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54화 (54/350)

13장. 부패와의 전쟁 - 총서기 전성시대 (4)

13장. 부패와의 전쟁 - 총서기 전성시대 (4)

“죄송합네다, 중장 동지. 지금 국장 동지께서는 당사 서기실에 보고하러 가셨습네다.”

“.......뭐이야?”

부하들을 끌고 잔뜩 골이 난 채로 수사국 국장실에 방문한 백승철은 전혀 뜻밖의, 하지만 내심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비서의 대답에 짜증을 냈다.

“서기실이라... 김영일 국장 동지는 언제 돌아온다고 하나?”

“그게 그건 저도 잘........”

“됐어. 서기실에는 내가 직접 찾아가지!”

난감해하는 비서를 뒤로 하고 서기실로 향하는 백승철은 올 것이 왔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애초에 김정환이 특명을 내려 반부패수사국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기관을 만들고 그 기관의 목적이 부패수사라는 것에서부터 그의 목적은 뻔했다.

단지 이렇게 빨리 칼날이 목전까지 닥쳐올 줄은 몰랐을 뿐.

‘어쩐지 갑자기 고분고분하게 나온다 했군. 지난번 중국 대사 일은 기만책이었다 이거군. 이 백승철에게 앞에서는 손을 내미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우리 프룬제 일파들을 쳐낼 칼을 갈고 있었다 이건가?’

차를 달려 마침내 도착한 서기실을 앞에 두고 백승철은 격전을 앞에 둔 장군의 표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악물었다.

김정환.

4년 전 고려호텔 파티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띄기는 했지만, 그 백면서생이 설마 당과 공화국의 1인자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백승철이었다.

지금껏 그가 방심하고 계속해서 정환에게 공격을 허용해 왔던 것도 한때 의지할 곳 하나 없던 곁가지 김정환의 모습이 마음 속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정환이 거사 와중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보여준 수완과 정치적 능력은, 이제 내심 그를 깔봐왔던 백승철에게조차 두려움을 심어주고 있었다.

‘애초에 이 공화국이 김일성 일가의 1인 사유물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 쿠데타까지 일으켰다. 이미 한 번 했는데 두 번 못할 게 있을까? 더 내버려둔다면 김정환이는, 아니, 총서기는 제2의 김일성이 될지도 모른다.’

끼익.

“당사에 도착했습네다, 백 중장 동지.”

“여기서 기다리라!”

이내 차가 당사에 도착하자 백승철은 김정환 총서기를 만나러 왔다는 방문 목적을 밝혔다.

그러자 서기실 직원은 마침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 지금 총서기 동지는 김영일 국장 동지를 비롯해 몇 분의 손님과 함께 다과를 들고 계십네다.”

“잘됐군! 안 그래도 바로 그 김 국장 동지에게 볼 일이 있으니 말일세. 이 백승철이도 그 다과에 좀 끼고 싶다고 전해주게!”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짓는다.

총서기가 자신의 만남 요청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백승철은 반역죄를 불사하고서라도 서기실 안으로 뛰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사람이 만드는 계파나 파벌이라는 게 어디나 다 그렇지만) 프룬제 출신 군관들이 인민군의 공식명령체계보다 백승철의 명령을 우선해서 따랐던 건 백승철 밑에 있음으로 인해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등 자신들이 얻는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직속 후배인 류무영이 총서기의 명령을 받든 김영일에게 잡혀갔는데 자신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건, 곧 프룬제 파벌에서 자신이 힘 없는 허수아비, 빈 껍데기라는 걸 모든 사람에게 공표하는 꼴이다.

그리고 그건 곧 백승철 자신이 파벌 내의, 나아가서 장령으로서의 영향력을 전부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하들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지휘관은 허수아비만도 못하니까.

“총서기 동지께서 방문을 허락하셨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중장 동지.”

“..............?”

예상과 달리 쉽게 방문이 허락된 것에 대해 의아한 것도 잠시, 백승철은 서기실 중앙의 탁자 주변에 공손하게 앉아있는 김영일을 보고 백승철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김영일 옆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정환에게 항변했다.

