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충성 경쟁(2)
15장. 충성 경쟁 (2)
“..............뭐, 뭐라고 하셨습네까, 총서기 동지?”
장성택은 눈을 실룩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의 입은 벌어지고 동공은 확장되어 있어서 그가 지금 받은 놀라움의 정도를 설명해 주었다.
“주체농법은 실수이니 폐기하자고 했소. 아, 물론 주석님의 교시이기는 하지만, 역시 홍 차수 말대로 주석님의 진정한 의중은 농업 일꾼 동무들의 풍요이니 그걸 최우선 하는 게 좋지 않겠소?”
“하하, 장 부장이야 주석님의 사위이니 장인어른의 정책의 실수를 인정하는 게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드님이신 총서기 동지가 결단을 내린 것에 많이 놀란 듯 하군요.”
“...............!!”
자신을 약 올리는 듯한 홍계성의 말에 장성택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지만 그는 이내 화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총서기의 의중을 잘못 판단한 듯 했다.
“그럼 앞으로 농업은 어떻게 당이 관리하는 게 좋겠소? 모두 의견들 말해보시오.”
“흠, 총서기 동지,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이제 농업 분야는 당이 아니라 농장원 동무들의 자율에 맡기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농사야 농사꾼들이 알지 당에서 알겠습니까?”
이어진 홍계성의 말에 장성택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홍계성은 북조선의, 아니 저 레닌 동지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사회주의 사상의 뿌리나 다름없는 집단농장(북조선에서는 협동농장이라고 불렀다)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경악할 제안을 듣는 총서기의 태도였다.
“으음... 그래도 그건 좀 과한 듯 한데... 하지만 그래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면야...”
“보천보 전투를 지휘하셨던 김일성 주석님처럼 과감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총서기 동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농사는 농사꾼이 알고 총싸움은 군관이 잘 압네다. 이제 소련의 동지들도 사정이 안 좋아져서 식량을 수입해오기도 여의치 않은데, 주석님의 교시대로 자력갱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 하기야 요즘은 같은 사회주의 동지 국가들도 일부분 자영농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고 들었고...일단 시범적으로 함경과 황해 쪽에 적용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홍계성 저 늙은 여시 새끼가!’
혼자 널을 뛰는 홍계성을 보고 장성택은 이를 악물었다.
저놈이 혼자 저런 생각을 해냈다는 것도 믿겨지지 않지만 또 그런 자본주의적 발상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총서기를 보니 자신이 아무래도 판단을 한참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후원자나 다름없던 소련까지 내팽개치며 총서기에게 알랑거리는 꼴을 보니 아마 어디서 골이 좀 돌아가고 경제에 비교적 밝은 보좌군관 하나를 얻은 모양이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 쉽게 풀렸군. 하지만 공화국을 위해서라니 어쩔 수 없지. 이제 더 이상 당은 각 농원의 작황과 농업계획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오. 도당위원회는 앞으로 식량을 조달할 때는 개별 농가에서 돈을 주고 구매하도록 하시오.”
“총서기 동지, 농업 생산량에 관해서라면 또 하나 건의 드릴 것이 있습네다.”
“아, 장 부장 동무. 경제 전문가라던 동무가 오늘 유독 조용한가했는데 역시 복안이 있었던 모양이군. 말해 보시오.”
“서해 갑문입네다.”
“서해 갑문이라.....?”
짐짓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장성택에게 고개를 돌리는 정환과는 달리 홍계성의 웃는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장성택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이미 짐작한 듯 했다.
“총서기 동지도 아시겠지만 서해갑문은 81년 주석님의 지시로 남포에 건설된 갑문입네다. 처음 이걸 건설할 당시에는 농업 전투에 필수적인 수자원 확보와 남포항 및 대동강의 항구 수용, 통항능력을 늘리기 위해 건설되었습네다.”
“기억나는군. 김일성 주석님이 당시 반대를 무릅쓰고 위치를 선정했지. 그런데? 그 서해 갑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단 말인가?”
정환의 물음에 장성택은 뭐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홍계성을 멸시가 짙게 서린 눈빛으로 한 번 노려보더니, 이내 비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문제가 있다 정도가 아닙네다. 공사 초기부터 하도 날림으로 지어서 곳곳에서 물이 샐 뿐더러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늦췄는데도 아직도 방파제에서 틈이 발견된다는 보고가 날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완공 이후에도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안개가 짙게 끼고 농어업 생산량이 오히려 전보다 줄었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니고 뭐겠습네까?”
“그거 큰일이로군, 그런데 부실공사라고 했나? 도대체 공사를 담당한 곳이 어디길래....”
