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47화 (47/350)

11장. 군(軍)과 민(民) (1)

11장. 군(軍)과 민(民) (1)

1988년 11월, 시대는 유라시아의 거인 소비에트 연방이 슬슬 침몰에 가까워지고 냉전이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기울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그 무렵, 저 멀리 사회주의 진영의 별종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느닷없는 정권 교체는 각국 외교가를 시끄럽게 달구고 있었다.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인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그중 대한민국의 정보기관과 청와대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패닉에 빠져있었다.

- 도대체 김정환이 누구냐? 어디서 뭐하다 온 놈이야? 어떻게 북조선의 수령이 된 거지? 그보다 왜 우리가 이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정환이 당 총서기로 취임한 지 12시간도 안 되어서, 이런 질문들이 각국 정보기관과 대사관, 고위 관료 사무실 문턱을 천둥처럼 강타했다.

그리고 그중 충격이 가장 엄청났던 것은, 한국의 대내외 정보를 총괄하는 국가안전기획부, 줄여서 ‘안기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빠악!

“큭.....!!”

서울 이문동에 위치한 안기부 해외 파트의 한 어두운 사무실, 소매를 걷어붙인 와이셔츠 차림의 한 남자가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있었다.

‘쪼인트’에서 올라오는 강렬한 통증에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이 나왔지만 남자는 이를 악물며 방금 자신의 정강이를 걷어찬 상사의 귀에 신음이 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허허허....나 참 이거.... 큭이라고 했냐, 방금? 큭? 이 판국에 신음소리까지 나오고, 아주 정신상태가 널널하시구만, 박세황이? 올림픽 끝났다고 아주 그냥 제대로 군기가 빠졌어. 엉? 그렇지?”

“아, 아닙니다! 즉각 시정하겠습니다!”

“그래, 시정 좋지, 시정. 자, 다시. 부동자세.”

방금 그의 정강이를 걷어찬 남자, 안기부 3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 박세황은 즉시 양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내 방금 전보다 몇 배는 더 거센 쪼인트 가격이 날아들었다.

“...............!!!!!”

잠시 하늘이 노래지고 쭉 편 손이 주먹으로 꽉 쥐어졌다.

차장이 공수여단 출신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일격이었지만, 단둥과 선양, 홍콩 등지를 넘나들며 음지의 전쟁을 수행해온 사람답게 박세황은 고통을 견디어냈다.

이번만큼은 차장도 좀 의외였는지 그는 더 이상 박세황의 조인트를 걷어차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를 식히듯 허리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어이, 해외정보실 실장 박세황. 박 실장아.”

“옛, 차장님! 말씀하십시오!”

“너 지금 내가 부장님 수행해서 어디 갔다 온 거 같냐?”

“..................”

“청와대 갔다 왔어, 청와대! 거기서 긴급 국무회의 갔다가 지금 바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런데 너 거기서 우리 부장님이 다른 장관들, 수석들 앞에서 무슨 치욕을 당하고 오신 줄 알아 몰라? 이 새끼야, 엉!”

“.................!!!!”

모를 리가 없었다.

얼마 전 (그야말로 대한민국 전체의 국력을 기울여 준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88서울 올림픽 개막식 날의 기억은 박세황에게도 아직 생생했다.

세계인이 지켜보는 전 지구촌 축제인 올림픽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더 이상 변방의 전쟁위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선전하고 국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을 인증하기 위해 민관군이 쏟은 심혈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기 싫은 판잣집을 철거하고 서울을 꽃단장하는 등 양지에서의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그들, 안기부를 필두로 하는 음지에서의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 국가적 행사인 올림픽을 사보타주하기 위해 저 뿔 달린 빨갱이들, 북괴 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국내보안을 전담하는 2차장실의 지휘 아래 마지막 한 점의 테러 의혹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박세황은 참으로 오랜만에 퇴근할 수 있었다.

해외정보실 실장이라는 직위 상 직접적인 업무범위가 아니기도 했고, 국내에 있을 일보다 해외에 있을 일이 더 많은 그가 가족들 얼굴 잊어먹겠다고 사정한 끝에 얻어낸 꿀맛 같은 휴식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기부라는 지위와 인맥을 동원해 얻어낸 개막식 티켓으로 오랜만에 가족들에게 점수 좀 따려 했던 그 날, 모든 게 바뀌었다.

‘박 실장! 지금 뭐해!’

‘네? 무슨 일이 터진 겁니까?’

‘무슨 일이고 자시고 당장 튀어와! 북에서 큰 사고가 있었대!’

