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63화 (63/350)

16장. 새로운 관계 (1)

16장. 새로운 관계 (1)

세계가 격동하던 해, 특히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 더더욱 격동이었던 해였던 1988년은 어느새 저물고 1989년이 새해의 막을 열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1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공화국 전 인민들에게 중계된 신년사는 예의 신년사와 다른 약간의, 아니 상당한 놀라움을 선사해주었다.

- 사랑하는 온 공화국 인민동지들에게. 지난 한 해는 이 공화국에 참으로 비통한 사변과 우리 민족에게 닥친 새로운 대전환점이 동시에 일어난 해였습니다. 그러한 시련을 딛고 일어난 공화국과 전 인민군 장병들에게 축사를 보내며 저 김정환 총서기는 지나가는 1988년을 보내고 다가오는 1989년을 맞이하며...

그 놀라움의 정체는 신년사의 주인공이었는데, 공화국의 (흑백, 컬러를 가리지 않고) 모든 tv와 그보다 훨씬 많은 라디오에 중계된 신년연설은 김일성 주석의 목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바로 몇 달 전 새롭게 취임한 총서기, 김정환이라는 젊은 남성의 것이었는데, 이런 변화의 뒤에는 몇 가지 비화가 있었다.

며칠 전, 88년 12월 25일, 정환은 몇몇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당사의 본인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 중 첫 번째 사람은 안경을 쓴 학자풍의 육십 대 중노인이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오늘은 크리스마스겠지만, 공화국에서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지. 안 그렇소, 황 교수 동무?”

“그, 그렇습니다. 총서기 동지.”

“하하, 너무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소. 황장엽 교수 동무는 엄밀히 따지면 내 아바지, 김일성 주석님의 조카 사위이니 그 분의 아들인 나하고도 혈연지간이 아니겠소? 그러니 편하게 대하도록 하시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환의 눈빛은 눈앞에 앉은 장년의 중노인을 차갑게 주시하고 있었다.

‘편하게 대하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편하게 대했다가는 곱게 죽지 못할 줄 알아라.’라고 엄포하는 듯한 그 눈빛에 중노인은 겁먹은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황장엽 선생 동무는 김대 총장을 역임한 적도 있지. 나 역시 김대 출신인데 거기서 참 많은 것을 배웠소.”

“아, 그, 그렇습니다. 제가 당으로 가고 난 이후에도 교수 동지들에게 총서기님이 상학시간에 참으로 영민하고 천재적인, 그야말로 민족의 영도자에 걸맞는 면모를 자주 보여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고맙기도 하군. 뭐 환생 이전 보고 들은 대로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소문보다 더하다고 해야 할까.....’

필사적으로 외치는 중노인을 보며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애초에 그가 이 몸으로 환생하기 전 ‘진짜’ 김정환이라는 인간은 성적은 좋았지만 꽤 조용하고 눈에 띄는 걸 싫어했던 성격인 듯 했으니 저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단지 정환의 눈앞에 있는 노인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말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뿐이다.

‘그 유명하신 주체사상의 창시자 치고는 영 줏대가 없는 모습인데... 하긴 실제로도 몇 년 지나지 않아 권력투쟁에 밀려 북조선을 탈출하니 오히려 예상대로 일 수 도 있겠군.’

눈앞의 안경을 끈 중노인은 바로 황장엽,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유명한 노인이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의 총장이자 전 선전선동부 차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이름을 북조선은 물론이고 남에까지 널리 떨치게 만든 건 뭐니뭐니해도 바로 그가 북조선의 종교나 다름없는 주체사상을 창시했다는 점이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의 교수 출신으로 당 간부보다는 학자에 더 가까웠던 황장엽은 1972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주체사상과 조선로동당의 대내외 정책’이라는 기고문을 발표해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세상에 내보인다.

그리고 2년 후 1974년 (지금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주의’로 정식선포된 주체사상은 이내 북조선의 국교(國敎)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실체는 철 지난 구 일본제국 스타일의 정신론, 근성제일주의와 나치독일의 지도자 원리, 유물론을 뒤섞은 사이비 종교나 다름없었지만, 애초에 그런 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철학 같은 것에는 별로 연이 없었던 그들에게는 단지 자신들의 1인 숭배와 세습 독재를 정당화할 그럴듯한 이론적 체계가 필요했을 뿐이었으니 당연했다.

