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버블 (5)
3장. 버블 (5)
“네....... 오늘 아침 평양에서 복무 중인 제 동무에게서 확인해달라고 한 사항에 대한 연락이 전해졌습니다. 말씀하신 장소에 이미 외국 기술자들이 왔다가고 삼엄한 경비가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 내 예상이 맞는 거군. 주기적으로 연락해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뭐지?”
정환의 질문에 유혜림은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백 대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정환 동지가 아니라 저한테만 말입니다.”
“......그래? 나는 유 상위의 개인적인 비밀은 별로 관심이 없네. 혹시 이야기하기 싫은 내용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뭐 말 안 해도 무슨 내용일지 훤히 짐작가지만.
이내 유혜림이 입을 다물자 정환은 곧 있을 소식 발표를 위해 호텔 TV로 시선을 돌렸다.
슬슬 이때쯤 발표를 해야하는데.... 하고 생각하던 찰나, 유혜림은 얼마 전에 이어 다시 한 번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을 해냈다.
“....아니오, 알려드리겠습니다. 정환 동지는 이제 제 목숨 줄을 잡고 있으신 분입니다. 이제 저는 백 대좌도, 수령님도, 공화국도 아니라 정환 동지만 믿고 따라갈 결심을 굳혔습니다.”
“...............!”
그녀의 선언하는 듯한 말에 정환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시했다.
비록 지난번 연회장에서 백 대좌가 아니라 그의 옆에 남겠다고 한 이후로 정환은 그녀가 어느 정도 자신의 의사를 정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여전히 100%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돌아온 정환은 이미 알고 있지만 유혜림은 그가 (아직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어떤 비밀을 그녀 스스로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직 김정일을 제거하겠다는 계획도 입 밖으로 직접 내지는 않고 있었는데...
그런데 아무래도 그녀는 이제 진심으로 정환에게 목숨을 맡길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백 대좌가 저에게 전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정신 차려라, 유 상위. 우리는 더 큰일을 해야 할 몸이다’, ‘한낱 수령의 서자에게 붙잡혀서 공화국에 대한 의무를 망각할 셈이냐’, ‘우리가 조국에 무슨 맹세를 했는지 잊지 마라’.............”
“흐음, 그런가? 그래서, 유 상위는 무슨 대답을 했지?”
정환은 얼핏 두서없어 보이는 그 말들이 무슨 내용인지 훤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하면서 그녀를 시험하듯 물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유혜림은 방금 전보다는 좀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환 동지는, 백 대좌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재목이라고 말했습니다.”
“.................”
“지금, 우리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나름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여럿 있고, 백 대좌 동지도 그중 한 분이지만, 저 유혜림은 정환 동지를 선택했다고, 그리고 제 눈이 결코 틀리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름의 결심을 담아 털어놓은 그녀의 고백에 정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완전히 믿기에는 아직 이르다.’
적어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김정일 축출 계획을 털어놓기에는.
......아직 그녀는 마지막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정환이게 생각하는 순간, 그녀는 마음 속 마지막 보루를 넘기 위해 고뇌하다 결정을 내렸다.
유혜림은 입술을 깨물며 힘겨운 목소리로 그녀의, 아니, ‘그들’의 마지막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알려드릴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저는.... 아니, 그리고 저와 백승철 대좌 동지와 다른 로씨야 출신들은........”
“그만. 거기까지만 말해도 돼.”
정환의 조용한 말에 유혜림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다가 이내 다시 한 번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정환 동지는 아셔야 합니다. 어쩌면 공화국에 있는 제 핏줄들이 위험에 처할 수 도 있지만... 그래도, 정환 동지는, 아니, 이 공화국을 이끌게 될 정환 동지에게 꼭 드릴 말씀이....”
“유 상위의 충성심은 이미 잘 알고 있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니 그만 해도 되네.”
“아뇨, 정환 동지는 모르십니다, 저와 백 대좌는.......”
“아니, 알고 있어.”
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유혜림을 차분히 진정시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입에서 떨어진 말에 그녀의 표정은 그녀의 새 블라우스보다도 하얗게 변했다.
“유 상위 자네와 백승철 대좌 동지, 그리고 로씨야에서 유학한 250여 명의 프룬제 동창들이 공화국에 침투한 스파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
“...............!!!!”
“포섭 주체는 러시아 국가보안위원회(Комитет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Безопасности : KGB), KGB지? 그들은 공화국이 예전부터 김일성 수령님의 1인 숭배체제로 나아가는 걸 불편해했고, 그래서 당과 매우 냉랭한 관계였으니 말이야. 자네들이 프룬제에 유학할 때 돈이나 성적을 미끼로 접근했겠지?”
