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49화 (49/350)

12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비싼 법 (1)

12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비싼 법 (1)

“....................”

“.......총서기 동지?”

“잠시 기다리게.”

그의 의향을 묻는 서기실의 직원에게 정환은 머리를 굴리며 침묵을 지켰다.

몸이 달으셨군, 하기야 이쯤에서 연락이 올 때가 됐지.

당 총서기 취임 이래 정환은 의례적으로 그와 같은 당의 지도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일, 각국 대사들과의 접견 일정을 아직 잡지 않았다.

어느 국가의 정상들이나 취임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외국 대사들을 접견하고 앞으로의 관계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사실 그런 행동의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지금쯤 한국이고 중국이고 미국이고 러시아고 할 거 없이 내 정체에 대해 궁금해 하겠지. 말하자면 지금 나라는 인간에 대한 정보는 상한가를 치고 있는 셈이다. 이 이점을 이용해서 최대한 긁어낼 수 있는 만큼 긁어내야겠군.’

1988년, 중국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아래 개혁개방 드라이브에 박차를 가하고, 경제특구 조성을 필두로 한 시장경제 도입을 어느 정도 진행했다.

물론 그 부작용 역시 벌써부터 나타나면서 중국 내부에서는 불만이 누적되고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 정환이 총서기로 취임한 북조선 입장에서는 ‘타락한 자본주의 반동 진영‘에 이미 한 다리 걸치고 있는 게 중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북조선의 중국에 대한 의심은 마침내 4년 후, 1992년, 대한민국과 중국의 정식 수교로 인하여 정점을 찍게 된다.

공화국, 그러니까 북조선 입장에서는 40여 년 전 같은 전쟁에서 싸웠던 혈맹에 대한 배신이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그럼에도 북조선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왜? 고난의 행군이 바로 눈앞인데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버팀목인 중국마저 북조선을 저버리면 정말로 재앙이 닥치니까.

물론 중국 입장에서도 대한민국에 주둔한 주한미군을 창끝으로 하는 미국 견제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도 북조선을 연명시켜야 했으니, 자신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북조선의 새 권력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지금쯤 안달복달하고 있을 것이다.

‘뭐 쿠데타 같은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김정일을 끌어내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어떤 인간인가 간을 보려고 오는 게 주목적이겠지.’

그래도 꼴에 대국의 자존심이라고 이쪽에서 연락을 해주기를 기다리다가 못 참고 결국 먼저 접촉을 해온 거 같은데, 정환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어차피 지금 외교관계상 중국보다 다른 국가 대사들을 먼저 접견하는 건 대국에 대한 소국의 무례 겸 조중우호관계에 대한 적신호라고 해석하고 고운 말이 안 나왔을 테니 중국 대사를 먼저 만나보기는 해야하니까.

“중국 대사 동지께 모레로 약속을 잡자고 전해주게. 오늘은 내가 몸이 좀 아프다고.”

“아, 알겠습네다.”

이윽고 비서실의 전화가 끊기자 정환은 옆에서 무슨 소식인가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유혜림에게 지시했다.

“온 중국 대사 동지가 만나자고 하는군. 아무래도 내 얼굴을 익혀두고 싶은 모양이야.”

“아, 환영할 만한 소식이네요! 동지가 전권을 잡으셨다는 걸 외국의 외교관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 두신다면 홍 차수를 비롯해서 공화국 군부를 통제하시는 게 훨씬 쉬워질....”

“유 소좌, 전보 하나 써. 백승철 소장...... 아니, 이제 중장이군. 백 중장에게. 내용은 모레 온 대사를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동석해 줄 수 있겠느냐?”

“...............네???”

“반드시 전화가 아니라, 전보를 써. 알겠나?”

유혜림은 전혀 뜬금없는 정환의 지시에 얼굴이 온통 ‘?’하는 의문부호로 가득 찬 듯 했다.

아무리 아직 군부와의 관계정립이 좀 불안하다고 해도 정환은 김일성의 아들이자 김정일의 (일단 서류상으로는) 후계자다.

게다가 당의 1인자인 총서기이자 군권에 있어서는 주석 다음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인 그가, ‘일개’ 중장인 백승철에게 허락을 구한다고?

