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전환기 (1)
6장. 전환기 (1)
다음 날, 목적을 완수한 특사단은 평양으로 돌아갔다.
일본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정환은 공항까지 나가서 평양으로 향하는 장성택과 현영숙을 환송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공항에서 잠시 시선을 피해 현영숙이 귀띔해준 사실은 특사단이 도착하기 전 김용건이 품어왔던 의문, ‘어째서 이번 사업에 외무성이 완전히 배제되었는가’에 대한 답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문제는 그런다고 그의 기분이 나아진 건 결코 아니었지만.
“잘 들으세요, 정환 동지. 이번 일본과의 접촉에서 외무성과 통상적인 외교라인들이 완전히 배제된 일에는 내막이 있어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남조선의 올림픽 유치를 막지 못한 외무성에 대한 보복성 조치라고 저 나름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런 성격도 있지만, 실은 조금 더 복잡해요.”
연구원 북한 팀에서 근무하며 얻은 지식으로 나름 북한의 내부 사정에 정통하다고 자신하고 있던 정환은 현영숙의 입에서 나오는 예상 외의 발언에 잠시 얼떨떨해했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번 특사단 파견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과 국가보위성, 그리고 당 내 대외정보조사부에서 김정일 장군께 직접 건의를 드린 거에요. 남의 올림픽 유치를 막는데 실패한 무능한 외무성과 그 산하 총련에게 협상에 관련된 어떤 정보도 주지 말아야한다고 역설한 것도 그들을 중심으로 한 군과 당의 강경파들이고요.”
“...................!!!!”
“알겠지만 81년 유치 직후 우리 선전부를 포함해 공화국의 모든 지도기관들은 전력을 다해 남의 올림픽을 막거나 최소한 그 의미를 축소시키기 위해 6년 동안 전력을 다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개최가 내년으로 다가온 지금, 당 내부를 포함해 관련자들은 이제 개최는 막을 수 없으니 받아들이고 학생축전에나 신경 쓰자라는 분위기였는데...”
“군과 당 일부에서는 포기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네, 그들은 마지막까지 올림픽을 저지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어떤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파급력과 영향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심지어 무력사용까지 주장하는 걸 외무성에서 간신히 뜯어말렸는데......... 그게 원인이겠죠, 아마.”
“................”
거기까지 들은 정환의 머리에는 한 줄기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올해 11월에 일어날 예정인 항공기 테러, 북한 공작원 김현희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이 바로 그 섬광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내막이 있었군.’
“무력사용이라... 외무성에서 반대할 만 하군요. 장성택 부부장 동지도 외무성을 이번 사업에서 배제시키는 데 동참했습니까?”
“동참이라기보다는, 방조했지요. 그 이유는....
“.........회담이 잘못될 경우 특사로 보내질 본인이 아니라 외무성과 총련에 책임을 돌리기 위해서겠죠. 제 말이 맞습니까, 현 부장 동지?”
이번에는 그의 짐작이 맞은 듯 현영숙은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정환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군요.”
“요즘처럼 하 수상한 시국에는 공화국 중심부가 돌아가는 소식에 더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특히나 일본 같은 외지에서는.”
정환은 그렇게 말하며 여유 있게 웃었지만 현영숙에게는 이런 그의 여유가 전해지지 못한 듯 그녀는 살짝 한숨까지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비록 보위성을 포함해 군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거세기는 했지만, 장 부부장 동지 정도의 입지가 있는 간부라면 충분히 그런 건의를 중간에 차단할 수 있었을 거에요. 일부러 그러지 않은 거죠.”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뻔하지 않나요? 동지. 지금 공화국은 전환기에 있어요. 권력의 전환기. 김일성 주석님에게서 김정일 장군님으로 공화국의 실권이 이양되는 시점이죠.”
현영숙은 그렇게 말하며 공항 창문 밖으로 보이는 너른 하늘을 내다보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저 하늘 너머로 보이는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벌어질 일들이 이미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는 듯 했다.
