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소용돌이치는 공화국 (3)
8장. 소용돌이치는 공화국 (3)
노인의 분노는 강렬했다.
마치 평생 동안 애지중지해왔던 애완동물이 어디선가 한쪽 다리를 다쳐서 절룩거리며 집에 들어온 걸 본 사람처럼, 그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사람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노인의 앞에 서있는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노인의 호통을 듣고만 있었는데, 평상시 그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라면 가히 기절초풍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내는 노인에게만큼은 그도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호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그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노인이 유일했다.
“인민들 앞에서 대체 이게 무슨 추태냐! 넌 당 조직비서라는 놈이 수령인 이 아바디까지 모셔놓고 부실공사로 저승 문턱을 왔다갔다하게 만들어? 그동안 내 생신 선물이라고 그렇게 자랑놀음을 하더니, 이래서 이 아바디가 수령이랍시고 인민들과 당원들에게 면이 서갔어?”
“.........................”
“그렇게 조가비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지 말고 대답이라도 해보라! 망신도 망신이지만, 이번 사고에서 죽은 당원들, 고급군관들이 몇이나 되는지 알기라도 하니? 그 동무들 대다수가 우리 김가를 지근에서 호위하는 열성당원들이야! 그걸 싸그리 씨 몰살을 시켜놓고 네가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고 당 국방위 위원장이 될 수 있갔어? 입이 뚫렸으면 대답을 해보라우!”
“........이 김정일이가 면목이 없습니다, 아바디.”
“거기다 아무리 경황 중이었다고 해도 그렇디, 사방에 인민들, 군관 동지들이 다 죽어 나자빠져 담가에 실려 나가는데, 거기서 너만 직승기를 타고 내빼? 지금 평양 내에서 공민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아니?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당 서기고 뭐고 다 당장 그만둬!”
“.....................!!!!!”
그 말이 나온 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노발대발하며 다그치는 수령, 김일성에게 얼핏 공손한 대답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사람은 물론 그의 아들, 김정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바닥을 향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말과는 달리 그가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은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한 김일성도 똑같이 받은 듯 했다.
“....정일이, 느이 어째 표정이 우거지상이야? 이 아바이가 야단치는 거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닙니다. 아바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또다시, 마음에도 없는 대답.
김일성의 안경 속 눈주름에 감춰진 눈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는 이내 자신의 후계자, 김정일에게 이내 믿겨지지 않는다는, 믿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일이 너, 이제 이 아바지가 거치적거리니? 다 늙어서 실권도 없는 게, 당도 군도 다 늬 손아귀에 넘어왔는데 뒷방으로 안 물러나고 뭐하냐, 이렇게 생각하는 기야?”
“.....................”
이번에는 아예 대답조차 없었다.
부정조차 하지 않는 아들을 보며 김일성은 당장이라도 뒷목을 붙잡고 쓰러질 듯 했지만 노화(爐火)가 노인을 지탱한 듯 했다.
하지만 간신히 몸을 곧추 세운 그에게 이윽고 2차 충격이 날아들었다.
“........아바지,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갔습니다.”
“......뭐이가 어째? 더 하실 말씀 없으면 가봐? 이런 간나 새끼가.....”
이제 대놓고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김정일에게 김일성은 화를 넘어 아예 기가 차는 듯했다.
설마 그렇게 자신을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뒷빡을 칠 줄이야.
젊은 시절부터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해온 동지들을 숙청하고, 한국전쟁 전우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말을 안 듣는 반동분자들을 숙청하고, 그밖에 수많은 놈들을 숙청했지만 이 말년에 아들에게 배신을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거의 평생 동안 배신과 숙청과 영욕 속에서 살아왔던 김일성이었지만, 그런 그마저도 자신의 혈육, 아들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북조선의 살아있는 신에게도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라는 격언은 예외가 아니었다.