“제가 알기로 그 때 인민군 1개 군단이 투입되어 일어난 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도 보충 공사를 위하여 1개 건설사단이 상시 대기 중인 걸로....”
“이봐, 장 부장 동지! 그게 왜 우리 인민군 잘못인가! 애초에 무리한 공사를 수령님 교시라고 밀어붙이고서는 자재도 제대로 안 갖다준 건 분명히 그쪽 당 간부 동지들 아니냐 이 말이야! 우리 인민군 전사들은 그쪽에서 시킨 걸 충실히 따른 죄과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가 어디라고 총서기께 거짓부렁을 고하나!”
홍계성이 더 못 들어주겠다는 듯 호통을 치자 그 말에 반응하듯 테이블에 앉아있던 군과 당의 간부들은 냉랭한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내 테이블에는 순식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인지 몰라도 마침 양 진영의 위치 역시 정환을 중심으로 서로를 마주보도록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이 서로에 대한 비방전으로 이어질 찰나, 정환이 중재에 나섰다.
“자자, 두 원로 동지들은 그만 진정들 했으면 좋겠군, 각자 당과 군을 대표하는 위치에서 오랜 기간 주석님을 보필해왔는데 하급자들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요? 아니, 그 이전에 여기 앉아있는 총서기인 내가 말 못하는 장승으로 보인단 말인가?”
“아, 아닙네다, 총서기 동지.”
“시정하도록 하겠습네다.”
정환의 나직한, 하지만 명백히 노기가 서려있는 경고에 장성택과 홍계성은 고개를 숙이며 일시적으로 휴전했다.
막 불이 붙으려는 찰나 끼얹어진 물에 소강상태가 찾아온 테이블에, 정환이 새로운 규칙을 제시했다.
“그럼 지금부터 서로에 대한 비생산적인 비방은 그만 두고 공화국을 위해서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도록 하시오. 비록 오늘 회의의 주체가 정치국이고, 주체농법이라는 안건이 정해져있지만 아무래도 그동안 군과 당의 동지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으니 주제에 한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을 허가하겠소.”
“.................”
여기까지 말한 후 정환은 이게 중요하다는 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개선방안을 제시하는 곳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 자리와 직위에 구애받지 않고 말하도록 하시오. 나는 어느 쪽이든 공화국을 위해 최선의 안을 제시한 동무와 논의할 테니.”
“.............!!!!”
말하자면 이건 ‘싸우되, 규칙에 맞춰 싸우라’고 룰을 제시한 것과 같았다.
잠시 상황파악이 끝나자, 이내 노동당과 인민군의 간부들은 정환의 마음에 들 만한 안들을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역시 장성택만큼이나 영민하고 권력에 밝은 현영숙 선전선동부장이었다.
“순천에 비날론 연합기업소가 있습니다. 리승기 박사가 개발한 합성섬유, 비날론(Vinylon)을 연간 10만 톤 규모로 생산하기 위해 83년 건설을 시작해서 족히 100억 달러가 들어갔습니다. 저희 선전선동부에서도 이를 ‘주체섬유’로 대대적으로 선전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비날론이 화학약품에 약해서 섬유로 쓰이기는 부적합한데다, 산업용으로 양산할 만큼 실용성이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근래에는 석탄까지 부족해서 비싼 외환을 들여 설치한 설비가 돌아가는 날보다 서 있는 날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기업소만 보존하고 다른 공장이나 기업소로 전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디 총서기께서 용단을 내려주세요.”
그리고 현영숙 부장에 이어 많은 의견들이 탁구공 주고 받듯 이리저리 오갔다.
당에서 하나 나오면 질세라 군에서 하나 방안을 제시하고, 당에서 그 방안을 부정하면 군에서 다시 반론을 제시했다.
분야가 경제 분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군사와 행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기에 인민군 군관들 역시 당 간부들에 밀리지 않고 격론이 오고 갈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정환은 속으로 남모르게 웃었다.
‘잘 되어가는군.’
지금 정치국 회의석상에서 당과 군의 핵심 간부들이 두 패로 나뉘어 벌이는 난상토론은 당연히 처음부터 정환이 의도한 결과였다.
애초에 정치국 회의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게 뻔한 홍계성을 비롯한 군관들을 불러오고 그들의 우두머리 홍계성 차수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까지 일러준 것 역시 정환이었다.
- 홍 차수, 오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서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군. 나를 대신해서 해줘야 할 말이 있어.
- 예, 총서기 동지, 제가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네까?
- 공화국에 더 이상 주체농법은 필요 없고 인민들이 개별 영농으로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하며 협동조합 결성은 농원 자율에 맡겨둬야 한다고 발언해주게.
