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애하는 수령동지-22화 (22/350)

5장. 선전 (6)

5장. 선전 (6)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장성택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잠시 동안 혹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고민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용건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심려 마십시오, 장 부부장 동지. 일본 관료들은 자본주의 날라리 풍에 젖은 타락한 인간들 답게, 체제와 자국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돈과 욕심으로 움직이는 종자들입니다. 수령님의 혁명 정신 달성을 위하여 일심분란한 저희 공화국의 일꾼들과는 다른 자들이지요.”

“저, 정말 건설장관을 바로 오늘 밤에 호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동지! 평소 저희 총련에서는 공화국의 과업 수행을 위하여 상당한 금전을 들여 일제 관료 놈들의 배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오라고 하면 나와야지, 제 놈들이 별 수 있겠습니까?”

‘휴우, 그나마 우리와 관계가 깊은 나카오 건설상이라 다행이군. 역시 정환 동지의 예측이 맞았다.’

김용건은 겉으로는 모범적인 노동당 간부답게 전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그는 장성택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지도 모르니 당황하지 않게 대비하고 있으라는 정환의 예측이 맞은 것에 놀라워했다.

- 분명히 류경 호텔 이야기를 해올 테지. 지금 김정일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업 중 하나지만 잘 안 풀리고 있으니까 말이야. 김일성 주석님의 생일에 맞춰 개장하려고 했던 일정이 늦어지고 있으니 김정일로서는 부하들을 닦달할 수밖에 없겠지.

“과장 동지와 총련의 현지 공작과 포섭 능력은 당의 귀감이 될 만 하군요. 정말로 일본 건설상을 오늘 밤에 바로 만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현 부장 동지.”

아직도 잘 안 믿겨진다는 듯 되묻는 현영숙에게 김용건은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치밀한 성격답게 속으로 계산기를 여러 번 두드려보고 확실히 가능하다는 판단이 선  후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 나카오 건설상은 이미 우리와 한 배를 탄 사이나 다를 바 없고, 나머지도 그동안 받아먹은 게 있어서라도 우리 입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줄 거야. 그래도 설마 이 정도로 일본 국민들이 부패 감시에 관심 없을 줄은 몰랐군. 하기야 지금 같은 호황에는 대중들도 고위층의 비리에 관대해지는 법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총련은 부부장 동지와 부장 동지가 과업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김용건은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장성택과 미묘한 표정의 현영숙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김용건의 장담은 사실이었다.

그날 저녁, 장성택 특사단이 투숙하고 있는 호텔에서 열린 비밀 회담에는 외무성 장관을 비롯해 나카오 건설상, 심지어는 총리 직속 내각정보조사실의 고위관료들이 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약 2시간에 걸친 회담 동안, 공화국의 특사단은 그들이 기대하고 예상하던 것보다, (특히 장성택의 기대치보다) 훨씬 매끄럽게 일을 진행시켜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어냈다.

단순히 처음 기대했던 외무성 장관 명의의 평양 세계 학생축전에 대한 축전을 받아내는 것을 넘어, 일본 민간 선수들을 축전에 초청하고 그것을 위한 비행기를 일본에 보내도 좋다는 합의까지 얻어내자 드디어 장성택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이거라면 충분히 남조선의 올림픽에 대한 장군님과 수령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데 써먹을 수 있다. 휴우, 삼수갑산 갔다가 올 뻔 했군.’

하지만 그렇다고 협상 중 마찰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그 마찰의 진원지는 공화국 대표 장성택이 아니라 동행한 현영숙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인한 것이었다.

“잠깐, 부부장 동지,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좀 더 저쪽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뭐요, 현 부장, 왜 다된 밥상에 죽탕을 놓으려는(망치려는) 거요?”

장성택이 인상을 쓰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완곡하게 제지했으나 현영숙은 만족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부부장 동지는 장군님의 지시사항을 전부 만족시켰을지 몰라도, 저희 선전선동부로서는 지금 그다지 얻어간 게 없어요, 대외선전을 위해서라도 축전에 들어갈 한 문장 정도는 우리 요구에 맞춰 바꿔야만 해요.”