예전 같으면 그를 무시하고 바로 김영일의 멱살을 잡았겠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자신의 입지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걸 백승철도 알고 있었다.

“총서기 동지. 급하게 방문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 온 건 저기 앉아있는 김영일 국장 동지와 그 휘하 수사국의 군기를 흐리게 하는 망동에 대하여 보고 드리기 위해....”

“아, 그러지 말고 잠시 앉아서 차부터 드시죠, 백 중장. 안 그래도 함께 자리할 분이 한 분 더 오시니.”

“........!!! 감사합네다, 총서기 동지. 하지만 이번에 김영일 국장 동지가 체포한 류무영 중좌는 제 오랜 후배로 이 인민군대에서 장기간 복무해온 열성적이고 충성스러운 군관....”

“총서기 동지. 그 분께서 오셨습니다.”

“아, 마침 오셨군. 백 중장 동지. 인사드리시오. 오늘 나, 그리고 김영일 국장 동지와 함께 차를 들기로 한 분입니다. 백 중장 동지도 얼굴을 잘 아는 분이기도 하고.”

“........대체 그게 누구....!!!!”

정환이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고 생각한 백승철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문을 열고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한 노인을 목격하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팡이를 짚고 어느새 자신에게 달려온 김영일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그 노인은 바로 이 공화국의 살아있는 신, 수령이자 원수 김일성 주석이었다.

“아바디, 괜찮으십네까?”

“........기, 기래, 영일아. 이 아바디는 잘 지내디.... 오랜만에 면을 보니 좋구나.”

“...............!!!!”

그동안 심신에 겹친 충격 탓이었는지 김일성은 몰라볼 만큼 늙고 쇠약해져 있었다.

서기실 문에서 테이블까지 걸어오는 그 짧은 거리도 비척비척 걸어와서, 보다 못한 김영일이 그를 부축해줘서 의자에 조심스레 앉혀줘야 했을 정도였다.

“아바지 주석님,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콜록, 콜록.......!! 나, 나야 잘 지내디... 요즘 정환이 네가 보내준 의사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고 있디 않니. 저, 정일이 그 배은망덕한 아새끼보다 네가 천배 낫구나야. 콜록,콜록....”

“감사합니다. 주석님, 여기 제 형님, 김영일 국장입니다. 제가 최근 형님을 반부패수사국이라는 당직에 앉혀드렸는데, 알고 계십니까?”

“........으응? 응, 응.... 그렇지, 알고 있구 말고...기래, 정환이 너는 형제하고 잘 지내서 이 아바디가 참으로 마음이 좋구나. 모름지기 형제끼리는 잘 지내야 하는 법인데, 정일이 그 상놈의 새끼는 욕심이 많아서 지 혼자 다 처먹으려구 했디....... 으으음....!!!!”

“아바디, 여기 총서기 동지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입네다. 곁가지인 저를 불러올려 당직을 주고, 아바디를 이렇게 잘 보살펴 주는 것만 봐도 앞으로 이 공화국이 총서기의 영도 아래 나날이 발전해가는 게 보이지 않갔습네까? 아바디께서는 참으로 훌륭한 후계를 고르셨습네다.”

“그, 그렇디.... 영일이 너도 동생을 옆에서 잘 보필해야 한다... 우리 김가가 이 공화국에서 앞으로도 인민들의 경애를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잘 뭉쳐야 하는 법이야... 콜록...콜록...!!!”

“...................”

‘이런 빌어먹을!’

졸지에 가족끼리의 상봉에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된 백승철은 처음에 하려던 말도 못 꺼내고 그저 불편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신세가 되자 속으로 욕설을 토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묘한 미소를 띄우는 정환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백승철은 정환의 노림수, 하필 김영일을 국장에 선임한 이유와 오늘 이 만남 자리에 김일성을 부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경고였다.

‘김영일 국장 동지가 누구의 피붙이인지 잊지 말게, 백승철 중장.’

뭐라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으락푸르락 하는 백승철을 보며 정환은 느긋하게 다시 차를 들이켰다.

