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32화 (32/350)

7장. 류경 호텔 (4)

7장. 류경 호텔 (4)

이윽고 정환이 자신의 미래구상을 대략적으로 이야기하자 백승철과 그 일파는 일단 자신들의 목숨과 지위가 보전된다는 생각에 안심한 듯 했다.

하지만 그 직후 정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백승철은 포함한 그들은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몇 가지만, 백 소장 동지. 거사에 나의 도움을 얻고 싶으면 몇 가지 조건을 정하고 거기에 따라야 할 거요.”

“......예상했으니 터놓고 말해보시오.”

“우선 첫 번째, 거사가 성공하더라도 그 후 남조선을 무력 침공 한다던가 할 생각이라면 그만두시오. 나는 가담하지 않을 거요.”

“뭐, 뭐요?”

“그,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미리 아니까 알지.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혀를 낼름 내밀었지만 그들, 특히 백승철은 이번에야말로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한구석에 불안과 불만이 남아있었던 그의 눈빛은 마치 귀신이나 도깨비라도 보듯 정환을 바라보며 떨리고 있었다.

이 남조선 침공 계획은, 아니 계획이라기보다는 막연한 구상이나 목표에 가까웠던 생각은 체브리코프와 그가 주도하는 프룬제 일파 가운데서도 극히 소수만 알고 있었는데 이 정환이라는 애송이가 정말로 체브리코프 의장과 흉금을 터놓을 만큼 가깝다는 이야기인가?

그렇게 아직 충격을 수습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는 그를 보며 정환은 이번에는 마치 아이를 타이르듯 조용히 그에게 충고했다.

“나는 솔직히 백 소장 동지가 남조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기특한 발상에서였는지, 아니면 거사 후 정권의 기반을 확실히 다지고 불안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까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둡시다.”

뭐 물어보나 마나 후자겠지만.

내부 정권 교체로 인해 정통성이 부족한 세력이 집권했을 경우, 국내의 불안과 불만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강경한 대외 정책을 구사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난 직후 휘하 영주들의 남아도는 군사력을 소진시키기 위해서였으니.

문제는, 어지간히 비이성적이고 미친 지도자가 아니라면 자칫 국가 자체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이런 막장 외교정책을 펼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정환은 눈을 빛내면서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남조선 침공 계획은 한 마디로 말해 미친 짓이오. 최소한 지금 공화국의 역량으로는 말이지. 인민군 단 1개 중대라도 휴전선을 넘어가는 순간 평양은 초토화되고 이 이천만 인민이 전부 미국이 떨어트린 핵의 불길에 휩싸이게 될 거요.”

“...................하지만....”

“토 달지 말고 계속 들으시오. 백 동지를 포함해 장령들은 인정하기 싫을지는 몰라도 군사력의 근간은 경제력이오. 지금 공화국은 지방에서 배급이 끊기고 공업소들은 생산을 멈추고 인민군 하전사들은 실탄 대신 입으로 총소리를 내면서 사격 연습을 하는 지경이오. 그런데 미국과 동맹인 남조선을 침공하는 전쟁이라... 미친 짓도 그런 미친 짓이 없지.”

“하지만 미국은......”

“.......주둥아리 다물고 계속 듣게.”

“하지만 백 소장 동지.....”

“닥치고 들으라고 하지 않았나!”

미국이라는 말이 나오자 백승철 바로 뒤에 서있던 군관 중 한 명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뭔가를 말하려 했으나 백승철의 거센 제지에 그대로 물러났다.

그걸 보며 정환의 눈에는 한 줄기 빛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다음 조건을 말했다.

“그리고 둘째, 인민들의 민심을 고려해서 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하오. 백 소장 동지는 당과 군만 장악하면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민심은 곧 천심이오. 일반 인민대중이 우리 편에 선다면, 성공확률이 다는 아니더라도 크게 올라가지.”

“민심을 고려한다라, 말은 듣기 좋지만, 과연 어떻게 할 거요?”

“그건 곧 말해주도록 하지. 하지만 확실한 건, 머리만 잘라낸다고 거사가 성공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오.”

실제 역사, 그러니까 정환이 회귀하기 전의 세상에서 프룬제 일파가 일으킨 쿠데타는 그야말로 단순무식하면서도 심플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으니 단순무식한 계산 이전에 무슨 복안이나 비전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계획 자체는 매우 단순했다.

93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후 있을 조선인민군 창립 60주년 행사에서,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를 동원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그대로 날려버린다.

그리고 프룬제 일파의 휘하 5개 사단을 동원해 보위부를 비롯한 다른 당군 기관들을 무력화, 아니면 포섭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남조선을 침공한다.

실로 막가파식 쿠데타가 아닐 수가 없었고,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프룬제 일파의 계획은 사전에 들통나게 되어 실패한다.