“이 애비가 벌써 허수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직 군 임명권은 나한테 있다는 걸 명심해야디. 그리고 설령 모든 실권을 느한테 넘겨준다고 해도, 대다수의 인민들한테 이 공화국의 수령은 아직 이 김일성이야. 김정일이가 아니라! 알갔어?”
“......................”
순간, 김정일의 눈에서 불길한 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내심이 어떻든, 그는 일단 자신의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큰 사고를 겪으신 후라 심기가 편치 않으신 듯 합네다, 아바지.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저는 이만 물러가 보갔습니다.”
“썩 꺼지라우! 한번만 더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 김일성이의 후계자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다! 이 배은망덕한 새끼.........”
대답도 하지 않고 김일성은 방을 나온 김정일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관에게 물었다.
“다들 모였디?”
“네, 모두들 장군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네다!”
“기래, 어떤 놈이 태업을 했건, 이 김정일이를 골탕 먹인 놈은 단매에 골통을 부숴주갔어. 가자우.”
분노에 씨근덕거리면서 주석궁을 나서던 김정일은 대기하던 차량에 타기 직전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그러고보니까니... 아바디, 요즘도 보르시치 잘 드시지?”
보르시치란 러시아를 포함해 동유럽권에서 널리 사랑받는 육수와 크림을 넣은 수프의 일종이다.
소련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김일성에게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음식이라 노인이 된 지금도 요리사에게 주문해서 자주 먹고는 한다는 걸 김정일은 알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지금도 조리사 동무에게 자주 만들어 올리라 지시하십니다.”
“그럼 이따 그 조리사 동무를 포함해 주석궁에서 아바디 수발드는 동무들 다 당사로 오라고 하라우. 그동안 노인네 수발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앞으로는 더욱 수고해달라고 상찬을 내려야 하지 않갔어?”
“알갔습니다. 장군님!”
곧 차가 출발하자, 김정일은 가죽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항상 그에게 가르쳤듯 수령이란 힘든 결단을 내려야하는 자리고, 그는 방금 힘든 결단을 내렸다.
‘그만큼 오래 공화국을 위해 헌신하셨으니 이제 그만 아들한테 넘기시고 안락을 즐기실 때도 됐습네다. 고통 없이 보내드릴 테니 편히 가시라요, 아바지.’
차는 빠른 속도로 달렸고, 교통신호 같은 건 당연히 전부 무시했지만, 아무도 감히 장군님의 전용 차량을 잡을 생각을 못했다.
목적지는 김정일의 부하들이 전부 집합해있는 당사였다.
조선로동당 당사 3층 대회의실은 제법 많은 인원이 모여 있음에도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모인 인물들의 면면을 봐도, 당 전문부서 부장들, 보위부 부장, 각 도당 위원회의 위원장들, 군 사령관급 장령들까지.
한 명 한 명이 모두 이 공화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인데도 그들은 모두 쥐죽은 듯 침묵을 지키며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도착할 그 사람의 심기가 결코 편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이 방에서 몇 명은 죽어서 나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덜컹---!!!
“장군님 오셨습네다!”
드르륵.....!!!
의자 긁히는 소리가 나며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안으로 들어온 사람, 김정일은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싸하게 쓸어보다가 이내 경고를 날렸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한 놈은 죽어서 나갈 기야. 이 김정일이 얼굴에 똥칠을 하고 아바지 수령님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한 찢어죽일 놈, 그 놈이 누가 될지 한 번 보자우.”
“................!!!!”
김정일의 엄포에 참석자들은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사건의 규모로 보아 김정일이 광분할 것은 모두가 예상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서 즉결처분할까?
하지만 평상시 김정일의 난폭성으로 보아 그건 충분히 현실적인 예측이었다.
“건설상! 사고 원인이 대체 뭐이야? 한 번 ㅤㅇㅡㄼ어나 보라우!”
“그, 그게............”
당 전문부서 건설부의 부장은 체 말을 못 잇고 목소리를 떨기만 했다.