“당이든 군이든 어디든, 이제 김정일 장군님이 공화국의 다음 태양이라는 걸 공화국의 모든 일꾼들은 알고 있어요.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이지... 비록 아직은 주석님이 수령이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김정일 장군님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겠죠, 아마도 길어봐야 3년.... 만약 정환 동지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하겠어요? 새로운 태양 주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를 다져놔야 하는 거에요.”
그녀의 말은 상당히 비유적이었지만, 정환은 바로 알아들었다.
미래에서 회귀한 자가 아니라도 이 정도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려운 게 아니니까.
아니, 사실 이런 현상은 그가 있었던 남에서도 상당히 흔한 일 아니었던가.
“충성심 뽐내기 경쟁이라... 그거군요.”
“바로 그래요. 게다가 전환기를 맞은 건 공화국 뿐 만이 아니죠. 저도 선전선동부에 몸을 담은 입장이라 공화국 밖의 소식을 상당히 전해 듣는데... 지금 세계만방의 사회주의 체제는 기둥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어요. 일반 인민들이야 몰라도 장군님과 공화국 간부들은 이를 모를 리 없으니, 더욱 체제의 죔쇠를 단단히 잠그려는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쳐다보는 현영숙의 얼굴에서는 이제 그늘까지 보이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믿고 봉사하던 체제가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울함과 분노, 짜증과 답답함이 복잡하게 섞여 뭐라 말로 표한하기 힘든 심정인 듯 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외무성이 앞장서서 무력 사용에 반대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겠죠. 안 그래도 지난 83년 버마 아웅산 사건 때에도 그걸 수습하느라 외무성에서는 죽을 고생을 했다고 들었어요. 저희 선동부에서도 해외에 나갔다 온 주민들 사이에 조금씩이나마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고 계속해서 보고가 들어오는 판에 이 얼간이들은 자기 자리 지키겠답시고.......”
답답함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이를 악 무는 현영숙을 보면서 정환은 조용히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걸 저에게 설명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부장 동지.”
“.................”
지난 밤 파티에서의 기대하지 않은 도움도 그렇고, 도무지 진의를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정환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정작 그녀 본인도 지금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모르는 듯 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고, 결국 현영숙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요, 그냥 융숭한 대접에 대한 작은 보은이라고 생각하세요. 정환 동지.”
“........................”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한 번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의 눈빛만이 오가는 상황에서, 먼저 등을 돌린 건 현영숙이었다.
“.........더 지체하다가는 비행기 시간에 늦겠군요. 그럼 곧 머지않은 시일 내에 공화국에서 뵙도록 해요, 김정환 동지.”
“평양까지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현영숙 부장 동지.”
“.......정환 동지, 괜찮으십니까?”
“........그래, 난 괜찮아, 유 상위.”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이번 일도 잘 풀렸고 곧 공화국으로 돌아가 김명애 동지도 다시 뵈실 텐데 혹시 심려하시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들은 공항에서 총련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있었다.
차에 탄 후로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말이 없던 정환이 걱정되었는지 운전을 맡은 유혜림이 물었지만 정환은 괜찮다는 대답을 해주고서도 여전히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상관, 아니, 이제는 그녀에게 단순한 상관 이상의 존재가 되어버린 정환의 저기압에 유혜림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뭐라 더 질문을 하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 순간 들려온 정환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운전대를 놓칠 뻔했다.
“유 상위, 백승철 대좌하고는 요즘도 연락하고 있나?”
“네? 아, 네! 그게.....”
정환의 의도를 짐작하기 힘든 질문에 유혜림은 대경실색하다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고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게... 여전히 연락은 하지만 그다지 친근하게 지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지에 나와 있기도 하고... 또....”
유혜림은 잠시 말을 흐렸지만 정환은 듣지 않고도 그녀가 뭐라 말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별로 내부 사정을 알려주기 싫어하나 보군. 하기야 당연한 조심성이지.”
“그렇습네다... 백 대좌는.... 그러니까 프룬제 출신 동창들은 아무래도 이제 제가 완전히 변절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환 동지 편에 붙어서....”
“흐음....”
정환은 다시 한 번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며 복잡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을 룸미러로 지켜보면서 유혜림 역시도 의미 모를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환의 입이 다시 열렸다.
“백승철 대좌 동지를 다시 만나봐야겠군. 조만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