그 주체사상을 배울(이라고 쓰고 세뇌라고 읽는) 북조선 인민들 역시 주체사상을 진짜로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은 0.001%도 안 됐을 테니 주체사상이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역시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정환이 보기에는 황장엽 본인에게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보였다.

“흐음, 교수 동지들에게 내 평가가 그렇게 좋다니 기쁘군. 아무튼 내가 오늘 여기 황 교수 동지를 왜 불렀는지 알 수 있겠소?”

“새, 새 법제 정비가 필요해서 라고 들었습니다. 총서기 동지!”

완전히 얼은 황장엽은 말까지 더듬어가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도 그럴 것이 교수 동지라는 정환의 호칭대로, 지금의 그는 지난 당 대회를 기점으로 조선로동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라는 이전 모든 직위에서 해제되어 사실상 당내 취급이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김정일을 몰아낸 지난 거사 이후 황장엽은 지난 7차 노동당 대회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권력관계와 지위의 구조조정이라 할 수 있는 당 대회에서 이름이 호명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그 사람이 사실상 모든 직위의 해제 상태에 놓였음을 뜻했다.

보통 권력의 전환기에서 이런 상황에 놓인 인물들은 숙청으로 그 끝을 맞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지만 (특히 북조선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당 대회 종료 후 두 달여간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아무런 소식이 없어 황장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혹과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 불안 초조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차에, 당 내에서 날고 기는 당 관료들조차 거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곁가지에서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정환이 그를 급작스레 호출했으니, 육십에 접어든 황장엽이 손자뻘인 정환에게 어쩔 줄 모르며 겁을 먹는 것도 매우 당연한 상황이었다.

자신에게 숙청의 칼날이 떨어질까 두려워 땀이 안경알에 맺힐 정도로 두려워하는 황장엽을 보며 정환은 내심 일이 쉽게 풀리라 직감했다.

‘이 자는 전형적인 나약한 인텔리, 머리는 좋지만 정치 감각도 배짱도 한 수 아래인 자다. 적절하게 바람만 넣어주면 ’하늘이 빨간색인 이유’를 논문으로 말이 되게 쓰는 것도 가능하겠어.‘

“교수 동무쯤 되는 두뇌 일꾼이면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는 이 공화국에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려고 준비 중에 있소.”

“차, 참으로 훌륭하신 결단입니다, 총서기 동지.”

“그런데 아무래도 공화국이 수 십 년 간 마르크스 동지의 공산주의를 따라왔는데, 아무 준비 없이 자본주의를 시행하겠다고 선포하면 여러 모로 반발과 오류가 많이 일어날 거요. 무엇보다 주석님께서 멀쩡히 살아계시는데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주체사상을 폐기하고 자본주의로 뛰어가는 건 겉보기에 영 그렇기도 하고.”

“그, 그렇겠지요.”

“황 교수 동무는 철학 박사라고 들었소. 그러니 적절한 인원들을 선발해 그루빠(그룹Group의 러시아식 표현)을 만들고 영미(英美)의 법제와 사상체계를 참고해서 공화국 현재 실정에 맞게 시장경제체제로 잡음 없이 이행할 수 있도록 지도이념을 .....음..... 적절히 수정하는 과업을 맡기겠소.”

“아,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서기 동지!”

“......................”

너무도 간단하게 자신의 평생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체사상을 폐기하겠다고 말하는 황장엽의 모습을 보며 정환은 속으로 대단한 양반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체사상이 터무니없는 헛소리인거야 그도 잘 알지만, 그래도 한 때 연구원으로서 학자의 길을 걸었던 정환인 만큼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너무도 가볍게 팽개치는 황장엽의 모습에 감탄과 조소를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제 서로 불필요한 의례를 의식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말이 통해서 좋군. 당의 다른 일꾼을 불러서 시켜도 될 일에 내가 굳이 황장엽 교수 동무를 부른 이유는, 잘 알겠지만 황 교수 동무가 주체사상의 창시자기 때문이오.”