유혜림이 궁금해 했듯이 그가 수많은 인재들을 놔두고 하필 김영일을 반부패수사국장 자리에 임명한 건, 동기가 확실하다는 이유 외에도 두 번째 이유가 있었다.

바로 ‘백두혈통‘이라는 확실한, 하지만 정환 자신에게는 반역하지 않을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그의 행보에 누가 감히 함부로 제지를 하겠는가?

“아바디, 여기 백승철 중장 동지가 오늘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 군요. 백승철 중장 동지가 누구인지 기억하십네까?”

“으응.....? 아, 기래기래... 누구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부디 내 자식들을 돌봐주기요, 기래. 영일이나 정환이나 둘 다 상학시간에 글만 읽다 온 애들이라 당원들과 잘 협조해서 당을 이끌어야 하디 않갔소... 쿨럭, 쿨럭....”

“............”

“백 중장 동지, 주석님께서 물으시는데 대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 여, 염려 마십시오, 주석님... 이 백승철이가 반드시 목숨 바쳐 총서기 동지를 결사옹위.....!!!”

하지만 백승철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김일성은 그대로 고개를 꺾더니 코고는 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버렸다.

황당해하는 백승철에게 정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이런, 의사동지들이 진정제를 너무 많이 처방한 모양이군. 주석님을 모셔가도록. 김 국장 동지도 아바디를 따라가시오.”

“알갔습네다. 총서기 동지.”

이윽고 김영일이 조심스럽게 김일성을 모셔가는 서기실 직원들과 함께 사라지자, 정환은 히죽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굳힌 백승철을 놀리듯 물었다.

“그래, 또 뭐 더 보고할 사안이라도 남아있소? 백승철 중장 동지?”

“.................!!!!!”

결국, 그 날 백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사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쨍그랑---!!!

“빌어먹을! 앞으로도 계속 이런 대접을 참고만 계실 생각이십네까, 홍 차수 동지!”

“..............”

홍계성은 크리스탈 위스키 잔을 벽에 던져 깨부수는 백승철을 보고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자신을 말리기나 화를 내기라도 할 줄 알았던 홍계성이 가만히 있자 백승철은 오히려 더욱 화가 솟구치는 듯 했다.

“뭐라 말이라도 좀 해보시오! 지금 김정환이 저 아새끼가 우리 일파를 다 잡아 죽이려고 칼을 빼들었는데, 뭔가 대안이 있어야 할 거 아니오! 대안이!”

“말 조심하게! 백승철 중장 동지! 김정환 동지는 지금 당 총서기일세!”

홍계성이 언성을 높이며 오히려 자신에게 주의를 주자 백승철은 이제 더 볼 것 도 없다는 듯이 대놓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허, 이제는 아예 김정환이의 개새끼까지 자처하시려고 작정하셨습네까, 홍 차수? 하기야 지난 번 거사 이후로 묘하게 고분고분하더라니. 왜 그 장성택이에게 당 조직부장 자리 뺏기고 나니 이제 줄을 바꿔 타는 게 더 이득이겠다 머리를 굴린 거요? 아니면....”

“백승철이, 자네 지난 번 당 대회 마지막 날에 김정환 동지... 아니, 총서기가 총화하는 거 들은 적 있나?”

“...................??”

자신의 무례하기 그지없는 도발에 이번에는 분명히 화를 내리라, 아니면 총이라도 뽑아들지 모른다하고 내심 짐작하던 백승철은 홍계성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잠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피식 코웃음을 치더니 손을 내저었다.

“대체 그딴 시간 낭비를 왜 듣는단 말이오? 어차피 당 대회고 뭐고 몽땅 다 바보놀음인 거 누가 몰라서....”

“내 기럴 줄 알았네, 그러니 백승철이 네가 군관으로서나 쓸모 있지 정치판에는 영 아닌 게야. 그때 총서기는 마지막 날 ‘신(新) 4대 목표’이라는 걸 발표했네. 아마 백승철 네놈 같은 돌대가리는 기억 안 날지 모르겠지만, 이건 김일성 주석이 25년 전 선포한 ‘4대 군사노선(路線)‘을 계승한 거지. 기억나나?”

