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전환기 (4)
6장. 전환기 (4)
“.......나 개인을 만나러 왔다고?”
유혜림의 차분하지만 당당한 선언에 체브리코프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평상시 같으면 이런 갑작스러우면서도 무례한, 그리고 무엇보다 주제를 모르는 방문객의 제안에 체브리코프는 상대를 쫓아버리거나 심하면 감옥에 가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현직 KGB 의장다운 관찰력으로 유혜림이 신고 있는 여성용 구두에 박힌 로고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북조선은 물론이고 빈곤과 타의적인 절약이 일상생활화 된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브랜드였다.
‘이탈리아 프라다 제 구두라.... 이 여자를 보낸 게 누구인지는 몰라도 북조선 당국은 확실히 아니군.’
항상 소련에서 지원물자를 조금이라도 더 빨아먹지 못해 안달인 그 나라의 인간들이 일개 상위 월급을 그렇게 후하게 줄 리는 없으니까.
실제로 체브리코프가 발견한 그녀의 구두는 정환이 자신의 최측근 수행원이자 보좌관인 유혜림에게 지급한 ‘해외 근무 수당’ 중 하나였다.
이 유혜림이라는 여자가 ‘모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첩보기관보다 부유한 사람인 건 확실했다.
거기까지 판단이 서자, 체브리코프는 그녀가 방금 말한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궁금해졌다.
“의장 동지, 이 동양인 여자가 의장 동지에게만 보여드릴 물건이 있다고 몸수색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판단을 내려주십시오.”
“됐네, 물러가게.”
“의장 동지, 제 생각에는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자네들 생각 같은 건 안 물어봤네, 알고 싶지도 않고. 어서 나가게.”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윽고 그의 사무실에 둘만 남게 되자 체브리코프는 전용 냉장고에서 코카콜라 캔을 하나 꺼내 유혜림에게 내밀었다.
“보드카를 권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고, 홍차나 커피는 격식 차리는 자리에 어울리는 거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동무도 그다지 마르크스나 레닌 동지의 가르침에 충실하지는 않은 듯한데, 박대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KGB도 많이 변했군요, 의장 동지.”
“KGB 뿐만 아니라 이 소련 전체가 변하고 있네. 일본에서 왔다고 했으니 알겠지만, 작은 섬나라 일본 GDP가 이 광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GDP를 압도하고 있지. 인정하기는 싫지만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장대한 대결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네.”
“확실히, 그 분의 예측대로입니다. 체브리코프 의장 동지는 말이 통하는 분이군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모시는 분이 보낸 제의에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
“동지, 지금부터 제가 알려드리는 번호로 국제전화를 걸어보시죠. 틀림없이 귀가 솔깃할 제의일 겁니다.”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체브리코프에게 미소를 지으며 유혜림이 번호 하나가 적힌 종이를 내밀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번호를 눌렀다.
전세계에 정보원을 두고 있는 KGB 의장의 집무실이니만큼 신호는 금방 대륙을 넘어 교환소를 지나 일본 도쿄의 한 호텔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대기음이 몇 번 지나기도 전에 한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Очень приятно(오친 쁘리얏나 :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체브리코프 동지. 저는 김정환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김정환? 김정환이라...”
그 이름을 듣자 체브리코프의 머릿속에 있는 각종 인명과 지명, 작전과 계획이 적힌 두꺼운 책자가 파라락 넘어가면서 곧 한 이름을 찾아냈다.
그런데 분명히 이 이름은 ‘중요도 낮음’ 항목에 기재되어 있던 걸로 아는데....
“정보 보고에서 본 기억이 나는군. 자네는 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의 아들이 아닌가?”
“맞습니다. 이렇게 전화상으로 연락을 드려 실례라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군요.”
이제 슬슬 정환과 그의 대리인 유혜림이 왜 자신에게 접촉해왔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한 체브리코프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는 슬쩍 자신의 앞에 조용히 앉아있는 유혜림을 곁눈질하고는 침착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전후사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우리 측 포섭 공작이 자네에게 들통 난 거 같군. 북조선에서는 몇 명이나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아직은 저 뿐입니다. 물론, 귀국에서 우리 공화국에 심어놓은 백승철 대좌를 포함한 프룬제 일파들 250 여 명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Ебать(망할).
