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당 대회 (2)
10장. 당 대회 (2)
잠시 걸어 창문도 없는 밀실 앞에 도착한 정환은 홍계성에게 물었다.
“여기 하전사들, 입은 무겁습니까?”
“걱정 마시게. 체포 즉시 우리 측 군관들이 두건을 씌우고 재갈을 물려서 여기로 인계했지. 경비 담당들 대부분은 여기 지금 뉘기가 갇혀 있는지도 몰라. 그보다, 김일성 주석은 뭐라고 하는가? 그래도 자기 아들인데,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하지 않던가?”
“자기 목숨도 오락가락하는 판에 아들 목숨걱정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속으로는 저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지금 와서 후회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제 어쩌겠습니까? 얼마 안 남은 여생이라도 편히 보내려면 그나마 남은 아들인 저에게 의지해야 하겠죠.”
냉정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담은 정환의 미묘한 말에 홍계성은 잠시 멈춰 서서 눈을 빛내다가 약간 더 공손해진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알겠네. 그래도 정환 동지,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군. 그래도 자기 아버지인데.....”
‘그 양반 우리 아버지 아니거든?’
몇 년이나 지나도 영 적응이 안 된다고 정환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혹독하다고 말할 참이라면 그만두십시오. 홍 상장 동지. 그리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까? 주석님이나 김정일이나 줄곧 자신들 본인을 인민의 어버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버이가 인민들에게 어떻게 대했습니까? 처음 약속했던 대로 이밥에 고깃국을 먹여줬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
“어버이가 먼저 자식을 배신했으니, 그 자식이 어버이를 배신한다고 욕하면 안 되겠지요. 목적 때문에 아버지 김일성 주석님을 살려두기는 했지만, 저는 그 뒤를 이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내일 있을 당 대회 행사에서 그걸 잘 아시게 될 겁니다.”
“......알겠네, 그리고 혹시 얼마 전 이야기했던 당 조직지도부 부장 자리 말인데....”
정환의 단호한 어투에 살짝 기가 눌린 듯한 홍계성은 이내 슬그머니 처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정환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한 발 먼저 이야기를 차단해버렸다.
“그 이야기라면 이미 결론이 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
“상장 동지, 제 사정 좀 봐주십시오, 저도 두 분 원로 사이에 끼어서 어쩔 수 없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애초에 보위국장 원흥희를 제대로 막지 못해 거사가 꼬이게 만든 게 그쪽이시니 제가 뭐라 말할 명분도 없고 말입니다.”
정환이 은근슬쩍 쿠데타 와중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홍계성은 내심을 찔린 듯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어쨌든 다 잘 풀렸으니 다행 아닙니까, 그럼 들어가시죠.”
곧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둘은 보초를 서던 하급군관을 내보냈다.
어차피 상대는 의자에 꽁꽁 묶여있는데다가 불과 한 달 사이에 몰라볼 만큼 수척해져있어서 별 위협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 상대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공화국의 실질적인 절대자였던 김정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보게 되어 유감이군. 형님 장군 동지.”
“..............!!!!!............!!!!!”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김정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10초쯤 멍하니 정환을 쳐다보았다.
이내 상황이 파악되고 누가 자신을 여기 가뒀는지 알게 되자 흐리멍텅하던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그래, 좀 어떻게 지내시나? 그동안 애용하시던 특각보다는 많이 불편할 거 같은데.... 여기로 보낸 사람의 면상을 직접 보니 기분이 어떠시오?”
“..........................”
처음 정환이 예상한 김정일의 반응은 광분이었다.
평상시 의뭉스럽다가도 누군가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미칠 듯이 광분하는 김정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자신을 속이고 반란을 일으킨 정환의 얼굴을 눈앞에서 보면 입에 거품이라도 물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예상하고 있던 정환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김정일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 이보라우, 아... 아우. 아우가 이겼네, 이겼지, 기래. 그러니 이 형님 동지의 사정을 좀만 봐주라우, 내 이렇게 부탁할 테니, 응?”
“.......................”
“이 형님이 당 서기일 시절 아우를 잘 봐준 거 기억나지 않간? 이 김정일이가 그, 아우 유학하라고 외환도 주고, 류경 호텔 공사 책임자 자리에도 앉혀주고, 안 기렇나? 가, 같은 전주 김가끼리 골육상잔을 벌어서야 인민들 보기 부끄럽지 않갔어? 제발.....”
