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선전 (1)
5장. 선전 (1)
“자, 다음은 워홀, 앤디 워홀입니다. 오천만 엔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오천만 엔, 오천만 엔 없으십니까? 아, 저기 한 분 나왔군요! 7번 손님, 7번 손님에게 오천만.... 아, 저기 육천만 나왔습니다. 19번 손님이 육천만, 더 없으십니까? 네, 말씀드린 순간 54번 손님, 육천 오백만 올라왔습니다. 육천 오백만 엔 입니다! 앤디 워홀의 최신 작품에 육천오백만 엔!”
“정환 상, 그..... 저걸 사시려고요?”
“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뭐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던진 정환의 대답에 허영준은 난감하다는 듯이 (대)머리를 긁적였다.
이윽고 그는 다시 한 번 사회자가 소리 높여 소개하는 작품에 시선을 주더니 이내 귓속말로 다시 정환에게 속삭였다.
“뭐 애초에 도련님... 아니, 정환 상 돈이기도 하고, 이제까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으시다는 건 저도 알지만.... 그러니까....”
“그냥 시원하게 말하시죠. 저도 들어주기 답답합니다.”
“제 말은... 저거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그... 제가 미술 같은 건 전혀 모르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쓰레기 아닙니까? 저게 현대미술이라고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팝아트입니다.”
“아무튼... 제가 좀 학력이 떨어지기는 해도 저 기괴한 그림이 대체 왜 이런 가격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저게 정말로 이 가격을 주고 살 가치가 있을까요?”
자신의 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환이 계속해서 가격을 올려 입찰하자 허영준은 왠지 불안하다는 듯이 계속 그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환은 다시 한 번 손 팻말을 들어올렸다.
“1억! 1억 나왔습니다! 처음 입찰하셨던 7번 손님, 1억 엔으로 입찰하셨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셋, 둘, 하나....... 네! 7번 손님에게 1억으로 낙찰되셨습니다! 앤디 워홀의 최신작이 1억 엔에 저기 청년 분에게 팔렸습니다! 앤디 워홀의 최신작, 블라디미르 레닌의 초상화가 1억 엔에 낙찰되었습니다!”
곧 직원들이 나와 연단에 전시된 초상화를 조심스럽게 들고 나가더니 이내 (역시나 불면 날아갈세라 철저히 포장된) 다음 상품을 들고 와 다시 연단에 전시했다.
“가시죠. 오늘은 볼만큼 봤습니다.”
“알겠습니다. 차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정환의 말에 허영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려 3kg짜리 작은 아령 같은 휴대 전화기를 꺼내 통화를 연결해서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얼마 전부터 NTT가 일본 시장에 보급하기 시작한 무선 휴대 전화기였는데, 대기시간은 8시간에 통화 시간 40분밖에 안 되는 물건이었지만 허영준은 상당한 돈을 들여 자기 직원들 전원에게 이 전화기를 하나씩 들려주었다.
‘투자회사는 빠른 정보교환과 공유가 생명’이라는 정환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지금 도련님 나가신다. 상품 잘 포장해서 언제나 놔두던 곳에 잘 보관해놔. 손상 안 가게 신경 쓰는 거 잊지 말고. .......뭐? 자리가 없어? 자식아, 대충 끼워서라도 챙겨놓으란 말이야. 요즘 날씨도 춥고 아무튼 상품 가치 떨어지지 않게 해. 나중에 내가 검사했을 때 변색이라도 생기면 너희들 다 경칠 줄 알아, 엉?”
신신당부하며 통화를 끝낸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정환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정환 상. 보관고 자리가 다 찼답니다. 더 걸어놓을 자리가 없을 지경이라는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또 하나 지어야겠군요. 지난번처럼 보안 철저히 하고 무엇보다 습기, 온도, 채광 관리 잘해서 우리 자산들에 손상 가지 않게 최신식 설비로 맞춰놓으세요.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내 출구로 나간 그들은 2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건물을 빠져나왔다.
곧 차가 속력을 올리고 건물이 뒤로 멀어지자 허영준이 덩치에 안 어울리게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정환 상, 의외입니다.”
“뭐가 말입니까?”
“이렇게 미술품을 좋아하시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북조선 사람들은 많이 만나 봤지만 다들 무뚝뚝하기 그지없어서 예술이나 감수성 같은 거 하고는 거리가 영 먼 인간들이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세상에는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미술품 같은 건 전혀 모릅니다. 사실 관심도 없고요.”
“네? 그럼 왜........”
“당연히 투자를 위해서죠. 이제 조금만 더 사면 제가 설정해놓은 적정 수량이 확보 됩니다. 값이 곧 오를만한 놈들로 골라 사놨으니, 차익이 아주 쏠쏠할 겁니다. 항상 시세 파악해놓는 걸 잊지 마세요. 매도 타이밍을 놓치면 제 값을 받을 때까지 화장실에라도 걸어놓는 수밖에 없으니까.”
정환은 그렇게 냉소적으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러니 개인이고 기업이고 할 거 없이 돈 있는 놈들이 전부 경매장에 몰려들지. 예술은 쥐뿔도 몰라도 가장 효과적인 자산 관리 수단 중 하나잖아?’
방금 정환과 허영준이 나온 건물, 긴자 구석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그 장소는 바로 미술품 경매장이었다.
그것도 그냥 경매장이 아니라 유럽의 유수 경매회사가 급하게 지점까지 만들어놓은 VVIP 전용 경매장.
요즘 들어 정환의 일과는 이런 경매장으로 출근해서 고흐, 르누아르, 피카소 같은 고전 화가부터 잭슨 폴록이나 방금 구매한 앤디 워홀 같은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국립 박물관에서도 보기 힘든 화가들의 작품의 경매에 하루 반나절 정도를 쓰는 것이었다.