체브리코프는 다 탄로 났음을 깨닫고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래도 그는 노익장을 발휘해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걸 간신히 막아냈다.
저쪽에서 먼저 접촉해오는 이상,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이고, 그럼 아직 협상의 여지는 있다.
“틀림없이 내게 바라는 게 있을 거 같군. 원하는 게 뭔가?”
“로씨야 사람들은 허례를 싫어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거 같군요. 간단합니다. 그쪽에서 백승철과 프룬제 일파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문서자료들, 그들이 그동안 빼돌린 내부정보, 공화국 보위부가 관심 있어 할 만한 모든 증거들을 그 쪽에 있는 유혜림 상위 편에 보내주십시오.”
“...........그걸 가지고 뭐하려는 건가? 백승철 대좌 동지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
뭐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난 좀 더 대국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라서.
모스크바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 도쿄 히가시 구 호텔 방에 앉아있는 정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환이 딱 잘라 거절하자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환 역시도 일부러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기에, 통화선상에는 약 수십여 초 간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 체브리코프의 목소리는, 마치 정환을 시험하듯 무거웠다.
“지금 자네가 요구하는 건 우리 소비에트 연방 국가보안위원회가 몇 년에 걸쳐 북조선에 구축한 고위급 인적 정보망을 목적도 불분명한 자에게 통째로 달라는 걸세. 그럼 그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는 건가?”
“‘우리’가 아닙니다, 의장 동지. 유 상위가 이미 말씀드렸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협상하고자 하는 건 KGB라는 조직이 아니라 빅토르 체브리코프 의장 동지 개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반역을 하라는 거군?”
‘아, 깜박이 좀 켜고 들어오지. 러시아 사람들은 다 이런가?’
체브리코프의 노골적이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에 정환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에 찬 웃음을 흘리며 유혹을 계속했다.
“의장님과 KGB 측에서도 몇 년 전 백승철과 유 상위를 포함한 유학생들에게 지금 제가 하는 행동과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단지 이번에는 입장이 반대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십시오.”
“할 말이 없군. 그럼 서로 목적이 분명해 졌으니, 자네 호주머니를 보여주게. 내 충성심을 사들이기 위해 얼마를 제의할 생각인가?”
“하하, 말이 빨라서 좋군요. 유혜림 상위가 가지고 오신 것을 보면 제가 의장님의 충성심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는지 더 분명해지리라 생각합니다.”
“.............”
그 말에 체브리코프는 수화기를 잠시 내려놓고 유혜림을 보며 물었다.
“자네 주인의 말에 의하면 자네가 내게 줄 것 있다고 하는데.....”
유혜림은 그 말을 듣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체브리코프의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았다.
성인 남성의 주먹만한 크기의 그 작은 상자를 보며 체브리코프는 짐짓 고개를 기울였다.
“그동안 이 직위에서 근무하면서 수많은 뇌물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작은 건 처음이군. 자네 주인은 제법 부유한 사람 같은데....”
“열어보시면 정환 동지가 의장 동지와의 미래 관계를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유혜림의 의미심장한 장담에 체브리코프는 긴가민가하면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상자 안에 든 물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체브리코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다이아몬드입니다. 소비에트 분이니 아시겠지만 원래 뇌물이란 건 믿을 만한 부하한테 운반하도록 시키는 법인데, 금괴나 달러뭉치는 여성인 유 상위 혼자 운반하기는 좀 무겁거든요. 눈에 띄기도 하고 말입니다.”
“오.... 그렇지만 이 크기는.....”
“네, 정확히 1백 캐럿짜리 입니다. 미화 천오백만 달러, 소련 루블화로는 8억 루블이 좀 넘겠군요. 요즘 일본이 하도 호황이다 보니, 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가 의장 동지의 충성심을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는 지 아시겠습니까?”