“아, 압니다. 총서기 동지.”

“우리끼리의 이야기지만, 주체사상은 한 마디로 사기요. 아바디께서 본인의 입지를 절대화하고 당 내 반동분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황장엽 동무를 시켜서 만들어낸 것이지. 그 당시에야 아직 반동들이 조금 남아있었으니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그런 반동들은 전부 예전에 콩알탄 맞고 저세상으로 갔으니.”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제 굳이 거추장스럽게 그런 걸 당사 벽에 붙여놓고 살 필요도 없지. 물론 대놓고 주체사상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공화국 내에서 천천히 잊혀지게 만들 거요. 아니면 다른 것으로 덮어버리던가, 그런 일에 주체사상의 창시자 본인만큼 적합한 사람이 있겠소? 자기가 열어놓은 문짝은 자기가 닫아야 하는 법이지.”

“...............이, 이해했습니다.”

황장엽은 다시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새로운 권력이 된 이 젊은 총서기는 자신의 시대에 맞게 ‘진리’를 다시 쓰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 김일성 주석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황장엽에게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장차 이 공화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정신 이념을 수정하는 대업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차기 지위에 대한 충분한 보장이 되니까.

즉, 그는 일단 한 목숨 건진 것이다.

황장엽이 완전한 굴종의 자세로 나오자 정환은 그가 서기실에 들어온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상법과 회사법을 비롯해서 시장경제체제에 필요한 법 제정의 기반이 될 법철학 쪽 이론 정립도 황 교수 동무 그루빠에 맡기겠소. 필요하다면 당 규약이나 당헌 정도까지 손을 대도 좋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

“........이후에 설립될 그 어떤 민간 기업이든, 법 집행 부서든, 당과 나 총서기의 권한에 침범하거나 도전해서는 안 되오. 법적으로 이 공화국의 유일적 최고 권력은 여전히 이 조선로동당과 그 수장임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말이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거라 믿소.”

“아, 알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충심으로 해내도록 하겠습니다, 총서기 동지!”

요란하게 충성맹세를 외치며 들어올 때 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황장엽이 물러나자, 정환은 곧 새로운 사람, 두 번째 손님을 들여보내라고 서기실 직원에게 지시했다.

이번 두 번째 손님은 황장엽과 조금 달랐다.

그리 만만하지도, 방심해서도 안 되는 상대라고 정환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총서기 동지,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영남 위원 동무, 그동안 별고 없었소?”

상대는 들어오면서 정환에게 허리를 깊게 숙이며 최고의 예우를 표시했으나, 신기한 것은 그러면서도 선객 황장엽과는 달리 그렇게 비굴해보이지 않았다.

정환 역시 황장엽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나름의 예의를 갖춰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조국평화통일 위원회 위원장 김영남을 맞이했다.

“허허, 아닙니다, 이 다 늙어서 쓸 데도 없는 늙은이를 맞이해주시니 제가 기쁠 따름입니다.”

“아니오, 오랫동안 아바디 수령님과 김정일 장군을 섬겨왔던 김영남 동무를 내가 소홀히 할 수 있겠소? 오늘 이 자리에도 김영남 동무의 능력이 필요해서 부른 것이오.”

정환이 먼저 떡밥을 던져서 반응을 떠봤지만, 김영남의 표정은 거의 변함없이 미소 짓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 모습에 과연 김용건 이전에 외무부 부장을 10년 넘게 역임하며 (명목상이기는 했지만) 북조선의 국가수반이었던 사람다운 포커페이스라고 정환은 내심 생각했다.

“지난 당 대회 이후로 젊은 동무들에게 당무를 넘기고 앞으로는 몸에 좋은 온천이나 찾아다니며 요양이나 할까 생각했지만 총서기께서 부르시니 제 미력한 노력이나마 보태야겠지요. 무슨 어려움이 있으셔서 이 김영남이를 부르셨습니까?”

“동무가 외교 분야에서 공화국 최고 일꾼이라고 알고 있소. 앞으로 이 공화국의 미래를 위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해야할 국가가 하나 있는데, 그 일에 동무의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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