정작 가장 중요한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제거할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가 인민무력부의 중간 개입으로 인하여 열병식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러시아 KGB 당국에서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정보를 흘린 결과, 프룬제 일파는 물론이고 단순히 러시아에서 유학했던 유학생들 모두가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흔히 이들의 쿠데타 계획 실패 요인을 놓고 말들이 많지만, 정환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철저히 간부들의, 간부들에 의한, 간부들을 위한 쿠데타지. 대중들이라는 변수를 전혀 시야에 넣지 않았어. 설령 김 씨 부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했을 거야.’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정환은 모든 성공하는 쿠데타 들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인민 대중, 최소한 인민 대중들 중 주류세력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승철은 여전히 그의 이런 생각에 납득할 수 없는 듯 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소!”

“...........어째서지?”

“정환 동지는 외국에 나가있어서 모르겠지만, 지금 이 조선에서 일반 인민들은 지금 아무런 힘이 없소. 정환 동지야 역사책 따위에서 만민의 인심을 얻어 천하를 얻는다 같은 개소리들을 주워들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저기 중국의 마오쩌둥 동지가 말했듯,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오는 거요. 당장 저기 남만 봐도 그렇지 않소?”

“남이라....”

그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정환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다음 순간 백승철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소, 저기 아래 남조선만 봐도, 총 든 군인들이 하룻밤에 들고 일어나 정권을 움켜쥐지 않았소? 일반 남조선 인민들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몰랐지. 그럼에도 몇 년 동안 여전히 군인들이 돌아가며 잘만 해먹고 있지 않소. 남이든 북이든, 이조 때나 지금이나 조선 인민들은 위에서 시키면 따르는 존재요! 당장 이번 올림픽만 해도....”

“장담하는데, 백 소장 동지. 그들은 몇 년 못가서 재판정에 서게 될 거요. 이건 내기를 해도 좋소.”

“............???”

백승철이 말을 멈춘 것은, 정환의 그 한 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는 강렬한 확신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지만, 마치 예언을 하는 듯한 그의 말에는 흑도 백으로 보이게 만드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게 있는 듯 했다.

“좋소이다, 정환 동지 말대로 인민들을 고려한다고 칩시다. 하지만 보위부들은 어쩔 거요? 그들이 감시하고 있는 이상, 인민들은 우리 편을 들어줄래야 들어줄 수가 없소.”

“................”

“그리고 무엇보다 보위부는 김영룡 부장을 비롯해 김정일의 가장 충성스러운 측근들 아니오? 그들을 우선 처리하지 않고서는 인민들이 우리 편을 들어준다고 보기 어렵소.”

“그건 나한테 맡기시오. 다 복안이 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데.....”

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신의 질문을 피하는 정환에게 백승철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다음 순간 정환이 말한 세 번째 조건에 그는 물론이고 뒤의 군관들도 눈을 크게 떴다.

“.....뭐, 뭐요?”

“그건 말도 안 되오!”

“그렇소, 다른 건 다 되도 그건.....”

“알고 있소. 설령 백 소장 동지가 받아들이더라도 다른 프룬제 출신 군관 동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지.”

이미 이런 반발을 예상했다는 듯 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연히 그에게는 이런 반발을 무마할 계획이 있었다.

“정환 동지, 설명하시오. 이제 나는 슬슬 진심으로 정환 동지가 보위부의 첩자가 아닐까 의심스럽군. 진심으로 거사를 할 생각이 있다면 그런 조건은........”

“믿으시오. 그 증거를 보여드리지.”

“그 증거라는 게 대체.....”

“내가 보위부의 첩자가 아니냐고 물었잖소? 그게 아니라는 증거 말이오. 일단 보위부와 김영룡 부장을 김정일이 옆에서 떼어놓는 것부터 합시다. 그 정도면 내가 이 거사에 진심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걸 믿기에 충분하지 않겠소?”

“.......................?”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백승철과 휘하 군관들에게, 정환은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1주일 후, 북한의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이자 대일(對日) 무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원산 항만에 한 척의 큰 배가 막 입항을 하고 있었다.

악화되기만 하고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북조선의 경제상황을 반영하듯 파리만 날리던 원산 항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큰 배였다.

“평양에서 쓸 공사 자재를 실어온 배야요! 최우선 순위 허가를 받았으니 하역 허가를 내려 주시라요!”

"피양(평양)? 평양으로 갈 자재면 남포로 가야지 왜 여기 멀고 먼 원산까지 오는 기야?“

“알 게 뭔가? 어쨌든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디 않간?”

간만에 활기가 도는 원산항의 분위기가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활기 찬 선원들의 목소리가 원산항과 방금 입항한 배 근처에서 시끄럽게 나돌았다.

이윽고 입항한 배가 닺을 내리고 정박하자 배의 규모와 안에 가득 실린 일제 물산에 선원들과 인부들의 활기는 두 배로 커졌다.

그러나, 그런 활기는 곧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하지만 항상 반갑지 못한 불청객에 의하여 구겨졌다.

“보위부 놈들이다.”

“간나 새끼들. 항상 뒷돈이나 처먹고 짐 내리는 건 도와주지도 않는 주제에 노상 뭐 저리 뻣뻣해?”

“쉿! 주둥아리 여물게!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선적 검사를 하려고 오는 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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