정환은 회심의 한 수를 성공시키며 그렇게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지금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체브리코프가 볼 수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체브리코프는 한동안 홀린 듯이 성인남성의 엄지손가락만한 다이아몬드가 내뿜는 광채를 들여다보았다.
보석 중의 보석 이라는 금강석,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경제적인 가치는 이 무뚝뚝하고 삭막한 러시아인의 표본 같은 KGB 의장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강력했다.
한동안 다이아몬드를 손 안에서 굴려보던 체브리코프는 침음하다가 수화기에 대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 안 해 보았나? 이곳은 내 본부 한복판일세. 이 다이아몬드를 빼앗고 자네 부하만 조용히 처리하면, 자네는 헛돈을 쓰는 거야. 내 말이 맞지 않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의장 동지가 그 정도로 근시안적인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와 손잡으면 앞으로 더더욱 많은, 눈앞의 다이아몬드와는 비교가 안 되는 대가를 얻을 수 있는데, 왜 그런 기회를 날려버리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무슨 이야기인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주위를 좀 둘러보십시오, 의장 동지. 소련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동구권은 알아서 살길을 찾기 시작하고 있고, 이제 아무도 사회주의 이념이나 마르크스적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돈이 전부죠. 의장 동지쯤 되시는 분이라면 이런 전환기에 처신을 잘해야 앞으로 말년이 편할 거라는 것쯤은 아실 겁니다.”
“...............!!!!”
“다이아몬드에 얹어서 예언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이전부터 소련의 관료들이 레닌 동지가 물려준 횃불을 섬기는 데만 몰두하는 청렴결백한 사람들이라는 건 헛소리라고 의장 동지도 잘 아실 겁니다. 장담하는데 설령 소련이라는 국가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자들은 모습만 바꿀 뿐 시체에서 썩은 살을 뜯어먹는 독수리처럼 자기들 몫을 챙겨 호화롭게 살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의장 동지가 나름 챙기신다고 해도 비난할 사람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먼 미래의, 하지만 정환으로서는 이미 익히 아는 사실을 이야기하자 체브리코프는 내심을 찔린 듯 작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 소비에트 연방 내부에서 비밀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 젊은이는 어떻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저 멀리 일본에 앉아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몰라도, 체브리코프는 이 정체모를 젊은이의 말에 설득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차피 백승철과 프룬제 일파는 KGB 차원에서도 이미 반쯤 버리는 패 아니었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리고 나도 서류에 얹어서 덤으로 몇 가지 더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동지.”
“.........그 정보들을 가지고 뭘 할 생각인지는 아직도 말할 생각이 없나?”
“죄송합니다. 극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정환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수화기를 타고 전해져 오는 체브리코프의 다음 말에 손에 힘을 꽉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그만 물어보도록 하지. 어차피 대충 짐작은 가니까 말이야. 다음 수령 자리에 누가 앉더라도 설마 김정일보다야 못하겠나? 할 거라면 제대로 하라는 충고만 해두겠네. 실패하면 편하게는 못 죽을 테니까.”
‘윽! 역시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전화를 시작한 지 처음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정환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했다.
“.......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의장 동지.”
“의장 동지라, 늙은이의 넋두리처럼 들리는 건 알지만, 이제 공동생산 공동소유라는 마르크스주의는 동전 한 푼만 못하게 됐군. 곧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가격을 붙여 파는 자본주의가 지구전체를 장악할 걸세. 아마 우리도 다음에 볼 때는 서로의 직위 뒤에 동지를 붙여 호칭하지 않을 듯 하군. 그럼 행운을 빌겠네. 정환 수령 후보자 동지.”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정환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그 악명 높은 KGB의 수장을 매수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 거대한 체제가 자신의 눈앞에서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한 감상을 느꼈다.
나중에 자신이 다스리게 될 새로운 북조선의 체제는, 아마 공산주의는 분명히 아닐 것이다.
정환은 고개를 저어 이런 감상을 떨쳐내고, 드디어 몇 년 동안 준비해왔던 디데이(D Day)가 눈앞에 왔음을 실감했다.
‘이제 시작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일대 전환기를 맞을 때가 왔군, 새로운 수령의 밑에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