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56화 (56/350)

14장. 나비의 날갯짓은 반대편 대륙에서 핵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2)

14장. 나비의 날갯짓은 반대편 대륙에서 핵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 (2)

1988년 11월, 세계는 점점 20세기의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씩 더 치달아가고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북조선의 격변을 애써 모른 체하며) 성공리에 치루어낸 대한민국은 후일 이 시절을 회상한 어느 정부 관료의 말마따나 ‘선진국 막차를 탔다.’

오랜 군사독재 후 참으로 오랜만에 선출된 문민정권 아래서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은 조금씩이나마 힘을 되찾아가기 시작했고 전 대통령은 전재산 헌납 의사를 표명하며 산중의 사찰로 도피했다.

그렇게 군사정권의 그림자도 조금씩 물러가며 자유의 암흑기는 경제성장에 반비례하여 아침 햇살에 밤의 어둠이 물러가듯 몰락하는 것 같았다.

한편 대한민국 뿐 만 아니라 전 세계 역시 큰 변화를 맞이하며 다음 1세기를 준비하는 듯 했다.

동유럽은 점점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력 밖으로 탈출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할리우드 출신 대통령’ 레이건 시대가 막을 내렸다.

유럽 역시 체제 경쟁이 슬슬 끝나감을 느끼고 (지구상 유일 제국으로 군림할 것이 거의 확실한) 미국 중심의 21세기에서 생존하기 위해 하나로 뭉쳐야 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중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지역 중 하나는 바로 일본이었다.

아시아 최강의 경제대국 일본에서는 절정에 달한 버블경제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며 전세계의 부러움과 경탄을 사고 있었다.

세계 50대 기업 시가총액 순위에서는 일본전신전화공사, NTT가 2위 IBM과 큰 격차를 벌리며 1위를 차지했고, 나머지 순위에서도 무려 30개 이상이 일본 기업의 차지였다.

비록 사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부동산, 주식 시장에 낀 비상식적인 거품이 후일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나마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러한 예측을 일본의 경제적 성공을 질시하는 자들이 퍼뜨리는 음모론쯤이라고 치부해버렸다.

하지만 그중 아주 일부, 일부 중 더욱 일부는 이러한 거품의 붕괴를 예측하고 그 후 찾아올 혼란기와 추락에서 부와 정치적 이득을 챙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이라고?”

“네, 총서기 동지, 일본에서 지인 분이 전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일본.... 그리고 지인이라....”

‘평양 - 사리원 고속도로 착공식’에 참석한 정환은 연단에서 내려온 직후 유혜림에게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중국에서 얻은 차관과 식량 지원은 수령 즉시 정환의 명령에 따라 필요한 곳으로 보내졌다.

식량은 당 농업부 관료들의 중요도 선정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한 지역으로 보낼 분량을 제외하면 후일을 위해 창고로 보내졌다.

그리고 막대한 차관은 이러한 식량을 운송하기 위해 쓰일 고속도로 보수, 공사재개에 투입되었다.

- 도로망을 다듬는 건 우리 공화국의 사활이 달린 문제다. 노농적위대를 총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보수하라. 밤낮없이 공사를 시키되 노무자들을 4교대로 나누어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고 급여는 현금으로 지급하라. 또한 안전장비를 비롯해 각종 공사에 필요한 중장비를 도입해서 적극 활용하는 데도 재정을 아끼지 말라.

공산주의 국가는 사익추구 금지로 인한 생산 비효율성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장점도 없지는 않다.

그중 하나는 바로 국가(혹은 당)가 주도해서 진행하는 사업은 때로 여타 자본주의 국가와는 차원이 다른 자본과 노동력 투입으로 단기간에 그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며 북조선 역시 그랬다.

실제로 당 총서기 정환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수 만 명의 노동자들이 군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트럭과 지프를 타고 공사현장에 동원되었다.

노동력 뿐 만 아니라 직접 예산안을 검토한 정환의 허가 아래 공화국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장비와 자재가 풍족한 공사가 시작되면서 북조선의 고속도로 망은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나가고 있었다.

철도 역시 마찬가지로 계획이 짜여 지고 충분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자 빠르게 예전 모습을 되찾아가며 동시에 중요 노선은 복선화와 화물 운송용 노선으로의 보강도 개시되었다.

비록 자금의 한계로 인하여 대부분 기존 인프라를 보수하거나 중단된 공사를 재개하는 수준이고 신축은 방금 정환이 참석한 평양과 사리원간 새 도로 정도였는데... 그 착공식에 참석하고 내려온 그에게 걸려온 전화는 정환의 얼굴을 살짝 굳게 만들었다.

“허영준 상... 아차, 허영준 동지 전화입니다.”

“........당사로 가지. 차 안에서 받겠어.”

자신에게 쏟아지는 노무자들의 진심 어린 환호성(정당한 노임 지급에 힘입은)을 뒤로 하고 정환은 그 즉시 차에 올라타 평양 당 서기 사무실로 향했다.

정권을 잡고 나서 정환이 제일 먼저 한 업무 중 하나는 해외에 분산시켜 두었던 그의 막대한 자산을 모종의 방법으로 회수하는 것이었고 지난 두 달여 동안 그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자산의 총액이 총액인지라 숨겨두는데도, 숨겨두었던 걸 회수하는 데도 한 세월이 걸렸지만 이런 방면에는 가히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 노동당 39호실의 도움을 받아 그 작업은 나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 작업에 애로사항이 생긴 듯 했다.