“그, 그걸 어떻게..... 대체.......”
그동안 나와 함께하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유혜림은 내가 보여준 많은 모습들에 놀라거나, 때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유혜림이 나에게 보여준 경악의 표정은, 지금 내 앞에 서있는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었다.
그야말로 죽은 조상님이 살아돌아 왔다고 해도 저런 표정을 지어보일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 도대체 수령님의 사생아에 불과한 정환 동지가 어떻게 저런 걸 알고 있는 거지? 혹시 정환 동지는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그대로 유혜림의 얼굴에 나타났지만, 나는 그녀가 놀람을 수습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줬다.
이윽고 유혜림이 그녀의 상식으로 유일하게 설명 가능한 결론에 도달하면서 얼굴이 의심과 공포로 질려버릴 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심해, 유 상위. 나는 보위부에서 자네들에게 침투시킨 이중스파이 같은 게 아니니까 말이야. 물론 참모부 정찰국이나 당 소속 대외정보조사부 등 그밖에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참말이십니까?”
“상위,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호상비판하게 만드는 게 우리 공화국이라지만, 나 같은 스파이가 있을 것 같아? 신뢰문제 이전에, 그 의심 많은 김정일이 귀중한 외화를 고작 일개 스파이에게 이렇게 많이 들려서 해외로 빠져나가게 해줄리 없지 않나?”
그녀는 아직도 충격이 채 수습되지 않았는지 내가 처음으로 김정일의 이름을 형식적인 호칭조차 붙이지 않고 불렀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개의치 않았다.
방금 전 그녀의 고백으로 인하여, 이제 유혜림과 나는 말 그대로,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한 배에 탄 동지가 됐으니까.
프룬제 대학 쿠데타,
정환이 살았던 세계에서는 1992년 소련 프룬제 대학 출신 유학생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고급 정치, 군사장교 양성을 위해 소련과 협약을 맺고 자국의 엘리트들을 매년 수십 명씩 소련의 명문,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로 유학 보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회주의 지도국가인 소련의 교육과정을 밟고 온 이들은 원래의 능력과 출신성분에 힘입어 북한 사회에서도 엘리트의 자리에 오른다.
문제는, 이미 사회주의 국가라기보다는 김일성 1인 세습독재 국가가 된 북한에 불만이 많던 소련에서 그들 대부분을 포섭해 북한에 심어놨다는 것이었지만.
“.......정환 동지, 정말이십니까? 정말로 저나 백 대좌 동지를 당에 밀고하지 않으시는 게....”
“물론이지. 그들은 공화국을 바꾸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야. 나처럼 말이야.”
‘.......뭐 나하고 목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체제전복을 노리는 건 맞으니까.‘
소련의 스파이가 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온 유학생들은 북한이 스탈린식 1인 숭배 독재국가가 되어간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계획했다.
92년도에 계획된 열병식에서 그들은 탱크로 김일성과 김정일이 연설한 연단을 날려버리는 계획을 세웠지만, 인민무력부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한다.
그리고 곧 자신을 향한 암살시도가, 그것도 자신이 유학까지 보내준 장교들 중에 있었다는 것에 발광한 김정일은, 5년에 걸쳐 프룬제 대학 출신 유학생들의 씨를 말려버리고 두 번다시 외부로 유학생을 보내지 않게 된다.
여기까지가 정환이 이전 생에서 알게 된 프룬제 대학 쿠데타의 전말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 어차피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나나 유 상위, 김 과장 정도 뭉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으니까 말이야.’
이미 당과 군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김정일의 친위세력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이나 북한이나, 아니, 동서고금 전세계 어디서든 쿠데타의 정석은 요소요소에 자기사람들을 심어놓는 것.
그리고 쿠데타에 성공한다고 쳐도, 그 이후 정권을 잡고 민심을 얻어 국정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없으면 쿠데타는 안 한 것만 못하다.
즉, 정환에게 필요한 건 그를 지지해줄 지지세력이었고, 김정일에게 불만이 많으면서도 잘 교육 받고 수권 능력이 있으면서도 당, 군, 정부 모두에 네트워크가 퍼져있는 프룬제 대학 출신들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자신의 호위군관으로 배치되었던 유혜림에게 미끼를 던져 그녀를 선별하고 그들과의 파이프라인을 형성하는 것도 전부 계획의 일환이었다.
