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30화 (30/350)

7장. 류경 호텔 (2)

7장. 류경 호텔 (2)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수령님, 이 불초자식 김정환이가 참으로 오랜만에 안부를 올립니다.”

“기래, 기래, 간만에 내 아새끼 면을 보니 참으로 기분이 좋군. 일본에서는 몸 성히 잘 지냈간?”

“수령님의 보살핌으로 인하여 그동안 건강했습니다.”

“하하하!!! 그렇디, 말도 참 이쁘게 하는구나야.”

고향에 돌아온 정환이 김정일과 김일성을 배알할 수 있었던 것은 공화국 땅에 발을 디딘지 약 한 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일본에서의 ‘뒷정리’를 마치고 3년 동안 나름 정이 들었던 총련을 떠나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도착한 정환을 처음으로 맞아준 건, 보위부장 김영룡의 고압적인 으름장이었다.

- 우리 요원들과 잠시 같이 계셔야 하갔습니다, 정환 동지.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이미 훤히 짐작하고 있는 정환은 굳어진 표정의 유혜림을 안심시키고 그대로 그들을 따라가 모처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약 4주 정도가 지난 후에야, 정환은 석방되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어머니 김명애와 재회함과 동시에, ‘장군님이 한 번 뵙자하십니다’라는 보위부원의 전언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 전 고려호텔에서와는 달리, 김일성의 집무공간인 주석궁, 공화국 내에서는 ‘금수산 의사당’이라 불리는 곳에서 이렇게 단촐한 ‘가족모임’을 가지게 된 게 바로 오늘이었다.

"기래, 그동안 타지에서 고생이 많았디 않간? 아우인 정환이 네가 이렇게 한 핏줄 품으로 돌아오니 이 형님도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야.“

‘형이라..... 김일성 앞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나를 의심할 증거가 안 나왔다는 이야기군.’

적 내지는 좋게 봐줘도 경쟁자 정도로 취급했던 몇 년 전과는 전혀 다르게 친근(해보이려는)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김정일의 손길을 느끼며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한 달간, 김일성의 눈을 피해 자신을 억류시켜놓은 건 틀림없이 예상 밖으로 빨리, 그것도 제 발로 귀환한 정환의 뒷조사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에서 트집을 잡을 만한 것이 안 나왔기에 그가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생물학적인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게 분명했다.

‘보위부는 이미 김정일에게 넘어간 게 확실하군. 역시 저놈들부터 없애버려야겠어.’

아무리 사생아라지만 수령의 아들이 몇 년 만에 돌아왔는데, 수령 김일성 본인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그를 한 달 동안이나 구금할 수 있다는 건 이미 국가보위부는 김정일의 사조직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였다.

속으로 품은 생각이 어쨌건, 정환은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이번에는 김정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아우를 걱정해준 형님 덕에 멀리서도 몸 성히 잘 지냈습니다. 공화국 밖에 나가 찬바람을 쐬니 가족 품이 좋은 줄 이제 알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형님께서는 이 아우의 작은 성의를 뿌리치지 말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

자신이 돌아오자마자 보위부를 통해 헌납한 개인 계좌, 지금은 스위스 은행에 고히 잠들어 있는 1억 3천만 달러를 정환이 은근슬쩍 언급하자 김정일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이 정환이 이 놈에게는 참말 아무런 야심이 없는 게 아닐까? 내가 괜한 걱정으로 속을 썩였던 게 아이야?’

의심병 중증 환자인 김정일에게조차 이런 생각이 들게끔 했던 데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그가 오늘 아침에 받았던 보위부의 최종보고서였다.

그 보고서에는 부장 김영룡의 지휘 하에 일본 조총련 인원의 증언들을 중심으로 정환의 일본에서의 행적과 재산을 형성한 과정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 정환 동지는 총련에 계시는 내내 거의 도쿄를 벗어나지 않고 긴자의 고급 바와 요정들을 출입하시며 일본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들의 썩은 실태와 자본주의 진영의 실태를 직접 탐방하고 알아보는 중차대한 혁명과업을 완수하시는 데 전력하셨습니다. 또한 빠칭코와 상급 휴양지, 호텔을 돌아다니며 일본 쪽바리들의 수뇌를 만나 공화국과 장군님의 위업을 설파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조총련 수장이자 외무성 일본과 과장 김용건의 증언이었다.

웬만큼 공화국의 녹을 먹은 관리라면 이 보고가 정환이 외환을 물 쓰듯이 쓰며 펑펑 놀았다는 말을 그대로 보고하기 힘들어서 ‘백두혈통’ 판으로 자체 윤색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증언이었다.

- 정환 동지 말씀입네까? 아, 어딜 가시든 저를 달고 돌아다니셨습니다. 맛 좋은 거란 좋은 건 다 먹어보고 긴자의 일본 가시나들 궁뎅이 두드리는데 열중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습니다. 중간에 저한테도 같이 섞여 놀자고 권유하시기는 하셨습니다만...... 물론 공화국의 영도자이신 김정일 장군님과 그 분의 사업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위하는 보위부원답게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네다!

