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소용돌이치는 공화국 (5)
8장. 소용돌이치는 공화국 (5)
“무슨 질문..... 아, 그거라면.... 혹시....?”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장성택은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회의실을 나가기 직전 정환이 자신에게 추가지시를 내리던 김정일에게 다가가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물었던 질문이 기억난 것이다.
- 장군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마음 쓰지 말고 해보라. 형님한테 뭐 물어보지 못할 말이 있갔어?
- 수령님.... 그러니까 아바디는 괜찮으십니까? 전해 듣기로는 장수 의료원으로 옮겨가신 후 의사 동지들이 성심을 다해 치료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불효자식으로서 아바디의 환후가 걱정되어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입니다.
- 아, 하기야 그럴 수도 있디. 아들로서 당연한 거 아니간? 그건 말이디....
정환의 이 질문에 김정일은 옆에 있던 장성택을 쓱 ㅤㅎㅜㄼ어 보더니 큰 선심을 쓰는 듯한 어조로 대답해주었다.
- 상태가 아주 안 좋으시디. 의료원 동지들이 애쓰고 있기는 하디만, 내가 보이까니 머지않아 이 공화국의 큰 별이 지실 거 같아. 아들로서 나도 참 가슴이 찢어지지 않갔어.
- ...............!!! 그렇군요. 참으로 장군님의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 그렇디. 유감이디. 아무튼 지금 말해준 건 아무한테도 나불대지 말라우. 아바디가 그렇게 되신 것도, 국내외의 반동 분자들, 제국주의자들의 비열한 책동 때문 아니간. 아바디가 편찮으신 게 새어나갔다가는 고 간나 새끼들이 이때다 하고 다 들고 일어나 이 공화국의 체제를 흔들려는 수작을 부릴 수도 있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디?
- 염려 마십시오. 장군님. 설령 수령님이 돌아가시더라도 장군님 같은 후계자가 있는데 이 공화국의 앞날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 하하하.... 정환이 느이가 말을 참 예쁘게 하는 구나야. 아바디가 돌아가시더라도 앞으로 이 형을 잘 따라서 공화국을 이끌어갈 기둥이구만. 하하하....
“그게 거짓말 이라고? 그럼 수령님은.......”
“좀 다치긴 했지만 말짱하십니다. 이미 만수무강 연구소에서 치료를 받고 복귀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장군님 뜻대로라면 곧 안 말짱해지시겠지만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오랫동안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정일의 측근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온갖 모략을 눈으로 봐왔던 장성택이 이 정도로 설명해 줬는데도 모를 인간이 아니지.
정환의 예상은 바로 사실로 드러났다.
순식간에 그의 말뜻을 파악하고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장성택에게 정환은 쐐기를 박을 한 마디를 날렸다.
“곁가지인 저야 그렇다 치더라도, 장 부장 동지가 옆에 있는데도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장군님은 여전히 장성택 부장 동지를 못 미더워한다는 뜻입니다.”
“....................”
“보아하니 아무래도 장 부장 동지도 처음 들으신 게 확실한 거 같은데.... 혁명화 교육 이후에도 김정일 장군님은 장 부장 동지를 여전히 측근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가, 하하... 이거 기분 거지 같구만 기래.”
비록 중얼거리는 어조였지만 그 속에는 장성택이 느꼈을 분노와 허탈감이 여실히 배어나왔다.
그동안 김정일에게 그렇게 충성해왔는데도 돌아온 게 결국 이거라는 사실에 실망과 분노, 원래 가지고 있던 불만이 합쳐져 증오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내 고개를 숙이던 장성택은 괴소를 흘리며 이를 갈았다.
“흐흐흐.... 기래, 내가 즈 누이 서방이어도 여전히 종은 종이다, 그 잘난 백두혈통은 아니다, 이기간? 주인이 사냥개를 삶으려고 하면 개새끼도 주인 손을 무는 법이지. 좋아, 이제 나는 새 주인을 모실 준비가 되었네.”
“거사가 성공하면 장 동지에게는 당을 맡기겠습니다. 내각과 군은 이미 생각해놓은 동지들이 있으니 지금부터 제 계획을 듣고 그대로 실행해주시면 됩니다.”
“흠.... 내각이야 뭐 정환 동지랑 친하던 김용건이가 맡을테고... 군은 누구인가? 내가 알기로 정환 동지는 그 쪽에 별 연줄이 없는 걸로 아는데....”
이것 보게, 벌써부터 내 머리 위에 올라앉으려 하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장성택의 모습을 보면서 정환은 역시 이 인간은 믿으면 안 되겠다고 확신했다.
물론 거사가 성공할 때까지는 너무 많은 정보를 주지 말고 잘 부려먹어야겠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그건 머지않아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계획을 논의해보죠.”
다음 며칠 동안, 평양은 뒤숭숭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대놓고 티내지는 못했지만) 류경 호텔 사고에서 가족을 잃은 공민들의 비통함이 마치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평양 시내를 떠돌아다닌 탓도 있었지만, 감이 좋은 공민들은 그보다 불온한 기운이 감돈다는 걸 일찍 눈치 챘다.
그 불온한 기운의 정체는, 바로 평양 공민들, 심지어는 하급 군관들과 당 간부들 사이에까지 떠도는 김정일에 대한 불만이었다.
- 류경 호텔 사고는 김정일이 탓이다.