“현 부장, 지금까지 받아낸 것만 해도 기대 이상이요, 만약 여기서 잘못해서 저쪽을 자극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이 계집년은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야? 그렇게 공에 집착한다고 김정일 그 마귀 새끼가 너를 예뻐해 주기라도 할 거 같으냐?’

그러나 이런 장성택의 마음과는 달리 현영숙은 이미 통역을 맡은 김용건에게 자신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김 과장, 지금부터 내 요구 사항을 저쪽에 통역하세요. 제가 원하는 건 일본 외무상이 우리 세계학생축전에 보낼 축전에 의례적인 축사 외에 한 문장을 더 하는 겁니다. ‘올림픽을 서울과 공동개최하지 못한 것에 깊은 유감을 바이다.’ 정도가 좋겠군요.”

“현 부장 동지, 그건..........”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일본 관료들의 술렁거림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며 김용건이 말끝을 흐렸다.

이런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그도 정환에게 사전 지시를 받은 바가 없었는데, 장성택의 얼굴도 구겨지는 것을 보아 현영숙의 단독행동인 듯 했다.

‘어떻게 한다? 자칫 남북 사이에서 일본이 공화국을 편들어주는 걸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을 추가하는 것은 일본 외무성에서도 정치적인 부담을 추가적으로 져야한다. 이걸 저쪽에 잘못 설명한다면 협상 자체가 파토날 수도 있는데......’

그 때, 공화국과 일본 사이에서 난감한 지경에 처한 김용건을 구해준 것은 뜻밖에도 나카오 건설상이었다.

“허허, 김 부장, 아무래도 저쪽에서 의견 차이가 생긴 거 같군?”

“장관님.... 그게.........”

“걱정하지 말고 말해 보지, 그 쪽은 김 부장이 설득하고 우리 쪽은 내가 설득하면 되지 않겠나?”

여기까지 말한 후 그는 서로 다 아는 사이 아니냐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이런 수고에 대해서 나중에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따로 보상이 있어야하겠지만 말일세. 내 생각에 그 젊은 친구도 동의할 거 같은데..... 안 그런가?”

‘저 능구렁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설득할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일단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군.’

친절하지만 입가에는 노회한 미소를 띄우는 나카오를 보며 김용건은 현영숙의 요구조건을 전달했다.

조건을 들은 나카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뭔가를 가늠해보는 듯 했지만, 이내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할 거 같군. 저 현 부장이라는 미녀 분에게도 그렇게 전하게.”

“.....정말이십니까, 건설상?”

“걱정 말게, 공식적인 정부 직제 상으로 외무상은 나보다 윗줄이지만, 자민당 내 우리 계파 내에서는 내 후배니까 말이야.”

그의 장담이 사실이라는 건 곧 드러났다.

30분도 되지 않아서 축전에 들어갈 문구는 현영숙의 요청대로 고쳐졌고, 거기에 얹어서 류경 호텔 건설에 필요한 자재의 수출 허가까지 받아내고 난 후 그제서야 김용건은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장성택도 마찬가지였다.

“하하하, 이걸로 우리 공화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의 은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더욱 돈독해질 수 있을 겁니다, 도모,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나카오 상.”

자신이 느끼는 기쁨을 표현하고 싶었음인지 장성택이 나카오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더듬거리는 일본어로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나카오 역시 미소를 지으며 그 악수를 받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저희 일본국도 귀 공화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저도 장성택 부부장처럼 실리를 따질 줄 아는 사람과 가능한 오래 보고 싶습니다. 키타조센 분들은 담당자가 자주 바뀌니 곤란해서 말입니다.”

그 때 통역을 통해서나마 나카오의 말에 담긴 뭔가 미묘한 뉘앙스를 눈치 챈 현영숙의 눈빛이 번쩍 빛났지만, 장성택은 자신의 목을 구했다는 기쁨에 겨워 그걸 알아채지 못한 듯 했다.

“하하, 실무 담당자가 잠깐 바뀌어도 신의성실을 중히 여기는 우리 공화국의 사상 이념은 변하지 않으니 앞으로 양국 간에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신의 성실이라... 이전이라면 동의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저도 기타조센에서 온 어떤 젊은 친구를 만나고 근 몇 년 간 귀국에 대한 인상이 상당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라의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렸다고 하는데, 그 친구 같은 젊은이들이 본국에도 많다면 앞으로 귀국이 어떻게 변할지 참으로 기대되는 군요.”