총련 담당 보위부원 리문철 소좌의 증언이었다.

물론 정환이 자신의 배경을 빌려 협박을 하던가 금전의 힘을 동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거짓증언을 하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좀 더 들어봐야 했다.

정말로 중요한, 정환이 어떻게 1억 3천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산을 형성했는가에 대한 증언은 다음 부분에서 나왔다.

- 정환 상 말씀입니까? 아이고 말도 마십쇼, 빠칭코랑 내기골프를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도쿄 근교의 골프장이란 골프장은 다 돌아다녔을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개발 중인 골프장까지 가보자고 저를 조르시더군요. 하긴 그 덕에 어쩌다 횡재해서 저도 엔화 좀 만졌습니다만...

-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자세히 설명해 보라.

허영준, 일본에서 최근 급격한 성장을 이룬 타카야마 부동산이라는 부동산 회사를 운영 중인 어딘가 수상쩍은 사업가였다.

과거 조총련계 은행과 연관이 있어 정환과 어울려 다녔지만, 지금은 모두 청산하고 완전히 독립적으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는 (대머리) 재일 교포였다.

- 뭐 조선 속담으로 소 뒷걸음치다가 쥐 밟은 격이라고나 할까요. 골프장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회원권을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새 골프장 개발 사업에 투자를 하시게 됐습니다.

제가 옆에서 아무리 요즘 같은 시대라도 이런 일에 함부로 돈 쓰시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렸는데, 자기 돈 쓰겠다는 데 제가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한 게 이게 또 오오아타리(大当たり: 빠칭코 용어, 대박을 뜻함)가 났어요. 돈방석에 앉았다 이 말입니다.

- ...........그러니까, 운수가 좋았다 이 말이군.

- 투자의 ‘투’도 모르는 사람인데 시대가 시대니 운 때만 잘 맞으면 그런 일이 생깁니다. 그 쪽 분들도 아시겠지만 요즘 닛폰이 제정신이 아니다 보니 원, 그 후로 재미가 들렸는지 리조트니 뭐니 여기저기 투자했는데 이게 날이 갈수록 오르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다 팔고 고향으로 간다기에 제가 뜯어말렸는데, 지금 고향에 못 가면 자기가 오래 못 살 거라나? 무슨 일 있었는지 혹시 그 쪽은 아쇼?

비밀리에 일본에서 허영준과 접촉한 보위부원이 녹취한 그의 말은 정환이 어떻게 1억 3천만 불 이라는 자산을 일궜는지 알려주었다.

한 마디로, 운이 좋았다는 것이었다.

- 자리에 앉아주시라요, 현영숙 부장 동지. 반당 행위 수사 같은 게 아니라 말 좀 물으려 모신 거이니 너무 얼지 마시고....

- 얼긴 누가 언다고? 저는 장군님께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니 편히 취조하세요. 정환 동지라고 했죠? 분명히 저와 장 부부장 동지가 일본에 남조선 올림픽 관련 일로 출장을 갔을 때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장 부부장 동지가 이미 보고하신 바대로 중점적인 사업은 저, 무엇보다 장성택 부부장 동지가 거의 다 챙겼어요. 그 정환이라는 동지는 중간에 거간꾼 일을 한 것 밖에는 없군요.

- 흐음.... 기럼 현 부장 동지는 정환 동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시오?

- 글쎄요, 중간 간부급은 모르겠지만 당과 공화국에서 큰 일을 해낼 동지는 분명히 아니군요. 그나마 값을 잘 쳐줄만한 건 본인도 주제파악을 잘 해서 과분한 욕심을 내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에요. 본인의 보좌 군관인 유혜림 상위하고도 뭔가 냄새가 나서  처신을 제대로 하라고 제가 따로 불러 주의를 주기까지 했어요. 아마 장 부부장 동지도 그렇게 생각하실 듯 한데, 역시 주석님의 혈육 중 그분의 영도력을 물려받은 건 김정일 장군님밖에는 없는 게 확실하군요.

증언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정환이 매수할 수 없는 게 확실한 공화국 부장급 간부인 현영숙 선전선동부장까지 모셔와 들어낸 답이었다.

하지만 보위부는 역시나 보위부답게, 보고서는 객관적인 제3자 뿐만 아니라 3년 간 그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모신 사람의 증언 역시 들어보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 하룻밤에 미화로 수백 불이 넘는 도쿄 호텔에 매일 투숙하셨습니다. 그, 그리고 정환 동지는 여색을 매우 좋아하셔서 매일같이 수없이 많은 일본 게이샤들을 수 만 불을 주고 데리고 놀았습니다. 씀씀이도 크셔서 한 번은 캐비어와 보드카를 산지 직송으로 사오라고 로씨야로 보낸 적도 있으십니다. 심지어 저한테도 구두나 옷 같은 사치품을 사서 걸치라며 외환을 준 적도 있습니다.