사고가 일어나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고 원인은 이미 좁혀지고 있었다, 단지 정직하게 말할 수 없을 뿐.
‘기술 부족부터 초반 자재 결함, 애초부터 무리한 시공에 공기 단축까지 너무나 많아서 뭐라고 하나로 결론내릴 수 없습니다’라고 어떻게 말한다는 말인가?
안 그래도 심기가 상한 김정일에게 정직하게 고해바쳤다가는 자신이 오늘 여기서 죽어나갈 사람이 될 게 뻔했다.
누군가에게로 책임을 돌려야했다.
“어째 말을 못 해? 콩알탄 맛을 보고 싶어?”
“그, 그거이.... 장군님.... 아무래도 역시.... 자재가 부실해서리.....”
건설상의 말에 김정일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테이블 끄트머리에게로 앉아있는 한 젊은이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 젊은이, 정환은 의외로 침착한 표정이었다.
‘예상했던 대로군. 제일 지위가 낮고 세력도 없으니 나를 부담 없는 희생양으로 쓰시겠다? 조만간에 너는 물갈이다.’
“어이, 김정환이! 방금 말 들었나?”
“예, 들었습니다. 장군님.”
“너는 그래도 내 혈육이니 변명의 기회를 주디.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
“............!!!!!”
테이블에 무시무시한 침묵이 감돌았다.
김정일이 가장 싫어하는 건 변명이다.
게다가 아무리 김정일이 같은 백두혈통을 죽이는 것까지는 피한다고 해도 이런 규모의 사고에 책임을 지는 방법은 죽음 외에는 없었다.
이미 테이블 내의 모든 사람에게 저 아직 낯이 많이 설은 젊은이는 숨쉬고 있는 시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청년의 대답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집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뭐이야?”
“장군님과 수령님께 이런 누를 끼친 사고에 제가 터럭만큼이라도 연관되어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
‘원래 미친 듯이 화를 내던 놈도 이런 태도로 나오는 사람에게는 잠시간 냉정해지기 마련이거든. 특히나 같은 백두혈통끼리 죽이는 건 엄금하는 김일성이 살아있는 상태라면 더더욱.‘
실제로, 완전한 정환의 항복에 김정일의 표정은 살짝 복잡해졌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바로 화를 더 돋구게 하는, 되도 않는 변명이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도 이복동생이 깨끗이 승복의 자세로 나오며 목을 내미니, 당장 죽이기는 좀 뭣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곳이면 모를까, 이곳은 정환이 그의 이복동생이라는 걸 아는 측근들이 전부 집합한 장소 아닌가.
“..........참말이냐?”
“제가 어찌 장군님 앞에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단지, 장군님께 역심을 품은 반도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죽었으면 합니다.”
“.....뭐이야? 반도? 그게 뉘기야?”
순식간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다시 반전되었다.
다른 간부들은 ‘저 미친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는 눈으로 정환을 바라봤다.
혹시 죽음의 공포에 머리가 돌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정환은 의연하게 말을 꺼냈다.
“......제 자재는 일본에서 들여온 최고급품들만 썼습니다. 게다가 항만에서 당국자들의 철저한 검사를 거쳐 평양으로 이송됐다는 걸 장군님도 아실 겁니다.”
“........그건 그렇디. 나도 보고를 받았디.”
“그런데도 자재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면, 자연히 그 자재를 검사하고 이송한 사람을 의심해보는 게 당연하지 않갔습니까?”
“...............!!!!”
“게다가 저는 얼마 전 그 자재를 검사한 당국이 검사를 핑계로 대규모의 병력을 평양에서 원산으로 이동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위총국 군관들과는 달리, 이번 사고에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하면서, 정환의 시선은 테이블의 좀더 상석, 김정일의 지근거리에 있는 한 사람에게로 이동했다.
그의 시선에 이끌리듯 다른 사람들과 김정일의 시선도 그 사람에게로 쏠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로 그 시선을 받은 사람은, 국가보위부 부장 김영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