그것도 타국 대사를 만나러 가는 일에?

“정환 동.... 아니, 총서기 동지. 죄송하지만 저 유혜림이 불민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잘....”

“걱정 마, 곧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니까. 백승철 그 답답이가 쓸모 있을 때도 있군.”

이틀 후, 온업담 (溫業湛) 주 북조선 중국 대사는 당사 서기실에 앉아 곧 자신과 만나게 될 김정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가늠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김정환이라... 김정환.... 도무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어디서 이런 애송이가 튀어나왔을까? 하기야 김일성 주석 동지가 마오(毛) 동지만큼이나 여자 깨나 밝힌다고 들었으니 사생아가 하나 둘 쯤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지만....“

온업담은 앞에 놓인 차가 식는 것도 모른 채 본국인 중국에서의 지시사항을 되새기고 있었다.

- 김정환이라는 동지는 대체 누구인가? 김정일과 비슷한가, 아니면 다른가? 김정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 그는 어떤 성향이며 앞으로 그가 이끌 조선은 우리 중국과의 40년 교분을 지속할 의향이 충분한가?

이걸 알아내는 게 온업담의 가장 큰 과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몇 년 간 머무른 온업담이 보는 견지에서, 조선은 그야말로 10년 전의 중국을 보는 듯한 기괴하면서도 답답한 국가였다.

비록 한 때 중국도 모택동을 신성시하다가 문화대혁명이라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그로 인해 엄청난 퇴보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덩샤오핑 동지의 영도 아래 친서방 외교 노선을 견지하며 경제 성장을 최우선 가치관으로 삼아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조선은 통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회주의에서조차 죄악시하고 그 위대한 마오 동지조차 꿈도 꿔본 적 없던 김일성 - 김정일 2대 세습을 실현하려고 국가의 미래를 불구덩이에 던져 넣고 있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세습을 받게 된 김정일이라는 아들놈은 그 아버지 김일성 뺨치게 무능하고 잔인해서, 외국인인 온 대사조차 김정일이 사라졌을 때 마음속으로 기쁜 감정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뭐, 말이 후계를 넘긴 거지 실은 찬탈 당한 거겠지만..... 문제는 누가 김정일이를 죽였느냐 하는 건데...’

한 달 여 전 류경 호텔 붕괴 사고가 암살시도였다는 것은 평양에 거주하는 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암살시도의 주축이자 현재 김정일을 몰아내고 집권한 정권의 실세가 누구냐하는 것이다.

머지않아 본국에서도 고위 당원을 보내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 구축, 그러니까 앞으로 대미(對美) 전선에서의 방패막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달라는 메시지 전달을 할 텐데, 자신은 그 밑작업과 사전 정보 수집을 해둬야 했다.

온업담이 아무리 생각해도 김정환이라는 놈보다는 조선인민군의 장성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가설에 나름 무게를 싣던 차에, 기다리던 사람, 총서기 김정환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과 함께.

“콜록, 콜록.... 온업담 대사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총서기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영광..... 콜록....”

“....................!?!?!?!?”

“정환 동지. 왜 그러시오? 어서 앉으시오.”

“가, 감사합니다. 백 중장 동지.... 얼마 전부터 몸이 좀 안 좋아서.... 콜록콜록....”

들어온 사람은 얼마 전 취임한 조선로동당의 총서기, 김정환과 군복을 입은 40대 초반의 패기만만한 군관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연신 기침을 하던 김정환 총서기는 이내 좀 놀란 듯한 표정을 한 옆의 군관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결례에 사과드립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직을 거치지 않아 이런 종류의 일에는 영 익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백승철 중장 동지와 함께 한 겁니다. 제가 보낸 전보는 잘 받으셨는지요? 백 중장 동지?”

정환의 물음에 백승철은 얼떨떨한 얼굴로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면서 다시 물었다.

“아, 여기 보다시피 그건 받았소만...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나는.....”

“쓰인 그대로입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오늘 온 대사님과의 접견에 중장 동지와 홍계성 차수 동지가 중추로 계시는 ‘새로운’ 인민군의 허락을 구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대국과 새로운 우의를 다짐하는 이 자리에는 백 중장 동지가 그 대표로 나오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콜록 콜록.....”

