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나비의 날갯짓은 반대편 대륙에서 핵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5)
14장. 나비의 날갯짓은 반대편 대륙에서 핵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5)
그리고 얼마 후, 일본 도쿄와 오사카 증권거래소에는 듣도 보도 못한 하나의 새로운 은행이 출범하였다.
게다가 이 은행의 이름도 이름이었지만, 출범 직후 한 행동은 더욱 일본 증권거래소 트레이더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피오니(Peony : 모란) 인베스트먼트 뱅크? 홍콩에서 설립된 신흥 투자은행이라고?
-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은행인데..... 매물로 나온 닛케이지수를 기초 자산으로 한 풋옵션을 몽땅 사들인다고? 거기다 만기일이 3년 이상인 것만? 누군지 몰라도 돈 잃고 싶어 안달난 놈들인가 보군. 그것도 아니면 매니저가 약이라도 했던가.
- 뭔데 그래? 누가 설명 종 해줘. 저 놈들이 지금 뭘 한 건데?
- 내가 보기에 저거는 선물 상품의 일종 같은데.... 거래대상이 현물이 아니라 주가지수인 건 처음 보는군. 그러니까 이거 상품설명을 보면... 풋옵션을 저쪽에서 무조건 사들인다는 말이지? 프리미엄도 엄청 높잖아?
- 미친........ 한 마디로 저 피오니 투자은행이라는 놈들이 3년 후 닛케이 주가지수가 폭락하는 데 거액을 베팅한 거군.
- 뭐? 진짜로....? 하지만 우리 일본 증시가 떨어질 리가 없잖아! 지금 내년이면 닛케이지수가 사상 최초로 4만 포인트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고!
- 그러니까 저 피오니 은행이라는 놈들이 미친놈들이라는 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저 뒤에 있는 놈은 3년 후 닛케이지수가 폭락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고가에 풋옵션을 매수하는 거고. 물론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최소한 몇 년 간은 말이야.
그리고 이 시점에서 닛케이지수가 폭락하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 미친(?) 피오니 투자은행이 들고 온 ‘닛케이지수 풋 옵션’ 상품은 날개 돋힌 듯이 일본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개인이고 기관이고 할 거 없이 이 신흥 투자은행이 내놓은 파생금융상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피오니 투자은행은 닛케이 주가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풋옵션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총서기 님,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아셨으면 합니다.’
‘알고 있네. 일본 주식 시장이 거품이라는 예언을 했지. 그리고 그 예언에 돈을 걸었고.’
‘하지만 그 예언이 빗나가면, 우리 공화국은 말 그대로 파산할 겁니다. 저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말로 미친 짓입니다! 여기에 전대 장군님의 비자금 전액은 물론이고 39호실이 해외에서 벌이던 사업을 대부분 정리해서 마련한 돈까지 넣어 저 쪽바리들의 풋옵션을 사들이고 있는데 혹시 만에 하나라도...’
‘곧 그 돈은 엄청난 수익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원래 파생금융상품이라는 게 도박 아니겠나. 우리가 할 일은 이제 적절한 협력자만 구하면 되는 거야.’
‘.............?’
‘내가 최승일 동무에게 시킬 일이 두 가지 있다고 했지. 우선 그 중 하나는 됐고, 나머지 하나는 지금부터 지시할 거야. 그게 뭘 거 같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거지. 사실 그물은 이미 던졌고 어떤 사람이 거기 걸려들기만 기다리면 돼. 내 예상이 맞다면 곧 자네에게 연락할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내 두 번째 지시이자 목표거든.’
그리고 이런 정환의 예측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다시 얼마 쯤 지난 후 서기실로 홍콩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연결되었던 것이다.
전화선 너머로 들려온 건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한 50대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 안녕하시오, 당신이 피오니 투자은행의 뒤에 있는 사람입니까?
- 그렇습니다. 김(Kim) 이라고 부르시죠. 이 회선은 도청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혹시 모르니 실명은 밝힐 수 없는 점 양해바랍니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니 실례일 것 까지는 없습니다. 나는 음.... ‘게오르게’라고 부르십시오. 나 역시 이 바닥에서 꽤 이름이 팔린 사람이라 내가 통상 쓰는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
- 게오르게라, 에스페란토입니까?
- 내 부모님이 자주 쓰셨지. 아무튼, 최승일이라고 했나? 당신의 대리인을 찾아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당신을 연결해주더군요. 닛케이지수에 옵션을 꽤 거하게 거셨던데, 시장동향과 정 반대로 가는 그런 판단의 근거가 뭐인지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 그걸 밝히기 전에, 우선 하나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
여기까지 말한 정환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화 건너편의 중년 남성에게 물었다.
- 제게 전화한 건... 당신 개인으로서 입니까, 아니면 당신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세력을 대표해서 입니까?
- ...........세력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우리를 하나의 조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도 어쨌든 일본인들이 더 이상 세력을 키워나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감하니까. 그렇소, 후자입니다.
- 그리고 당신을 포함한 그 세력이 저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아마도 게오르게 당신들이 구상하고 준비하고 있는 아이디어를 제가 먼저 실행에 옮겼기 때문일 겁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 ..................
전화선 반대편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30초 정도 침묵이 이어진 후, 그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약간 더 진지해진 투로 다시 물었다.