무선호출기에 뜬 3차장을 뜻하는 숫자, 그리고 그 뒤에 붙은 ‘8282’라는 메시지를 보고 연결한 전화에서 성난 상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박세황은 가족들을 뒤로 하고 바람처럼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간 북중접경지대의 모든 휴민트(HUMMINT)들을 가동시켜 모은 정보를 휘하 분석관들과 취합한 결과, 박세황이 내린 결론은 ‘이건 진짜 큰 일’이었다.

‘실장님, 이거 북측 정보통제의 강도를 볼 때 여타 철도 탈선 사고나 아파트 붕괴 정도는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 뭔지는 몰라도 졸라 큰 사고를 친 거 같군. 그게 아니면 이 정도로 정보가 안 새어나올 수가 없어. 어쩌면 쿠데타일 수도.... 미치겠네, 왜 하필 올림픽에...’

‘설마요, 저 사이코 통제광 동네에서 쿠데타라니... 그래도 벌써부터 전방부대 휴가 잘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네요.’

‘이 친구야, 우리는 이미 잘렸어. 앞으로 최소 열흘 간은 집에 갈 생각을 말아야겠군. 으휴, 간만에 가족들 얼굴 좀 보나 했더니. 아무래도 나는 올림픽 볼 팔자가 아닌 거 같구만.’

정환은 류경 호텔 76층 기념식을 제의하면서, 외신기자들은 초청하지 말 것을 김정일에게 건의했다.

최종 목표치인 105층을 달성했을 때 외신들을 초대해야 더 모양새가 좋다는 게 이유였다.

드물게 김정일 장군과 김일성 주석이 한 자리에 있을 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돌발 사태를 막고 싶었던 호위총국이 이에 동의하면서, 처음 며칠간 공화국 밖에서 알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곧 주재 대사관 등을 통해 북조선이 자랑하던 류경 호텔이 시원하게 붕괴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얼떨떨해 하면서도 대한민국 국민들 대부분의 반응은 ‘쌤통이다’였다.

당장 국영방송에서 올림픽 구경 나온 시민들을 취재한 결과 취재에 응한 절대 다수의 반응은 ‘드디어 국운이 남으로 기우는 것 같다’이었을 정도니까.

- 아이고, 꼴 좋구만요, 빨갱이 새끼들. 우리 63빌딩 따라 잡겠다고 별 쌩 지랄 염병들을 다 떨더니. 마천루는 아무나 짓는 줄 아나. 쯧쯧.

- 속이 다 시원합니다! 드디어 저기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돌아가신 분들이 저승에서라도 편히 쉬시겠네요.

- 저희 아부지가 6.25 때 북에 끌려가서 아직도 못 돌아오시는데, 제놈들이 천벌 받는 거 보니 그래도 하늘이 무심치 않으시네요.

물론, 반응이 좀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들 중 상당수는 이 사고를 계기로 북조선이 또 무언가 돌발행동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했고, 그중 소수는 그래도 같은 민족 동포끼리 큰 사고를 박수치고 좋아할 수는 없다고 취재에 답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그들 안기부로서는 일반 시민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사고에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게 정말로 순수한 사고인지부터도 의심스럽다는 게 박세황을 포함한 그들의 생각이었다.

‘차장님,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지만, 그 자리에 북측 1호, 2호. 김일성, 김정일이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 사고에서 그 두 명이 죽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상을 입었다면, 이건 아마도....’

‘그래, 또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지. 붕괴 사고 그 자체가 더 큰 그림의 일부일 수도 있고. 그런데 북에서 그 정도 큰 그림을 그릴만한 능력과 배짱이 있는 놈들이 누가 있을까? 인민군?’

‘중국이나 소련일 수도 있죠. 어쨌거나 지금은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습니다. 정보원들에게 눈 귀 모두 활짝 열어두라고 해놓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도 이 빨갱이 수뇌들,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뭔가 김 빠지는데.... 하여튼 정보 통제는 잘 되어가고 있지? 2차장실이랑 협조 잘 해. 또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알겠습니다.’

‘이미 전방에는 진돗개 두 마리 내려왔어. 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굳이 알릴 필요는 없겠지. X 같은 빨갱이 새끼들, 하여간 잔칫날에 초치는 데는 뭐 있다니까. 하필 올림픽에...’

‘.......................’

‘류경 호텔 사고까지야 하도 큰 건이니 못 막았다고 쳐도, 쿠데타 가능성처럼 불온한 정보를 일부러 유통시킬 필요는 없어. 선거철도 아니고 올림픽에 뭐하려 민심을 불안하게 해?’

