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부패와의 전쟁 - 총서기 전성시대 (1)
13장. 부패와의 전쟁 - 총서기 전성시대 (1)
중국으로부터 차관과 식량지원이 이루어진 지 얼마 후 아침, 정환은 그 날도 서기실에 앉아 아침 일정을 보고 받고 있었다.
그 때, 아침 일정을 ㅤㅎㅜㄼ어 보던 그의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 골칫거리로 자리 잡은, 하지만 해결할 기회를 잡지 못했던 몇 가지 문제들을 한 번에 해결할 아이디어였다.
‘빠른 시일 내에 했어야 할 일이지만, 문제는 계기군, 계기를 잘 만들어야 역풍도 불지 않고 제대로 명분이 서는데....’
그 때, 화려한 서기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살짝 굳은 얼굴의 서기실 직원이 천천히 걸어들어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총서기 동지, 해주 소젖(우유)공장 현지지도를 가실 시간입네다.”
“해주 우유공장이라... 얼마 전 생산량 초과 달성으로 현지 책임비서에게 로력 영웅 훈장이 수여하기로 된 곳이지? ”
정환이 서류에서 본 기억을 떠올리며 묻자 아직 낯이 설은 총서기 비서실 직원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를 포함해 로동당 대부분의 인원은 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총서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그렇습네다. 여기서 생산된 우유는 현지에서 가공과 포장을 전부 거쳐 공화국 곳곳에 있는 보통중학교 어린이 동무들에게 영양공급을 하는 지대한 역할을....”
“아아, 알겠어. 다른 곳과는 다르게 목표치 달성이 이상할 정도로 유독 잘 돼서 기억하고 있지. 로력영웅 훈장을 받을 만 해. 우선 유혜림 소좌는 당연히 데려가야 하고... 그러고 보니.....”
정환은 침을 꿀꺽 삼키는 비서실 직원을 앞에 두고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현영숙 부장도 데려가지.”
“중앙검열위 위원장 겸 선전선동부 부장 현영숙 동지 말씀이십니까, 총서기 동지?”
“그럼 당에 현영숙 부장이 또 있나? 어서 일정 통지하고 채비하라 일러. 그리고....”
재빠르게 당사 밖으로 뛰어나가는 직원의 등에 대고 정환은 다시 지시했다.
“.......로동신문 취재원 동지들도 데리고 오라 이르라고.”
이윽고 살짝 놀랜 표정의 현영숙 부장을 포함한 현지지도 일행은 관용차량에 탑승하여 황해도 해주시로 향했다.
다행이도 당 총서기의 첫 현지지도를 미리 통지 받은 지방 군민의 ‘협조’로 도로는 뻥 뚫려있었고 정환 일행이 공장에 도착했을 때는 공장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환영인파가 손에 꽃술까지 든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축
경애하는 김정환 총서기 방문
“저기 오십네다! 총서기 동지 만세!!!!”
“노동자 동지 여러분! 김정환 총서기 동지께서 이곳에 영광스런 걸음을 해주시었습니다!”
“와아아아아아!!!! 총서기 동지 만세!!”
정환이 차에서 내리자 미리 준비된 듯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지만 정환, 유혜림(과 현영숙)은 그 환호성 속에 기쁨보다는 호기심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공화국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정환은 김일성은 물론 전대 장군 김정일보다 많이 낯선 존재였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수의 인민들은 광분 같은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그 소문의 총서기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힐끗힐끗 곁눈질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현영숙은 호기심 반 우려 반의 감정으로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아직은 인민들이 낯설어 하는 군. 사전 정지(整地) 작업 없이 고위직에 오른 총서기의 한계야. 정환 총서기는 이러한 본인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을까? 나를 중앙검열위에 옮겨다 놓은 걸 보면 이런 점을 모르지는 않는 거 같은데....’
“위대하신 김정환 총서기 동지! 이렇게 저희 공장을 현지지도하러 와주시니 다시없는 영광입네다! 지금부터 저희 책임일꾼들이 총서기 동지를 부족함 없이 수행하여 이 공장을 안내해드릴....”
“됐어, 그보다 책임비서 동지. 여기서 생산된 우유를 좀 볼 수 있겠나?”
“.......예, 예?”