- 오랜만이로군. 정환 군. 좀 늦었지만 쇼군 자리에 오른 걸 축하한다는 말부터 전하지. 외무성 차원에서 보내는 공식 축전은 아니지만 현재 외교관계가 관계니만큼 이해해주리라 믿네. 흠, 여기저기 들어보니 꽤 시끄러웠던 모양인데, 하여튼 자네라면 멋지게 해낼 거라고 생각했어. 일본에 있을 때부터 비범한 면이 있었으니까 말이야, 클클.

- ......... 저 역시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나카오 장관님.

위성전화를 통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환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전혀 반갑지 않다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의 통화 상대방은 바로 그가 일본에 김정일의 눈을 피해 도피 생활을 할 시절 허영준을 통해 만나게 되었던 일본 건설상, 나카오 에이이치 장관이었던 것이다.

원래 일본에 있을 적에도 별로 편하게 얼굴 볼 상대는 아니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받은 전화는 더더욱 불편했다.

특히나 이 전화로 걸려온 번호는 원래 나카오가 몰라야 할 번호라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이 번호는 허영준에게 혹시 자산 관리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고 준 번호인데, 이걸 이 너구리 같은 영감이 알고 있다는 건.....’

- 그 때나 지금이나 허례허식은 싫어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난 전에 자네에게 호의를 베풀었네. 그리고 내 추측에는 그 호의 덕에 자네가 지금 키타조센의 쇼군 자리에 오른 거 같은데.... 그럼 이제 와서 그 호의를 조금 돌려받아도 상관없겠지?

- 일본 식으로 ‘온 가에시(おんがえし : 은혜 갚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그건 호의가 아니라 거래였습니다만....

- 거래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때 자네는 내가 응하지 않으면 스캔들을 검찰청에 넘기겠다고 협박한 걸로 아는데.... 아무리 자네 고향이 공산주의 국가라도 그걸 거래라고 부르지는 않을 듯 하군. 내 말이 틀린가?

-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해 보시죠.

- 자네 요즘 일본 신문을 안 보나 보군. 뻔하지 않은가? 납북자 문제일세. 나는 자네가 조금만 힘을 써주면 고향에서 납치된 일본인들이 무사히 도쿄 하네다 공항에 내려 나와 악수하는 그림을 신문에 실을 수 있을 듯 하군. 가능하겠지?

역시 그거군.

정환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70년대 후반, 김정일 정권은 여권 위조와 공작원들의 일본어 교육관 수급을 위해 일본 각지에서 일본 민간인들을 납치했다.

당시에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일본 내에서 도시전설 수준으로 취급되기도 했던 일이지만 현재, 그러니까 80년대 후반에는 본격적으로 이 일이 재조명되면서 현재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들 문제는 일본 정계 최고의 핫 이슈가 되고 있었다.

현재 일본은 밤이나 낮이나 이 기사로 신문의 지면이 도배되고 이전의 실종자들도 북한에 납치된 것이 아니냐는 괴소문까지 돌면서 경찰서에 신고가 폭증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이었던 것이다.

물론 북조선, 그러니까 공화국은 원역사에서는 이러한 범죄행위에 대해 대부분 부정 내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21세기가 넘어가서야 본격적인 송환 협상이 시작되지만....

문제는 지금 정환의 고민은 그게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 휴우... 갑자기 납치된 자국 민간인에 대한 동정심과 인간애가 샘물처럼 솟아나서 이런 요구를 하실 리는 없고.... 목적은 선거입니까, 장관님?

- 그렇게 말하니 조금 가슴이 아프지만 부인은 못하겠군. 솔직히 그렇네. 만약 지금 누구든, 어떤 정치인이든 키타조센 측과 접촉해서 이 일을 해결하는 자는 그 즉시 총리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는 것과 같지.

- 장관님은 그게 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 그렇네. 어차피 지금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은 오래 못가네. 이미 물 밑에서 경쟁이 시작됐지. 나도 그 물고기들 중 하나고. 내가 바라는 건 납북 일본인들이 하네다 공항에 돌아와 비행기에서 내리며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그들 옆에 내가 서 있는 거라네. 나를 총리로 만들어줄 신칸센 특급이지.

- ....................

- 솔직히 말해 자네가 북조선 수령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마음 한 구석에서 의심이 없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자네는 그야말로 내 조커가 되었군. 이래서 경마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우승말을 잘 고르는 게 중요해. 그렇지 않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정환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전화 선 상으로 들려오는 나카오의 목소리에 고민했다.

어차피 그도 언젠가는 나카오를 총리로 만드는 데 조력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그가 총리가 되는 시기였다.

앞으로 일본 버블이 붕괴하기까지 대략 3년.

그때 누가 총리가 되든 그 책임을 지고 사퇴하거나, 최소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리고, 정환은 그 버블이 붕괴할 시기에 나카오가 총리가 아니기를 바랬다.

나카오에게 있어서 그가 히든 카드이듯, 정환에게 있어서도 나카오는 분명히 쓸 만한 패니까.

하지만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실 그게 당연하지만) 나카오는 뜻을 쉽게 굽힐 것 같지 않았다.

- 만약 제가 그 제안을 거부한다면?

떠보는 듯한 정환의 목소리에 전화선으로 들려오는 나카오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 유감이로군. 나는 자네가 똑똑한 줄 알았는데... 만약 그렇다면 나도 3년 전의 자네처럼 할 수밖에 없지. 거래를 거부했으니, 협박을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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