“.................???”

알쏭달쏭한 나카오의 말에 장성택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그의 뒤에 서있던 김용건이 얼굴을 살짝 굳히자 나카오는 금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깨달았다.

아직 정환이라는 젊은 친구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거 영문 모를 소리를 해서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남은 체류기간 동안 일본에서 멋진 경험을 하시다 돌아가시길 빕니다. 요즘 도쿄는 자고 일어나면 모습을 바꾸고 있는 중이라 말입니다.”

“나카오 상, 아까 그 젊은이는......?”

“허허, 아직 김 과장에게 소개를 못 받으신 거 같은데, 그 친구가 이번 회담을 위해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신을 낮출 줄 알면서도 자국에 대한 애국심이 아주 투철한 친구더군요. 일본의 요즘 젊은 녀석들도 좀 보고 배웠으면 합니다만, 그랬다가는 제 자리가 위험해질 테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그럼 부부장님, 부장님, 공화국까지 안전한 비행 되시길 빌겠습니다.”

나카오는 그 말만을 남기고 외무성 장관 일행을 뒤따라 호텔을 나섰다.

남겨진 장성택과 현영숙, 김용건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한 채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현영숙의 안경 안 쪽 에서는 명백한 의혹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아, 아까는 대처 잘했어, 과장 동지. 역시 그동안 타지에서 쌓은 실력이 어디 가지는 않는군.”

“과찬이십니다, 정환 동지,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걸 안배하신 건 정환 동지 덕분 아닙니까, 그보다 알려드려야 할 소식이 세 가지 있습니다.”

“뭐지, 과장 동지?”

회담이 끝나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김용건의 얼굴에 떠오른 난감한 표정에 정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 모든 게 거의 잘 끝났는데 왜 저런 표정이지?

“우선 첫 번째로 알려드릴 소식은 장성택 부부장 동지가 오늘 저녁에 이번 사업이 잘 끝난 것에 대해서 다 같이 모여서 축배를 들자고 하십니다. 저와 유 상위를 포함해 이번 사업을 보좌한 모든 총련 식구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거 잘 됐군, 두 번째는?”

고작 파티를 열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려고 김용건이 저렇게 무게를 잡을 리는 없었다.

아마 정환이 예상하고 이제까지 준비해왔던 진짜 ‘과업’에 대한 성패를 알려주기 위해 저렇게 표정을 굳히고 있는 것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김용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정환의 가슴은 일을 잘 성취했다는 만족감으로 차올랐다.

“두 번째는, 장 부부장 동지가 저를 따로 불러내서 정환 동지를 저녁 축하 자리에서 꼭 좀 보자고 하셨습니다. 이번 사업의 1등 공신이 계속 음지에만 숨어있는 건 온당한 대우가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정환 동지를 치하하기 위해 부르는 것 같습니다.”

‘성공이군.’

드디어 자신이 그동안 준비해왔던 그림이 그려졌다는 생각에 정환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저 쪽에서 나를 부르게 만드는 것, 그것도 경계심을 풀게 한 상태로.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적절한 순간에 적절하게 나타나서 평양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김정일 장군님께 청을 올려 주십사 말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그걸 위한 밑 작업 역시 다 끝나가던 차였다.

그런데, 정작 준비해왔던 일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방금 전하고도, 김용건의 표정은 여전히 심란했다.

그걸 본 정환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왜 그래, 김 과장 동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혹시 세 번째 소식이 그렇게 나쁜 건가?”

“그게.... 세 번째로 전해드릴 말씀은 장 부부장 동지가 아니라, 현영숙 부장 동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분도 정환 동지를 몹시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 바랬던 게 그거니까. 이따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니요...... 죄송합니다, 정환 동지, 그게 아닙니다.”

“.........???”

고개를 갸우뚱하는 정환에게 김용건은 그들이 앉아있는 객실 문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 부장 동지는 저녁식사 때 장 부부장 동지와 함께가 아니라 지금 당장, 혼자서 정환 동지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장 부부장 동지께 보고하고 돌아가는 저를 뒤쫓아 오셔서....... 그러니까 지금 문 밖에 와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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