거기까지 홍계성이 말하자 백승철도 서서히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홍계성이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도무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건 다 ‘군대를 중심으로 김 씨 일가에게 일치단결하여 남조선 적화통일하자’ 이거를 길게 풀어 쓴 말 아닌가.

“그.... 인민군을 이끌고 남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 4개의 주요한 정책,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장비의 현대화‘ 이거 4 개잖소. 그런데 그게 우리랑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요?”

“지난번 당 대회에서, 방금 말한 김일성 주석의 구(舊) 4대 노선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네. 정환 총서기 본인 입이건,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건. 이제 감이 좀 잡히나?”

“...................!”

“그 뿐만이 아니지. 김일성 주석의 ‘경제국방병진노선’, ‘당 유일적령도체계확립 10대 원칙’, 심지어는, 그래, 심지어는 ‘주체사상’도 단 한 번 언급되고 끝이었네. 아마 다음 당 대회 때는 그 한 번 언급도 안 되겠지. 하지만 총서기의 신 4대 목표는 대회 와중에 10번이나 언급됐고. 이게 뭘 뜻하는 거 같나?”

“설마......”

그제서야 백승철도 서서히 머리가 트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홍계성이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그, 그 신 4대 목표라는 게 대체 뭐이요?”

급하게 물어본 백승철에게 홍계성이 말해준 정환의 신 4대 목표는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 4개의 목표는 어찌 보면 모든 위정자들이 당연히 내세워야 할 목표 같았지만, 그것이 당 대회에서 발표되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백승철이 멍청하지는 않았다.

- 전 당의 단결

- 전 국토의 개발

- 전 생산의 현대화

- 전 인민의 부유

“이건... 우리 군이... 단 한 번도.....”

“기래,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 이제 내가 왜 당 조직지도부장 자리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알 수 있겠나? 정환 총서기는 우리 프룬제 일파만 청산하려는 게 아닐세. 이제 인민군 전체, 그중 최소 절반 이상을 청산하려고 하는 기야. 앞으로 이 공화국은 인민군을 중심으로 끌어가지지 않는다. 최소한 이 김정환이의 공화국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렇게 말한 거라는 말일세.”

그 말을 듣자마자 백승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홍계성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큰 일 아닌가.

“그럼 대체 지금까지 뭐하고 있던 거요? 당장 손을 씁시다!”

“뭘 손을 쓴다는 말인가?”

“그럼 지금 총서기가 우리 군 전체를 청산해서 낮 전등(북한 관용어, 아무 쓸모없는 물건을 지칭함)신세로 만들겠다는데 가만 있자는 이야기요? 그 4대 목표인가 뭔가 대로라면 틀림없이 타 군에도 동조자가 있을 거요! 어서 움직이면...”

“늦었네, 이미 우리는 기회를 놓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홍계성에게, 백승철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격한 몸짓을 보였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아직 그놈은 친위세력도 없으니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하면...”

“친위세력은 아니어도 우리를 때려잡을 병력은 있지. 자네 류무영 중좌를 잡을 때 동원된 병력이 어디서 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다 사회안전부에서 체포해서 관리하던 전 보위국, 호위총국 하급군관들이란 말일세! 우리 프룬제 일파라면 이를 부득부득 가는 놈들! 김정일이가 없어진 지금, 그놈들을 주석 이름을 내세워 김정환이가 부리는 데 얼마나 걸릴 거 같나?”

“..........이이익!!!!”

“김정환이야 반란 내내 얼굴을 표면에 내지 않아서 손에 직접 피를 묻힌 건 우리뿐일세. 지난 번 거사 때야 김정일이를 그놈 매부 장성택이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지긋지긋해했으니 중간에 몇 번 잡음이 있었어도 성공했지만, 이미 김일성 주석이 후계자로 선포하고 로동신문에 ‘인민 생활을 먼저 생각하는 자애로운 젊은 총서기’로 기사가 나간 김정환이를 대놓고 죽이면, 아마 그 다음 차례는 우리일 걸세.”