자신의 눈앞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김정일을 보며 정환은 놀라움 반, 어이없음 반이 섞인 심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김정일이 그 미치광이 같은 폭력성만큼이나 상황을 판단하는 머리 회전 속도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잠시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바디도 같은 핏줄끼리 다투는 걸 원하지 않으실 기야, 기, 기렇지 않네? 제발.... 아우의 조카 정남이를 생각해보라우, 고 놈이 이제 겨우 스물도 안 됐어. 조카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울 생각은 아니디? 그러니.........”
“적당히 하라, 김정일이! 그 아바디 김일성 수령님을 독살하려고 패륜적 모략을 책동한 게 제놈이면서 무슨 낯짝으로 수령님 이름을 담네? 내 한때나마 저런 종자를 장군이라고 모셨으니 기가 멕혀서 원.....”
옆에서 듣고 있던 홍계성이 기가 찬다는 듯이 김정일을 조롱하자 당장이라도 애원할 듯 했던 김정일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는 이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이를 갈면서 홍계성을 윽박질렀다.
“........이이이......... 입 닥치지 못하나, 이 반동 놈의 새끼가! 그동안 너희 로씨야 종파주의자 무리가 앞에서는 기고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걸 내 몰랐을 것 같네? 내 장담하는데 여기서 나가면 네놈의 아가리부터 찢어줄.........”
“.........풀어드리지.”
“..............!!!!”
정환의 조용한 한 마디에 방안의 분위기가 확 반전했다.
홍계성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급하게 돌려 정환을 바라보았고 반대로 김정일은 지옥에서 동앗줄을 잡은 사람마냥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환 동지, 기게 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단, 대신에 써줘야 할 게 한 장 있습니다.”
“...............???”
예상치 못했던 조건의 등장에 잠시 어리둥절했던 김정일의 얼굴은 이내 정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흉하게 일그러졌다.
“김정일 장군 동지가 혹시라도 유고(有故) 상황에 처할 경우 당과 군의 모든 직책과 권한을 나 김정환이에게 양도하고 이 공화국의 차기 수령으로 적극 지지하며 충성을 맹세한다는 유서를 한 장만 써주시면 됩니다.”
“...............!!!!”
정환의 말을 듣자마자 김정일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했다가 이내 자줏빛으로 변했고, 조금 있다가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잠시 동안 김정일은 정환의 제안을 가늠해보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계성 역시 정환이 무언가 속내가 있으리라고 짐작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앉아있는 좁은 밀실은 이내 깊은 침묵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김정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환의 눈치를 보며 자신이 쥔 패를 가늠해보는 그 모습은, 한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며 공화국을 호령했던 김정일 장군을 전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바깥 사정은 모르지만... 이, 이미 당이고 군이고 다 정환이 네가 집어먹지 않았간?”
“잘 보셨군요, 그렇습니다.”
“기럼 대체 왜 이런 종이쪼가리를 필요로 하는지 이 형은 도통.....”
호기심과 절박함이 반씩 섞인 그 질문에 정환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하하, 형님 장군 동지도 잘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이 공화국에서도 요식행위라는 건 중요한 겁니다. 뭐 일반 인민들은 몰라도 당 간부급이면 한 달 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이 김정환이가 전전대 수령이신 아바지와 전대 수령이신 형님께 직위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해야 하니 말입니다.”
“.............”
“게다가 아시다시피 그동안 형님 동지께서 다른 이복 형제들을 싸그리 손 봐오신 덕에, 중앙 정계에서는 제 얼굴도 모르는 간부들이 많습니다. 그 문제야 차차 시간이 흐르면 해결되겠지만, 그 일을 더 쉽게 해주고 제 정통성을 굳힐 증표가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기, 기럼 이 형이 얻는 건.....”
“만약 제 요청을 들어주신다면 형님은 물론이고 조카 정남이까지 안온하고 행복하게 여생을 해외에서 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조력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대로 차를 태워서 일본이든 스위스든 어디로 보내드리죠. 미화 천만 불과 함께 말입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정환은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 한 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었다.
“그나마 이 조건도 제가 다른 동지들을 설득해서 간신히 얻어낸 겁니다, 형님. 원래는 다른 동지들이 벌떼 같이 일어나 형님을 죽이자고 했단 말입니다. 게다가 형님이 아바지한테 하신 일 때문에 아바지 수령님도 대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어떻게 말리기는 했지만, 아바지께서 언제까지 그 분노를 참아주실 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분 성격은 형님이 가장 잘 아시지 않습니까.”
“...........!!!!”