- 무리하게 공사를 지시했다가 하늘이 벌을 내려 천벌을 받은 거다. 공사 와중에 죽은 하전사들의 원혼이 김정일이를 저주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다.
- 김정일 장군님이 김일성 수령님 뒤를 이으면 공화국의 국운이 기운다더라.
물론 이러한 소문들은 사회안전부 요원들의 엄한 통제에 따라 결코 수면 위로는 올라오지 못했지만, 어떤 독재체제도 소문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 소문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하지만 역시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던 여러 불만들,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배급, 뒤숭숭한 국제정세, 남조선의 올림픽 개최에 따른 불안감) 등과 섞여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평양 밖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그렇게 10월을 눈앞에 둔 평양의 을씨년스러운 가을 어느 날, 정환은 어머니 김명애에게 모처럼 인사를 올렸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오냐, 몸 조심해라. 요즘처럼 칼바람이 추운 시절에는 그저 몸을 낮추고 다니는 게 제일이야.”
“..................”
아들에 대한 당부마저 돌려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정환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입을 다물었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진 김명애라도 평양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무너져서 수많은 공민들을 다치게 한 류경 호텔 사업에 아들 정환이 연관되어 있다지 않은가.
그녀로서는 하나뿐인 아들 정환이 무슨 해꼬지라도 당할까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입 조심하고.... 공화국에서는 무조건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게 제일이다... 알겠니?”
“....걱정 마세요, 어머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자신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에 정환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주고는 아빠트 밖으로 걸어나왔다.
보안을 위해서도 있지만, 그녀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신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입도 뻥긋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 정환의 ‘어머니’는 너무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오늘이군.’
정환은 흐끄무레한 평양의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오늘이다.
회귀 후 지난 3년, 그동안 계획하고 준비해왔던 일이 오늘 결실을 맺는 것이다.
물론 실패한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정치하고는 연이 없는 거지, 뭐.’
정환은 그렇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차에 탔다.
목적지는 주석궁이었다.
공화국의 태양, 김일성 주석은 그날 아침부터 영 몸 상태가 좋지를 못했다.
얼마 전 사고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인지 유독 헛구역질이 나고 머리가 띵한 게, 계속 잠만 자며 도무지 깊은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주석궁에 상주하는 주치의에게 검진을 받아보았지만, 그때마다 주치의의 대답은 ‘아무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몸을 보하는 한약재를 지어 올리갔습니다.’ 정도였다.
자신이 그래도 나이에 비해 건강은 좋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몸이 나빠져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뜻밖의 방문객이 있었다.
“주석님... 저....5과에서 보고를 올리러 왔습네다.”
“5과? 오오, 그렇지. 어서 안으로 들이라.”
5과란 조선노동당 5과, 바로 기쁨조로 알려진 여성 요원들을 말한다.
효성 깊은(?) 아들 김정일이 늙은 나이에도 정력이 왕성한 아버지의 만족을 위하여 자주 기쁨조를 뽑아서 진상하고는 했는데, 아마도 이번에도 몸을 보신하라고 예쁜 여성 군관을 보낸 모양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공화국 내에서는 비밀이었기에, 김일성에게 ‘보고’를 올리러 오는 녀성동지들은 항상 창이 검게 도색된 차 뒷좌석에 실려 배달되고는 했었다.
‘정일이 그 녀석, 그래도 아비라고 신경 써주는 구만, 기래! 역시 내 후계자는 고 녀석 밖에 없어.’
잠시 후 문이 열리자, 김일성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들어온 녀성 동지에게 언제나처럼 마사지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하자, 벌어진 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왔다.
“너는............ 성택이 아니냐? 경희하고 같이 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 주석궁에는 혼자서 무슨 바람이 불어 온 기야? 그리고 너는 정환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수령님. 이렇게 사전에 기별도 없이 방문한 것을 사죄드립니다. 하지만 긴급한 사안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뵐 수밖에 없었습니다.”
들어온 두 사람 중 젊은 쪽, 정환이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에게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이었다.
일단 첫 단계, 김정일의 감시망에 띄지 않고 주석궁에 들어오는 건 성공인 것이다.
비록 김일성의 호위를 전담하는 제 1호위부는 거의 전멸했지만, 그래서 현재 주석궁의 경비는 2인자 김정일의 직속인 제2호위부가 맡고 있었다.
그로 인해 더욱 빡빡해진 경호를 뚫는 것은 장성택의 도움이 주요했다.
- 당 5과요, 문을 여시오.
‘5과 선발을 하는 당 조직지도부 담당자가 장성택 사람이라 다행이었지. 그나저나 얼마나 놀아댔길래 5과라고 하니까 뒷좌석에는 눈길도 안 주고 바로 열어줘?’
정환은 속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여성편력에 대해 그렇게 씹어댔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됐기에 그 불평은 오래 가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오늘은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에게는 최악의 날이 될 테니까.
특히 김정일에게는.
“뭐이야? 긴급한 사안? 뭐이길래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내 아들과 사위가 직접 나선 기야? 대체 그 긴급한 사안이 뭐이간?
“수령님, 저와 여기 장 부장 동지는 얼마 전 공화국 내의 중대한 반역 행위에 대한 증거를 잡아내고 직접 보고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 반역 행위란 바로 이 공화국 최고 존엄, 수령님에 대한 암살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