비록 하나 같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높은 가격에서 경매가 시작해서, 경매가 끝날 즈음에는 턱이 빠질 정도로 높은 가격에 팔리는 것이 바로 저런 VVIP 전용 비밀 경매였지만, 정환과 그가 대리인으로 내세운 타카야마 부동산에게는 충분한 자금 여유가 있었다.
사실 정환 뿐만 아니라 비밀 경매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 유수 은행이나 증권회사의 지점장들, 매니저, 지가 상승으로 떼돈을 번 부동산 회사의 사장들이었던 것이다.
돈이 많다 못해 흘러 넘쳐 투자할 곳을 찾던 자금이 미술품에까지 몰리던 1987년 일본 거품경제의 현주소였다.
“그런데 특별히 앤디 워홀을 구매하신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투자목적이시라면 아까 나왔던 르누아르나 렘브란트도 좋을 텐데요.....”
“영준 씨. 올해가 1987년....... 얼마 전에 2월이 됐죠?”
“..........? 그렇습니다만.......”
“곧 앤디 워홀 작품 가격이 급등하겠군요.”
“.............???”
“하하. 좀 있으면 알게 되실 겁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허영준을 보며 정환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냐고? 그야 곧 앤디 워홀이 죽거든.
원래 미술품 중에 가장 비싼 미술품은 창조자가 죽어버린 미술품이니까.
“타카야마 부동산이 보유한 주식 현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순조롭습니다. 닌텐도, IBM, 도쿄전력, 히타치, 제너럴 일렉트릭, 도쿄 은행, 다이이치교칸 은행 등....”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곧 이 버블은 꺼질 겁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은행을 시작으로 금융업에는 대대적인 칼바람이 몰아닥치게 될 거고요. 자기 분야에서 특허를 많이 확보한 제조업종들의 지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허영준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자동차 바닥에 찧을 기세로 깊게 숙이며 정환의 말에 복종했다.
그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이 신비한 젊은이, 은둔의 나라 북조선에서 온 청년이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일들을 손바닥 보듯 예측할 수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얼마 전부터 그는 그런 것들을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답이 안 나올 문제를 계속 고민해봐야 (안 그래도 없는) 머리만 빠지고 시간만 간다.
그냥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허영준 자신은 이 젊은 지도자의 영도력만 믿고 충실히 따라가면서 그가 던져주는 떡고물이나 잘 받아먹으면 부귀영화가 보장된다...... 최소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총련에 가까워졌군요. 김 과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곳 지가도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얼마 전 이곳 고쿄(皇居 : 황거) 일대의 땅을 팔면 캘리포니아 전체를 살 수 있다는 기사 보셨습니까? 나 참, 솔직히 저도 잘 안 믿겨집니다.”
“앞으로 2년은 더 오를 겁니다. 도쿄의 다른 곳은 좀 어떻습니까?”
“아이고, 거기도 미쳐 날뛰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처음 정환 상을 만난 미나토 구 아시죠? 지금 그곳 땅값이 어느 정도인 줄 아십니까?”
“마지막에 확인해 봤을 때는 평당 2천만 엔이었는데... 더 올랐나 보군요.”
“놀라지 마십쇼. 지금은 무려 평당 3천만 엔인 곳도 있을 정도입니다. 미나토 구 에서도 아자부나 아오야마는 벌써부터 4천만을 바라보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긴자는.......”
허영준은 말을 하는 당사자인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토해내듯 말했다.
“믿기 힘들지만 긴자는 무려 평당 1억 엔까지 오를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세상 모든 돈이 일본 도쿄로 몰리는 거 같다니까요. 저희 업계에서는 지금 ‘도쿄를 팔아서 그 돈으로 미국을 사버리자’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단 말입니다.
‘예정대로군.’
정환은 쏟아져 들어오는 엄청난 돈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허영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거품이 정점에 달했을 때 자산을 매각하면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흥분을 주체 못하는 허영준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제 부동산에서는 슬슬 손을 떼도 될 거 같군요. 값이 너무 오르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 포트폴리오는 오늘처럼 부동산이 아니라 미술품, 주식 등으로 다양화 할 겁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기술주. 도레이(東レ)처럼 소재, 화학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타카야마 부동산이 부동산을 취급하는 건 올해가 아마 마지막이 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대로라면 정환 상이 일본 제 1의 부자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그렇겠지.’
정환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허영준의 말처럼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차가 총련에 도착해서 김용건 과장을 만나자마자 이러한 그의 걱정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평양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머지않은 시일 내에 당의 핵심 간부들이 총련에 비공식 방문한다고 합니다.”
“핵심 간부들?”
총련에 도착해 어딘가 수심에 찌들어 보이는 김용건에게 정환이 그 이유를 묻자 김용건이 알린 소식에 대한 그의 첫 마디였다.
보위부 정도의 웬만한 검열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김용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이번에 평양에서 내려오는 사람의 신분이 범상한 게 아니라는 것을 정환은 바로 직감했다.
“핵심 간부들이라면, 어떤 동지들을 말하는 거지?”
“제가 알고 있는 건 두 명입니다. 우선 한 명은 당 선전선동부 부장 현영숙 동지입니다.”
“...........!!!!”
선전선동부라면 조선노동당 내에서도 선전활동 및 사상교육, 출판물의 통제와 검열까지 담당하는 핵심부서 중 하나다.
그런 곳의 수장이라면 분명히 북조선 내에서도 핵심간부라고 할 수 있지만, 김용건의 미묘한 어조에서 정환은 그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선전선동부장이 아님을 감지했다.
“다른 한 명은?”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다른 한 명은 청년사업부 제 1부부장, 장성택, 장성택 제1부장님입니다. 김정일 장군님의 매부가 이 총련에 직접 오시기로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