그 때 박세황은 속으로 그래도 좀 더 경계를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올림픽 기간 중 주한미군으로부터 북한 상공을 감시하다가 전투기로 추정되는 물체가 감지되고 평양에서 무력 사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외신은 슬슬 뭔가 이상하다는 분위기를 감지했고 종로와 여의도를 중심으로 괴담이 돌았으며 국채 가격이 떨어졌지만, 그때도 안기부의 공식 입장은 ‘불확실’ 이었다.

일전에도 이런 정보들이 헛다리를 짚은 적은 많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올림픽 기간 아닌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 위험한 휴전국가가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해왔는데, 확실치도 않은 정보를 인정해서 괜히 외국인 관광객들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박세황의 우려는 곧 ‘김정환 총서기’이라는 이름의,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현실이 되어 그들 눈앞에 나타났다.

“각하께서 부장님 세워두고 물으셨다고! ‘도대체 김정환이라는 친구가 뭐하는 친구입니까? 대답해보세요.’라고! 근데 부장님이 거기서 입만 벙긋하다가 오셨는데, 해외정보실 너희들은 대체 뭐하는 새끼들이야!!!!”

‘북한 정보 담당인 건 3차장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김정환이 누군지 모른 게 나뿐이었냐? 왜 나한테만 지X이야!’

........라고 박세황은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다음에는 조인트가 아니라 주먹이 날아올게 확실할 테니 그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이내 펄떡 펄떡 뛰던 차장은 이내 제풀에 지친 듯 뭐라고 씨근덕거리다가 이내 박세황에게 엄포를 놓았다.

“긴 말 안한다. 지금 당장 단둥으로 가. 거기서 알 수 있는 모든 걸 다 알아오라고! 이번 사태가 쿠데타인지, 정권 교체인지! 당 대회는 어떻게 열렸고 김정일은 어디로 증발했고 김일성이는 아직도 주석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네! 말씀하십시오, 차장님!”

속으로 차장에게 욕을 퍼붓던 박세황은 차장의 으르렁대는 말에 기겁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김정환인가 뭔가 하는 놈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말 뼈다귀인지, 북의 실질적 권력자인지 아니면 얼굴마담인지! 대북관계가 어떻게 풀리고 그게 각하의 북방정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그걸 알아오란 말이다, 알겠냐?”

“마, 맡겨주십시오!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하여간 말은 잘해, 입만 산 새끼. 쯧쯧....”

이내 차장이 사라지자 박세황은 사무실 책상에 주저앉아 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단둥은 단둥이고 김정환은 김정환이지만, 이럴 때는 일단 니코틴 공급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하~~ 저 놈의 3차장 저거.... 하.....”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조금 전 일을 돌아보던 박세황은 중얼거렸다.

방금 전 3차장이 날뛸 때, 살짝 걷혀 올라간 그의 바짓단 밑에서 정강이에 붙은 파스를 발견한 것이다.

아직도 뻘건 기색이 남아있는 정강이를 덮고 있는 파스는, 방금 전 그를 닦달한 차장도 어디선가 신나게 ‘쪼인트’를 까이고 자신에게 달려왔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쪼인트를 걷어찬 사람은 뭐.... 불문가지 아니겠는가.

“이놈의 대한민국은 하여간 쪼인트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요, 일이... X발...”

박세황은 언젠가 쪼인트 없는 비폭력 대한민국이 왔으면 좋겠다는, 안기부 실장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은 소시민스런 소망을 품으며 단둥행 비행기 티켓을 끊기 위해 담배를 끄고 사무실로 향했다.

한편,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평양, 안기부 내리갈굼의 주된 원인, 조선로동당 총서기 김정환은 노동당 청사 3층 서기실에 앉아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총서기에 취임한 이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제일 먼저 전대 장군인 김정일의 사람들을 쳐내면서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정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업무를 인수인계 받기 위해 당의 각 전문부서 부장들에게 분야별 총 보고서를 올리라고 한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약 1주일간 서기실의 화려한 마호가니 나무 책상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빼곡한 보고서를 씹어먹듯 읽는 정환을 보면서, 당사 식구들은 과연 이 젊은 총서기가 어떤 인간이길래 저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척 하)나 숨을 졸이며 보고 있던 차였다.

“휴우......”

눈이 아파져 오는 것을 느끼며 정환은 이내 경공업부 부장에게 올라온 보고서를 책상에 탁 내려놨다.

그리고 시선을 허공으로 향해서 눈을 쉬게 만들다가 이내 툭 던지듯 내뱉었다.

“개판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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