문제는.......
“....백 대좌 동지가 정환 동지를 따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하지만 따르게 만들어야겠지.”
“정환 동지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신중하시는 게 좋습니다.”
마치 엄마처럼 그를 걱정해주는 듯한 유혜림의 목소리에 정환은 피식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꽤 부드러운 면이 있었군.
“걱정 마. 유 상위도 결국 나한테 넘어왔잖아? 다른 사람들도 곧 그렇게 될 거야. 그때까지 우리가 할 일은 이곳 일본에서 힘을 쌓으며 기다리는 거야.”
“예? 예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볼을 붉히는 그녀를 놔두고 정환은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NHK에서는 그가 그동안 오매불망 기다리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 오늘 대장성은 엔화 절상으로 인해 침체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기준금리 인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모든 은행의 부동산 대출 규제가 완화될 것을 예고했으며, 집 없는 서민들의 생활 안정이라는 목표를 위하여........
드디어 밑그림을 그리던 자신의 계획이 윤곽을 갖추고 시동이 걸리는 것을 보며 정환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오까네 좀 벌어보실까.”
백승철, 네 총이 아무리 무서워도 돈보다 무서울 수 없다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버블이 붕괴할 91년까지 앞으로 5년, 그동안 미친 광풍이 부는 이 일본 열도에서 뜯어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질서는 백만장자를 만들지만, 혼돈은 억만장자를 만드는 법.
사실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지가는 70년대의 경기 호황과 수출 호조로 인하여 이미 상당히 빠르게 올라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 1986년 일본 정부가 발표한 금리 인하와 부동산 규제 완화는 그야말로 불바다에 유조차를 집어던진 수준이었다.
안 그래도 땅값은 절대 내려가지 않는다는 격언(?)이 암묵의 진리처럼 통용되던 시절, 빗장이 풀리자 기업이고 개인이고 할 거 없이 순식간에 모든 부가 빠르게 부동산 시장으로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1986년 봄이 오자, 이미 일본 열도 전체에는 뜨거운 투기 광풍의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광풍의 와중에서도 정환, 그리고 그의 대리인인 허영준은 핀셋으로 집어내듯 가장 지가가 비싸게 오를 곳만을 선점하기 위해 움직인 상태였고, 그중 정환의 1차 목표는 바로 지하철이었다.
“곧 동일본철도(東日本旅客鐵道株式會社 : 동일본여객철도주식회사, JR 히가시니혼)에서 야마노테 선(山手線)의 노선 확장 공사를 시작할 거야.”
예의 미나토 구의 카페에서 정환을 다시 만난 허영준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전주, 이 신비로운 젊은이의 말을 받아적느라고 바빴다.
이제는 더 ‘어떻게 알았냐’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어떻게 알고 돈을 넣느냐’ 같은 한심한 질문은 더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정환이 말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몇 달전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던 그의 눈앞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이곳 미나토 구는 물론이고 총련이 위치한 고쿄(皇居 : 일본의 황거) 근처의 지가도 오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사쿠사, 이케부쿠로, 우에노, 오다이바까지...전부 재개발되겠지. 값이 얼마든 상관없어. 부동산 개발 회사들은 이미 냄새를 맡았군요.”
“이미 도쿄 뿐 아니라 오사카, 교토, 나고야, 요코하마의 지가도 오르고 있습니다. 아니, 부동산은 물론이고 골프장, 골프 회원권, 호텔, 리조트까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철도입니다.”
정환은 믿기 힘든 일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보며 몽롱해져 있는 허영준을 타이르듯 말했다.
“일본은 철도의 나라니까. 그중에서도 도쿄 중심부를 전부 도는 야마노테 순환선은 말 그대로 골든 로드고. 반드시 그 땅을 확보해야 됩니다.”
조용하지만 엄격한 정환의 말에 허영준은 굳은 결의를 보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겠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부동산이 아니지만, 일단 초기 포트폴리오는 부동산 일직선이지. 돈 아끼지 마시죠. 본업에도, 내가 지난번 말한 부업에도...”
허영준이 고개를 깊게 숙이고 카페 밖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보며, 정환은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발 아래 창문으로 보이는 미나토 구, 롯폰기, 아오야마는 마치 빛으로 끓어 넘치는 솥과 같이 보였다.
‘이대로 3년만 있으면 김정일 비자금 부럽지 않은 돈이 모이겠는 걸.’
자기도 모르게 그런 낙관적인 상상을 하며 정환은 싱긋 웃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