 동지에 이르기까지 집단지도체제의 노선은 예나 지금이나 옳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이야기가 위험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판단한 정환은 ‘피터의 법칙’을 인용하며 자오쯔양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자오쯔양은 내친김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려 하는 것 같았다.

“덩샤오핑 동지도 그런 말을 했지. ‘선부론(先富論)이었던가?’,  ‘부자가 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부자가 되라, 그 후 부자들이 낙오된 자들을 이끌면 된다.’ 솔직히 나는 과연 지금의 인민들 중 낙오된 다른 자들을 이끌 사람들이 몇이나 될는지 의심스럽기만 하구려.”

“......................”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오, 이미 베이징을 중심으로 이러한 시류에 반발하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관찰되고 있다는 보고가 국안부를 통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소. 그 중심에는 총서기처럼 젊은 대학생들이 있지. 이러한 흐름은 머지않아 큰 소요사태를 일으킬 거요. 과연 그 때가 되면 우리 공산당이 인민들을 달래서 잘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의 마지막 말은 거의 넋두리 같았다.

한편 자오쯔양의 이런 말을 듣는 정환은 일부러 시선을 바닥으로 향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미 그는 그러한 노인의 고민이 곧 현실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이미 그러한 예측을 통해 자신의 대 중국 전략을 짜놨으니까....

“도착했군, 내립시다, 총서기. 늙은이의 망령 든 넋두리를 듣느라 고생이 많았소. 이 차안에서 들은 이야기는 잊어버리길 바라겠소.”

“.........총서기 동지!”

“...............?”

차 문이 열리고 먼저 몸을 일으키는 자오쯔양을 보며 정환은 짧은 순간 엄청난 갈등을 느꼈다.

그를 막고 싶었다.

그가 돌아가서 어떤 일을 마주하게 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신세에 처하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말리고 싶었다.

비록 오늘 처음 대면했지만 우연이건 진심이건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진심을 보여준 노인을.

하지만 이미 정환은 스스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비참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정환은 이제 국가지도자이며, 수령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워 국가적 이득을 가져다 줄 전략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비록 가차 없고 냉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곧 중국 천안문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자오쯔양을 가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이런 자신의 처지와가 저주스럽기만 했다.

잠시 간의 침묵 끝에, 정환의 입에서 나온 힘들게 나온 말은 한 마디 뿐이었다.

“.............몸 조심하십시오.”

“......고맙소.”

그리고 그 날 그들 사이에 오간 사적인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날 행사를 끝낸 후, 자오쯔양은 바쁜 일정을 다시 소화하기 위해 그날 저녁 비행기로 베이징에 돌아갔다.

어두운 얼굴로 그의 비행기를 배웅한 정환은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이 없어서 총서기의 갑작스런 침울의 이유를 궁금해 하는 서기실 직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운명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 발걸음을 뚜벅뚜벅 움직여 동아시아를, 아니 전세계를 피와 경악의 폭풍 속으로 몰아넣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