과장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그를 환영하는 장년의 황해도 도당 위원회 책임비서에게 정환은 딱 자르는 말투로 대답했다.
이제까지 중앙에서 내려오는 현지지도 패턴을 사전 숙지한 끝에 준비된 걸 보여주고 훈장 받아갈 생각에 가득 차있던 책임비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총서기의 질문을 놓치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다.
“우유 말이야, 우유. 여기서 생산하는 우유 시제품을 보고 싶다 이 말이야.”
“뭐하고 있나요? 총서기 동지께서 같은 물음을 두 번 하시게 할 생각입니까, 동지는?”
“아, 아닙네다! 죽을 죄를 지었습네다! 한 번만 용서해주시라요!”
정환의 옆에 서있던 유혜림의 차가운 독촉에 정신이 번쩍 든 책임비서는 즉시 공장 책임일꾼들을 앞세워 정환 일행을 공장의 최종공정을 진행하는 구획으로 안내했다.
산처럼 쌓인 플라스틱 박스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우유곽들을 정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시했다.
총서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자연히 그 뒤에 서있는 유혜림과 현영숙 부장과 서기실 직원, 황해도 도당위원회 총비서 등등을 포함한 수십 명의 수행인단들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졸지에 심문 받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책임비서와 공장 노동자들은 (그들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 이 무시무시한 침묵에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이야 도대체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이 젊은 총서기가 도대체 뭣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내일 아침 해를 아오지에서 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때 돌연 정환이 앞으로 걸어가 손수 우유곽이 쌓인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총비서 동지........?”
“이거, 유 소좌가 한 번 먹어봐.”
정환이 위쪽에 놓인 상자에서 골라서 던진 우유 하나를 유혜림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단순한 포장을 뜯어 들이켰다.
담백한 우유 맛, 일본에서 먹던 고급 우유에는 한참 못 미치는 맛이지만 어쨌든 ‘우유’ 기준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맛이었다.
“별 이상 없습니다만.........?”
“그래, 그거야 그렇겠지. 하지만 이건 어떨지 한 번 보자고.”
이번에 정환은 상자들의 탑 안 쪽으로 좀 더 들어가 가장 아랫단 상자의 제일 구석에 놓인 우유 하나를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우유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그걸 뜯어서 이번에는 정환이 직접 들이키자 그 광경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당 책임비서의 얼굴이 새하얘지는 것을 현영숙은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푸우우우웁!!!
“우웩!”
“총서기 동지!”
“총서기 님! 어서 의사를........!!!”
“별 이상 없으니 수선 떨지들 말게. 그냥 더럽게 맛이 없을 뿐이니. 아니 이건 맛이 없다 정도가 아니라....”
정환은 그렇게 말하고는 먹던 우유곽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벌써부터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는 도당위원회 책임비서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 책임 비서 동지. 이 공장에서 생산된 우유에 맹물이 이렇게 잔뜩 섞여 있는지 나와 여기 모인 당 간부들에게 설명해 볼 수 있겠나?”
“주, 죽을 죄를 지었습네다, 총서기 동지! 제, 제발 교화소만은... 아니, 저는 교화소에 가도 좋으니 제 식구들만큼은....!!!”
“나는 지금 책임비서 동지를 질책하고자 하는 게 아니야. 이 사태의 원인을 알고 싶은 거지. 거기, 이 공장 노동자 동지들 중에 내게 설명해 줄 동지 있나?”
정환의 시선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책임비서를 떠나 공장 노동자들에게로 향하자 그중 공장 책임일꾼인 듯한 자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총비서 동지...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어서 말해보게. 어떤 내용이든 차후 처벌은 없을 테니.”
“그게.....”
정환의 설득에 책임일꾼은 ‘입 열지 마!’라고 표정으로 외치는 듯한 도당 책임비서를 애써 무시하며 진실을 이야기했다.
“.....이 근처에... 인민군 육군 전연군단 주둔지가 있습네다. 거기 하전사들이... 고거이....”
“계속 말하게.”
“고게... 군 주둔지 하전사들이나 군관들이 걸핏하면 이 공장에 와서 소젖을 자주 훔쳐 갑네다. 저희들이 말려도 소귀에 경 읽기라서.... 백주대낮에 와서 생산해 놓은 소젖을 잔뜩 부려가니 생산량을 맞출 도리가 없습네다.”