“.............!!!”

여러 가지 뜻을 담은 정환의 말에 백승철과 온업담의 머릿속에 각자 다른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말 자체는 동시에 같은 말을 들었지만, 지금 각자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두 사람은 서로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게 무슨 뜻이지? 이제 와서 과거 지난 일을 덮고 잘해보자는 뜻인가? 그럴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한들 우리 프룬제 일파가 장악한 군을 빼놓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테니. 이건 아마 이 백승철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화해 신호인 동시에, 앞으로의 관계 구축에서 우리 군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면 홍 차수가 아니라 나를 부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백승철의 경우, 팔자에도 없는 환자 흉내를 내며 자신에게 접견의 주도권을 떠넘기는 정환을 보고 그 태도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 조중동맹은 군사동맹, 40 년 간의 혈맹이다. 당연히 군부 인사가 자리를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지. 게다가 얼마 전 거사를 통해 나도 당 중앙위 위원을 겸하게 되었으니 이건 아마도 내게 보내는 선물이겠지. 하기야 이제 쏘련의 체브리코프 동지도 우리에게 등을 돌린 이상, 중국에 아는 면을 만들어두는 게 내게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안 봤는데 김 총서기도 제법 타협적인 면이 있군. 역시 총을 안 잡아본 백면서생 출신이라 그런 건가?

한편, 온업담 대사 역시 테이블의 맞은편에서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분석했다.

조선중앙방송으로 중계된 당 대회에서와는 달리 유약하기 그지없는 정환의 첫 인상에, 온업담은 조금 전까지 고민하던 의문에 대해서 해답을 얻었다고 확신했다.

-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저 유약하기 그지없는 젊은이가 김정일의 후계자라고? 아니, 그것보다 조금 전에 허락이라고 했지? 역시 그런 거였군. 저 김정환이라는 총서기는 반란을 주도한 군부의 일파가 내세운 허수아비가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저 백승철이라는 장령에게 대국 대사인 나를 접견하는 데 허락까지 구할 리 없지. 가만있자, 내가 알기로 백승철이라는 저 장령은 분명히 쏘련의 프룬제로 유학을 갔다 온 자인데....?

여기까지 생각하자 온업담 대사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정환이 ‘새로운 인민군’이라고 언급한 부분까지 합쳐져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 온 대사가 내린 결론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도 싫은 결론이었다.

- 새로운 인민군이라... 아무래도 쏘련의 손길이 여기에 닿아있는 게 분명하군. 얼마 전 김정일이를 축출한 쿠데타는 저 백승철이라는 장령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가 쏘련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게 확실하다. 자신들이 직접 주석이나 당 요직에 오르기는 인민들의 반발이 심할 테니 어디서 아무 배경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김일성이의 사생아 하나를 데려다 당 서기를 시킨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 조선은 벌써 쏘련에 넘어간 식민지나 다름없는데.... 큰일이군. 어서 본국의 중앙당에 알려야 한다.

“아무래도 저는 얼마 전 온 대사님에게 말씀드렸던 질환이 아직 몸을 괴롭혀서 별 대화를 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은 백 중장 동지께서 저를 대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하하하. 걱정 마시오, 정환 동지. 그러게 내가 평소에 좀더 바깥바람을 쐬고 장정다운 기백을 기르라고 하지 않았소? 오늘 온 대사 동지는 내가 잘 대접할 테니 옆에서 지켜보기나 하시오.”

‘엄청 좋아하네, 등신.’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이미 백승철과 온업담은 ‘40년 간의 우의’니 하는 의례적인 외교적 수사에 돌입한 후였다.

그리고 30분 정도의 접견이 끝나자, 온 대사는 인사와 함께 정환과 백승철에게 작별을 고했다.

비록 정권이 바뀐 후 으레 있는 형식적 첫 접견인지라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지만,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온업담의 얼굴에는 전례 없을 정도로 심각한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중국 대사관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비서실을 통과해 직통으로 온업담에게 연결된 그 전화의 주인공은 바로 낮에 보았던 프룬제 일파의 꼭두각시, 총서기 김정환이었다.

“온 대사 동지. 이 밤중에 실례지만 잠시 접견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낮에 처럼이 아니라 ‘진짜’ 접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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