“그럼 홍 차수 동지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우리 팔다리가 잘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는 이야기요?”

“누가 그러자고 했나? 나는 기다리자는 기야! 때가 올 때까지! 이제껏 보고도 모르겠나? 지금 총서기는 우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네! 아차 잘못해서 빈틈을 보이거나 꼬투리를 잡히면, 그 즉시 우리를 때려잡을 거라는 말일세! 적당한 명분만 갖춰지면 주석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우리 모두를 교화소로 보낼 텐데, 지금 그 명분을 줘버리자는 이야기인가?”

“.......................”

마침내 백승철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화도 내기 지친 듯, 아니면 포기해버린 듯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아까 말했던 대로, 때를 기다리지.”

“때? 무슨 때를?”

“기래, 아무리 총서기라도 군의 4할을 차지하는 우리들을 한 번에 청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세. 그랬다가는 군이 붕괴해버릴 거고, 그거는 총서기도 바라는 바가 아닐 테니.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총서기 앞에서 기는 기야. 우리끼리 단결을 유지하면서, 총서기가 만들 새로운 공화국에서 우리 입지를 다져야하네. 그러다보면 언젠가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기야.”

홍계성이 그리 판단한 가장 큰 근거는, 바로 당 대회에서 보게 된 당 위원과 대의원들의 눈빛이었다.

특히나 '전인민의 부유‘라는 대목에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먹을 바보는 그 자리에 없었기에, 그 말이 나온 순간 어딘가 지루해보이던 대의원들 대부분은 자세를 바로하고 새 총서기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기 그지없는 변화였지만, 그걸 보고 홍계성은 확신했다.

프룬제 일파가 다시 총서기에게 반란을 일으켜도, 저들은 절대 자신들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고.

쏘련의 붕괴와 함께 모든 사람들이 이제 공산주의와 그것이 가져온 부족의 경제에 조금씩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승철은 여전히 미련이 좀 남은 듯 했다.

“..............그거, 상급자로서 명령입네까, 홍 차수?”

“명령이디, 당연히.”

“...............만약 그 명령을 내가 듣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쩔 거요, 홍 차수는?

“........뭐이야?”

백승철의 느닷없는 선언에 홍계성은 으르렁 거리며 되물었다.

이렇게까지 설명해줬는데도 이 천치는 못 알아듣는 다는 말인가?

하지만 백승철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듯 필사적으로 물었다.

“아직 우리 파벌에서 홍 차수가 아니라 나만을 따르는 군관들도 수십 명은 되오. 내가 미쳤다고 치고 그들과 내가 서기실로 치고 들어가서 따발총이라도 난사해 김정환이를 죽인다고 하면, 홍 차수는 어쩔 거냐는 뜻이오.”

백승철의 그 최후의 발악 같은 질문, 혹은 떠보기에 홍계성은 이제까지 침착하기 그지없던 노회한 얼굴을 처음으로 험악한 살기로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여 의자에 축 쳐져있는 백승철에게 눈을 맞추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기럼 내 일제 놈들 손에 돌아가신 오마니께 맹세컨대, 이 프룬제 파벌의 우두머리로써 백승철 네놈 새끼를 내 손으로 먼저 쏴 죽여 버릴 기다.”

“................!!!”

“그리고 네놈 모가지를 총서기한테 들고 가서 백승철 이 아새끼는 대가리가 단단히 돌은 놈이니 부디 이 모가지를 받으시고 우리 일파의 목숨을 붙여주십시오, 라고 할 거다. 알아들었으면 어디 니 멋대로 해봐라. 대신 이 방에서 나가는 즉시 나와 내 손이 닿는 모든 군관들은 너하고 상관없는 게 되는 거다. 알겠나?”

“....................”

백승철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홍계성은 이내 그의 눈 속에서 뭔가가 한 풀 꺾이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걸 확인한 후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백승철에게 다시 지시했다.

“알아들었으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라.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행동에 옮기면 네놈은 물론이고 류무영 그 얼빤한 간나도 살아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당사로 출근한 정환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건 기대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 구석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던 그런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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