“...........!!!!”
장내에 폭탄이 터진 듯 했다.
책임일꾼의 고백에 무덤처럼 고요해진 공장 내에서 유일하게 표정의 별 변화가 없는 것은 정환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가장 가까이 붙어있던 유혜림은 왠지 그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인다고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연 정환의 목소리에는 이제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역력한 분노가 배어 있었다.
“...........이제 알겠군. 그럼 책임비서 동지. 보아하니 황해도 당 위원회에서 동지가 작성해 중앙에 올린 이 생산량 초과보고는 아무래도 허위인 것 같군? 당과 수령을 기망하려 한 죄는 뭔지 알고 있나?”
“초, 총서기 동지....!!!!”
“거기, 훈장 가져오게! 로력영웅 훈장감이 여기 있으니까.”
“............???”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을 무시하며 정환은 깔끔한 나무 상자에서 로력영웅 훈장을 꺼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사람, 방금 전 경악의 폭로를 했던 책임일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책임일꾼에게 정환은 손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이라고 쓰여진 훈장을 달아주었다.
그 후 정환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격려했다.
“초, 총서기 동지.....!!!”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군. 생산량을 달성하지 못한 것은 일부 하전사들의 범죄행동 때문이니 그건 자네를 포함한 이 공장 일꾼들의 잘못이 아니네. 아니, 오히려 비난을 무릅쓰고 공화국의 문제점을 지적했으니 훈장을 받아 마땅하지. 곧 이 공장의 생산품을 누구도 훔쳐갈 수 없을 걸세. 내가 총서기의 이름을 걸고 다짐하지.”
“..............!!!!”
“그리고 자네, 통계를 조작하고 생산량을 허위로 중앙에 보고한 책임비서 동지는...........”
이 광경을 멍하니 넋 놓고 보고 있던 책임비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하지만 뜻밖에 정환은 그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다.
“허위보고 자체는 중대한 죄지만 사정이 있었으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지. 하지만 앞으로 생산량이 미달됐다면 그대로 당 중앙에 보고를 올리도록 해야 할 거야. 당의 눈을 흐리고 미래 전략 수립을 방해하는 통계조작에 두 번 용서는 없네.”
“.........아, 아, 알갔습네다! 총서기 동지!”
“중앙군사위 위원장으로서 이런 문제를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군. 곧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나를 포함해 모든 중앙당 당원들이 노력하도록 하겠네.”
번쩍.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지며 위엄있게 서 있는 정환과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한 기쁨에 어느 새 눈물까지 흘리는)있는 책임비서를 사진에 담았다.
그제서야 정환이 왜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는지 진의를 파악한 현영숙이 급하게 취재원들을 동원하여 이 광경을 사진에 담으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24시간이 채 안 되어 로동신문 1면에는 새로운 총서기 김정환 동지의 첫 현지지도와 생산량 조작, 그리고 일부 군 반동분자들에게 당한 공장의 가슴 아픈 사정, 이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 용서를 베푼 총서기의 아량과 발언 등이 그대로 기사가 되어 실렸다.
비록 아무리 관영 언론이라지만 어찌 됐든 노동신문은 북조선 유일이자 최대의 언론, 안 그래도 젊은 새 총서기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던 인민들은 처음에는 이 기사를 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당에서 통계를 조작한 당원을 교화소에 보낸 적은 있었어도, 생산량 미달 일꾼들에게 ‘솔직히 고해 바친 상‘으로 훈장을 준 적은 없지 않았는가?
그 말은 진실한 보고가 생산량 미달이라는 중죄를 덮을 만큼 공이 크다는 이야기니까.
“이번 새 총서기 이야기 들었네?”
“들었지. 크~ 군관 아새끼들 고거 훈련한답시고 민가까지 와서 털어먹는 놈들 요즘 점점 늘어나는데, 지금쯤 간담이 꽁꽁 얼어 있겠구만.”
“제기, 그래도 고게 다 복무 한답시고 전방으로 끌어가 놓고 줴기밥(주먹밥)이나 강냉이나 먹여대니 그런 거 아닙네? 배고프면 군관이고 당원이고 별 수 있네? 우리 아들도 군대에 가 있는데....”