- ....예? 정말이십니까? 하지만 주체 농법은....
- 정말이고 말고, 내 의중도 의중이지만, 홍 차수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회의석상을 홀로 이끌어갈 장성택 부장에게 누가 맞서겠나?
- 그 말씀은....
- 나는 장 부장을 견제할 사람이 필요하네. 아무리 지난 번 거사에서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 물론 앞으로 공화국 경제 발전에 그의 능력이 필요하지만, 원래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법이 아니지.
- .........................
-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 차수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믿소. 그리고 홍 차수 개인적으로도 이 과업은 기쁘게 받아들일 거 같은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 아닙네다. 총서기 동지! 부디 이 홍계성이와 군을 버리지 말고 총서기의 새로운 공화국에서도 써주십시오. 총서기 동지의 종놈으로나마 부려주신다면 이 홍계성이, 다시없을 광영이겠습네다!
처음부터 정환은 (김일성의 권위도 약화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수령이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할 겸) 주체농법 폐지와 개별 농가의 자영농화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 북조선을 지탱해오던 법칙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만큼, 인선이 아주 중요했다.
그리고 장성택과 줄곧 대립각을 세워왔던 홍계성은 이 일에 아주 적합한 캐스팅이었다.
물론 홍계성 같은 능구렁이가 정환이 자신을 내세워 장성택과 당을 견제하고 둘 사이에 충성경쟁을 유도하려는 걸 완전히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백승철을 시작으로 프룬제 일파들, 종국적으로는 자신과 군부를 쳐내버리려는 정환의 계획을 사전에 읽고 충성맹세라는 ‘이벤트‘까지 벌여 수명을 연장했던 홍계성이니까.
하지만 그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장성택과 현영숙을 중심으로 한 전문적인 관료들이 주도할 공화국 개발에서 소외되고 뒷방으로 밀려날 게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성택을 견제하려는 정환의 심중을 읽은 그는 자진해서 이 총서기 정환에 대한 당과 군의 충성경쟁 구도의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구도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조금만 머리가 좋은 놈이라면 이 구도의 최종 수혜자가 나라는 걸 알고 당과 군 사이에 서로 연합을 도모해서 반역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뭐, 그 경우에도 대안이 있지만.’
“김용건 동지. 외무부 부장으로서 발언해보시오, 최근에 미제에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했는데,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소?”
“예? 아, 예! 미제의 새로운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CIA 국장 출신에 세계대전까지 참전한 군관 출신입니다. 또한 당적 역시 공화당에 몸을 담고 있으니 일단 우리 공화국에 기본적으로 강경자세를 취할 공산이 큽니다.”
“흐음, 그렇다면 김용건 부장 동지는 우리 역시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요?”
“그렇지는 않습네다. 조지 워커 부시는 공화당이지만 그 이전에 유연한 합리주의자입네다. 쓸데없이 대립 분위기를 조성하지 말고 우리 공화국이 줄 수 있는 이득을 수령동지께서 잘 설득하신다면 오히려 우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수도 있습네다.”
“날카로운 분석이군. 과연 일본에 있을 적부터 내 동지의 외교일꾼으로서의 력량을 진작에 알아보고 있었소. 앞으로도 더욱 공화국을 위해서 헌신해 주시오.”
“알갔습네다! 총서기 동지!”
‘바로 제 3세력을 키우는 거야. 가급적 이전의 권력 구도에서 소외되어 있던 쪽으로.’
테이블 주위의 눈들이 비교적 하석에 앉아있던 김용건에게로 쏠리는 걸 보며 정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당 전문부서 외무부 부장이지만 오래 타지인 일본에 나가 있었던지라 딱히 소속세력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김용건은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다가 정환의 칭찬을 듣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만약 정환의 예상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크게 당, 내각, 군의 세 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눠진 세 권력의 축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그들의 목줄을 쥐고 권력이라는 고깃덩이를 분배하는 주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들기 위해 충성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군정 세 축 위에 군림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권력으로 떠오를 단 한 사람, 그는 물론.......
‘이제 내정은 한 숨 돌렸군, 슬슬 본격적으로 미래를 대비하며 개발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어볼까.’
정환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원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점검했다.
과거 회귀 후 그가 이루어 내리라 결심한 과업, 그가 몸소 증명하고자 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권력을 확립하는 절차는 막 일 단계를 마쳤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그러한 정환의 진정한 내심을 100%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원래 우두머리란 누구에게도 자신의 내심을 완전히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의 정치국 회의를 기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제까지와는 확연하게 다른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