‘최대한 빨리 결정하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거다’라는 완곡하게 돌려서 한 정환의 말에 김정일은 손까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거의 발작처럼 보일 정도로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정환은 그가 결국 무슨 선택을 내릴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결국 김정일은 결단을 내렸다.
“알았디. 알갔어. 뭐든 써줄 테니 이 형을 죽이지만 말아주기야. 내 뭐라고 쓰면 되니?”
“이미 초안을 써놨습니다. 형님 동지는 그저 이 종이에 그대로 따라 쓰시고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약속은 지키갔지, 응? 그래도 혈육의 정리라는 게 있는데.....”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확인을 받으려는 김정일에게 정환은 귀찮음을 느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모든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 짓기 위해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아 물론입니다. 형님, 제가 설마 그 어린 정남이까지 죽일 정도로 랭혈(냉혈)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지요?”
“.......기건 기렇디.”
“그럼 어서 작성을 마쳐주십시오. 반드시 약속을 지키갔습니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김정일은 떨리는 손으로 약 1년 전 날짜로 지정되어 있는 문서에 서명까지 마쳤다.
서명이 끝나자, 정환은 문서를 한 번 쭉 읽어보고 소중하게 품속에 잘 간직했다.
‘이걸로 한 시름 덜었군. 내일 당 대회 마지막 날에 이걸 발표하기만 하면 지금 내 옆에 있는 홍계성 상장...아니, 홍계성 차수를 포함해 모든 불안 요소가 한층 경감된다.’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가족들과 함께 안온한 여생을 보내시길 빌면서 이 동생은 가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정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홍계성과 밀실을 나왔다.
뒤에서 김정일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밀실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그는 즉시 홍계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에 바로 집행하십시오. 원흥희, 김영룡 나머지 두 명과 함께, 두건 씌운 채로 시체는 태워버리고.”
“...........알갔네. 김정남이랑 나머지 친족들은?”
그 질문에도 정환은 이미 생각해놨다는 듯 즉답했다.
“정남이는 일본으로 보낼 계획입니다. 유학이든 뭐든 핑계는 대강 만들면 되고, 남은 여생 공화국에 다시 들어오기는 힘들겠지만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게 될 겁니다. 비용은 제가 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 적어도 완전히 거짓말은 안 했군.’
내 입으로 직접 보장한 건 김정남과 친족들의 신변이지 김정일의 신변이 아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지만, 김정일이란 인간이 이제껏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공화국에 저질러온 짓에 비하면, 이 정도는 매우 점잖은 거지.
“알갔네. 명령을 내려놓지.”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이 당 대회 마지막이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
‘?’하는 표정으로 정환을 돌아보는 홍계성을 보며 정환은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선포했다.
“언제까지 수령을 그렇게 호칭할 작정인가, 홍 차수?”
“.....................!!!!”
홍계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김정일처럼 갈등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환은 그가 무슨 결정을 내릴지 잘 알고 있었다.
방금 그 모든 일을 옆에서 지켜봤는데, 딴 생각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내 그는 고개를 숙이면서 공손한 목소리로 예를 표했다.
“이 홍계성이가 죽을 죄를 지었습네다, 수령 동지. 아니, 총....”
“그 호칭은 내일부터 듣지. 아직 당 대회에서 결정 난 게 아니니까 말이야.”
“........받들겠습네다.”
“그럼 그만 가보게.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그래야지, 홍 차수, 현명한 판단이야.
초병의 경례를 받으며 콘크리트 건물에서 빠져나온 정환은 다시 차에 타기 전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당 대회의 첫날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정환은 그동안 해왔던,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되새겼다.
‘저 하늘을 지금 어디선가 내 전생에서 알았던 사람들도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나는 정말로 이전의 이정환과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된 걸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시기상 정환의 아버지는 지금쯤 공무원으로서의 인생을 남조선에서 보내고 있을 것이고, 친구 김경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동안 그렇게 가슴 졸이며 계획해 왔던 일의 일 단계를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환의 가슴속에는 말로 못할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날, 1988년 10월, 당 대회 첫날이 끝난 어느 날 밤, 평양 외곽에 있는 보위부의 비밀 감옥 뒷마당에서 세 명의 죄수에게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들 중 한 명은 한 때 공화국 전체를 자신의 발 아래 두고 많은 인민들의 운명을 손가락 하나로 좌지우지 했던 인간이었지만, 총살을 집행한 하전사들은 자신들이 누구를 쏘는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가 죽었다는 것 역시 북조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짐작만 했을 뿐,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