“아, 그거야 곧 나아지겠지! 얼마 전에 뙤놈들로부터 쌀이 들어왔다는데 이제 좀 자기네들 주둔지에나 틀어박혀있으면 좋갔는데....”
평소 비슷한 사정들이 하나씩 있어서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일반 인민들은 통쾌해 했고, 당원들은 앞으로 새 총서기에게는 예전 같은 꼼수는 안 통한다는 것을 절감했으며, 역시 (다른 의미로) 남의 일이 아니었던 군관들은 오싹함을 느꼈다.
확실한 것은, 이번 총서기는 이전 두 명과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인식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전 공화국 인민에게 퍼져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총서기 동지, 오랜만입니다. 일본에서 뵌 후 여기 공화국에서, 그것도 이렇게 달라진 입장에서 뵈니 이 김용건이가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김 부장 동지. 외무부장에 오른 만큼 앞으로 더 잘해주면 좋겠군요. 그나저나 동지들........”
길게 말을 빼며 운을 떼는 정환의 시선에 이른 아침부터 서기실 전용 식당에 모인 간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경로로 어제 해주 공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기에 지금 입을 뗄 수 있는 건 그나마 정환과 안면이 있는 김용건 부장 정도였다.
그들의 예측대로 정환은 서기실 전용 조리사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조반상에 시선도 주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오늘 신문을 보다시피 지방으로부터 여기 평양에 이르기까지 부패와 부정이 이 공화국을 좀먹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뭐 생각들 없으십니까?”
신문을 테이블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하는 정환의 말에 테이블에 자리한 김용건, 현영숙, 장성택 등의 간부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환 역시 대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지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당군정 할 것 없이 만연한 이러한 비리, 부정들에 대해 나는 총서기로서 일체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러한 비리, 통계오류, 부패 등을 전문적으로 수사 감찰, 처벌까지 맡아서 하는 부서를 신설하고 내가 위원으로 있는 중앙위 직속으로 두었으면 하는군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총서기 동지, 참으로 좋은 생각이지만, 제 생각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을 듯 한데요, 이 부분은 총서기 동지가 결단을 내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해 보시죠, 현 부장 동지.”
정환이 허락하자 현영숙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이윽고 육감적인 붉은 입술을 움직여 발언을 시작했다.
“그러한 사정(司正)기관을 창설하시는 데에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공화국 사정에 밝은 사람이 수장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행정체계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깊은 속사정 같은 거 말이지요.”
지극히 올바르지만 여러 뜻이 담긴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혈통을 중심으로 공식 행정 직제와는 완전히 다른 인사나 신상필벌이 시시때때로 이루어지는 공화국의 특성상, 서류 위로는 보이지 않는 힘 싸움에 밝은 사람이 수장에 앉아야 함은 당연했다.
게다가 얼마 전 쿠데타로 인해 집권한 총서기 정환과 프룬제 일파를 비롯한 기타 권력들 간의 미묘한 상관관계는, 그야말로 이 새 수장의 업무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당연하지만 외압에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번에도 정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애초에 총서기인 정환 자신이 위원으로 있는 중앙위원회 직속으로 하자는 것도 그런 이유 아닌가.
“그렇겠지. 세 번째도 있습니까?”
“네, 마지막이지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건데.... 총서기 동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죠.”
조심스럽게 건의하는 현영숙의 말에 정환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기관이라는 건 결국 칼을 휘두르고 피를 묻히는 자리고, 잘못하다가는 칼을 준 사람이 그 칼에 베일 수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했다.
당장 아랫동네 대한민국에서만도 수없이 많은 역대 대통령들이 검찰을 비롯한 사법부를 길들이려고 고심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처음 정환의 생각은 적당한 직위가 없던 유혜림에게 이 사정기관의 수장 자리를 주는 것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유혜림은 이런 일을 하기에는 배경이 너무 미약했다.
결정적으로 정환은 유혜림이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장 옆에서 항상 자신을 보좌해줬으면 했다.
“누구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정환의 물음에 간부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때, 눈치를 보던 김용건이 먼저 손을 들며 말을 꺼냈다.
“총서기 동지, 제 생각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