- 이거 내가 할 말을 김 당신이 먼저 다 해버리는군. 맞는 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모두 당황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우리와 똑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입니다. 모건스탠리, 살로만 브라더스... 지금 다들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난리들이죠. 아직 준비 단계인데, 모두가 날벼락을 맞았다고나 할까....
- 원래 계획대로 하시죠. 저는 당신들의 행보를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우리가, 아니, 내가 김 당신을 왜 믿어야 하는 겁니까?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당신과 당신이 부리는 피오니 은행은 아시아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세습 독재국가 지도자가 연관되어 있다는 심증이 있는데....
- 하나 확인해드리자면 게오르게 당신의 그 심증이 맞습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에 제 이름과 직위가 대문짝만하게 실렸죠, 하지만 이 통화는 서로의 정체에 대해서 캐묻지 않기로 했으니 그냥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공식 석상도 아니고 어차피 ‘당신들’의 부와 국제적인 영향력도 저보다 크면 크지 못하지는 않을 테니.
- 관용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총서기, 아니, 김. 하지만 관용은 관용이고 사실은 사실이니...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자면 피오니 은행의 실제 소유국이 어디인지 일본 금융시장에 알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운영에 꽤 타격을 받을 텐데요. 총서기... 김 당신의 국가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신용도가 최악에 수렴하고 있으니까.
- 그거야 이전 지도자까지의 이야기고, 이제부터는 달라질 겁니다. 정권 교체 소식은 미국에도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원래 지도자가 바뀌면 정책도 국가도 바뀝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미국도 지도자가 바뀌지 않았습니까?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의 금융 정책에 대해 게오르게 당신이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은 칼럼을 본 기억이 나는데....
- .............아무래도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하군. 나만 그쪽의 정체를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습니까.
- 게오르게 당신의 영어에서 희미한 동유럽 억양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게오르게’는 이렇게도 읽히죠, ‘조지(George).’
- .......................
다시 침묵.
하지만 정환은 그런 상대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했다.
- 게오르게, 당신은 이민자 출신입니다. 자유무역과 낮은 관세, 시장개방을 지지하는 리버럴이기도 하고요. 저 역시 제 나라가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언젠가는 이곳에도 증권거래소가 들어설 날이 오겠죠. 그리고 제 나라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움직임이 그 첫 발자국입니다.
- .............
여전히 게오르게, 아니, ‘조지‘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정환은 그가 조금씩 설득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챘다.
- 당신의 동업자들에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그들이 누릴 수익의 일부를 떼어 가기는 하겠지만, 그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요. 당신들은 투자자 아닙니까. 미래의 더 큰 이익을 위해 현재를 참는 게 어떤 뜻인지 아시죠.
- 그렇다면 좋습니다. 내 동료들은 그렇다 치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 설득할 생각인지 궁금하군요. 제가 운용하는 펀드의 돈도 여기에 투자할 계획이었는데, 김 당신이 내 고객들 미래 수익의 상당부분을 가져가버렸군요.
- 하하하.. 그거야 앞으로 저, 혹은 피오니 은행과의 미래 관계를 위한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십시오. 게오르게, 미래를 보십시오. 소련은 무너지고 동독도 흔들리게 될 겁니다. 단지 자기들만 그걸 모르고 있죠. 여기서 제 편을 들어주시면 그 때 찾아올 기회들에서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 ............당신이 정말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맞기는 한지 의심스럽군요. 월 스트리트의 닳고 닳은 증권 중개인들도 당신만큼 혀를 잘 굴리지는 못할 거라는데 돈을 걸지요. 확실히 당신은 당신의 형이나 아버지와는 다른 거 같습니다.
- 요즘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죠.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일본 열도에 세 번째 핵폭탄을 투하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정환의 은근한 제의에 게오르게는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에 있는 내 대학 동창들에게 전해주겠습니다. 풋 옵션에는 더 이상 욕심 내지 말고 풋 워런트(Watrrants)나 팔아치울 준비를 하라고. 시기는 아마 3년 쯤 후일 겁니다.
-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서로 친구가 됐으니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요?
- 친구가 되고 2초 만에 부탁을 하는 겁니까? 이번에는 뭐요?
- 어렵지 않은 부탁입니다. 지금 제가 아는 지인 중에 일본 경제의 미래가 앞으로도 계속 밝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 흠, 뭐 지금 지구상에 있는 99%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돈을 벌 게 될 테지만.
- 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에게 베팅을 했거든요. 돈이 아니라 정치적 포지션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자기 옵션을 팔아버리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저는 몇 년 만 더 기다리면 훨씬 더 엄청난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다고 그를 말렸지만, 도무지 설득되지를 않더군요.
- 멍청이로군. 그래서 김 당신은 내가 그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거요? 한 마디로 내 이름값을 팔라?
- 네, 당신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바꾸면, 조지 당신이 저처럼 일본 경제가 몰락하고 곧 그 책임을 질 정치가들의 정치생명이 하한가를 칠거라는 데 당신 돈을 베팅했다고만 말해주시면 됩니다. 그도 바보는 아니니 거기까지 보여주면 납득할 겁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음....
정환은 자신이 북한에 환생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쓸 일이 없던 한 표현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느라 잠시 애를 먹었다.
2019년 대한민국에서는 꽤 자주 쓰이는 표현이지만, 지금 이 시대, 이 장소에서, 그것도 이 사람에게 쓰려니 영 기분이 이상했다.
아, 기억났다.
그런데 이걸 영어로 뭐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 제 보증 좀 서주시죠. 친구끼리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