- 여색을 밝힌다라.... 그리고 상위에게 사치품을 사줬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제법 곱군, 유 상위.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유혜림 상위. 정환 동지가 유 상위에게 본연의 업무 외에 다른 걸 지시한 적이 있간? ......무슨 뜻인지 말 안 해도 알 기야, 기렇지?

- 그, 그건.... 그러니까.... 물론 그런 적은 있지만....

- 듣지 않아도 알갔구만! 혁명열사 집안의 처녀 군관이 행실이 단정할 줄 알아야지. 이래서 계집들을 군에 들이면 안 되는 기야!

마지막 증언자, 정환을 3년 간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유혜림 상위의 증언을 마지막으로 보위부의 보고서는 김정환이라는 인간과 그의 행적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 사치와 골프, 고급품 쇼핑과 녀성 치마 들추기를 좋아하는 한량, 어쩌다 운이 좋아서 외환을 진탕 벌었으며, 젊을 때는 철없이 놀아대다가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굳자 현영숙 부장 동지의 주의를 듣고 전 재산을 바쳐 중앙당에서 한 자리 얻어낼 결심을 한 것으로 보임. 장군님의 영도력에 도전할 가능성 거의 없음.

‘.......................’

여기까지 읽은 김정일은 별첨된 보위부 2국, 해외반탐국의 계좌 추적 결과의 봉인도 풀어 읽어보았다.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에 지도를 눈 크게 뜨고 들여다봐야 보이는 이름 없는 작은 조세도피처의 은행까지 뒤진 끝에 반탐국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 은폐한 계좌 없음. 정환 동지의 총 자산은 1억불을 조금 넘는 1억 3천만 불이 전부로 보임.

“기러면 기렇디. 아무렴 그 애송이 하나가 아무런 뒷받침도 없이 이 김정일이한테 어금니를 들이대갔어?”

장성택의 추측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는 반탐국과 보위성의 조사 결과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바지 김일성 주석까지 불러 지금의 약속을 잡은 게 오늘 아침이었다.

지난 3년 간 김정일 그 자신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고 장성택으로부터 정환이 김일성의 환심을 사서 뭔가를 도모해보려는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 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정환도 한창 때의 젊은이다, 3년 전 총기를 좀 보여줬다 해도 답답한 공화국에서 살다가 번쩍번쩍한 해외에 나가 눈이 휘둥그레져 사치와 여색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기렇다면 수령이자 형님으로서 아량을 보여주는 게 좋갔구만. 어차피 통치자금도 요즘은 호텔 짓는답시고 쏟아붓고 있으니.........’

“하하하하! 이 형님이 그동안 정환 아우에게 너무 무심했구만. 보자, 류경 호텔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내년 아바디 생신에 맞춰 개관하기로 했다는데, 저도 아들 된 도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래, 기래야지. 정환 아우가 충심으로 바친 이 미화 1억 3천만 불 상당은, 어차피 기대로 류경 호텔 공사에 전용될 기야. 기러니 아우가 그 외환을 가지고 자재를 사오는 일을 맡으라!”

“저, 정말이십니까?”

정환은 일부러 정말로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지만, 김정일은 그런 그의 속도 모른 채 엄청난 아량을 베풀 듯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형님이 아부지 생신 선물을 가지고 농을 할 인간으로 보이간? 일본에 있으면서 집 짓고 부수는 일을 했다고 내 듣지 않았나. 기러면 그동안 배운 게 있을 테니 그 외환을 그대로 써서 이 공화국과 아버지 주석님을 위해 더 큰일을 해보라! 내 친히 아우가 공사 자재를 사올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주갔어!”

“감사합니다, 형님, 아니, 장군님!”

자신에게 깊게 머리를 숙이는 정환을 보며 김정일은 우환거리를 하나 제거했다는 안심에 가득 찬 웃음을 흘렸다.

이제 경쟁자는 하나 사라지고, 대신에 자신의 보위에 진력할 피가 이어진 충신이 하나 더 늘은 것이다.

“어떻게 됐습니까?”

“잘 됐지, 내가 말했던 건?”

“백승철 동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타시죠.”

주석궁에서 나온 정환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혜림의 차에 타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이윽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혜림은 일부러 조선중앙방송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정환에게 답했다.

“안절부절 못하시더군요. 백 대좌는.... 아니, 이제는 백 소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럴 만도 하지. 이제 시간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으니 말이야. 믿었던 뒷배도 이제 없어졌고....”

“보위부의 조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정환 동지의.... 재산을 발견했나요?”

유혜림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듯 잠시 주저하며 물어보자 창문 밖의 평양을 내다보던 정환은 벌써부터 통쾌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아니, 전혀 몰라. 내가 내 손으로 갖다 바친 1억 3천만 불이 총액의 1퍼센트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놈들 표정이 보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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