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철인 (3)
2장. 철인 (3)
김정일은 정환의 어린 시절에 수많은 사진과 뉴스 자료화면에서 본 얼굴 그대로였다.
작고 똥똥한 키에, 할머니 파마라는 욕을 수없이 들어먹었던 뽀글머리, 인민복에 선글라스까지.
위풍당당하게 연회장에 들어온 북조선의 2대 수령은 잠시 긴장서린 얼굴로 서있는 모든 하객들을 쭉 둘러보더니, 이내 흡족한 듯 손뼉을 쳤다.
“뭣들 하고 있나? 날래날래 앉지 않고서는, 아바디 수령님이 보고 계시지들 않갔어? 허락할테니 앉으라우.”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다시 하객들이 자리에 앉았다.
김정일은 이내 주빈 테이블에 앉아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에게로 달려가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바지 수령님, 이 아들이 늦어서 아바디 뵐 낯이 없습니다. 기래도 생신 축하드립네다,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네다.”
“기래, 공사가 다망하니 뭐 늦을 수도 있지. 여기 와서 내 술 한 잔 받으라우.”
진한 서북사투리가 오가고 이내 김일성이 술을 따르자 김정일은 공손하게 그 술잔을 받쳐 들고 이내 가득 채워진 잔을 들어 올리며 선창했다.
“우리 공화국의 영원한 태양, 모든 인민들의 어버이, 김일성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
“건배!”
건배사가 외쳐지고 술이 몇 순배 돌자 김정일은 이내 자기가 이 생일연의 주인인양 악단에게 지시했다.
“거 왜 이리들 분위기가 맹탕이야? 거기 다들 뭐하네? 다시 연주하지 않고!”
김정일의 재촉에 이윽고 악단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김정일의 등장으로 잠시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다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가수가 노래하는 곡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노래였다.
“안녕히 라바울이여~ 다시 만날 때까지 잠시의 이별 속에 눈물이 맺히네~ 사랑스런 그리운 저 섬 보고 있자니... 야자수 잎 그늘 속 남십자성....”
‘라바울 속요(ラバウル小唄)라, 지금은 김정일이 북의 2인자라는 게 명확하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행동은 못 할테니 말이야.’
그 노래를 들으며 정환은 김일성과 그 옆을 보좌하듯 서있는 조선인민군과 당의 원로들의 얼굴에 나타난 미묘한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
지금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라바울 속요’라고 해서, 원곡은 ‘시마구치 코마오’라는 일본인이 작곡한 ‘남양항로(南洋航路)’라는 노래를 개사한 노래다.
거기까지라면 ‘그게 뭐?’라고 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이 노래가 태평양 전쟁 당시 구 일본군이 부르던 군가다.
그리고 좀 어처구니없게도, 여러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도 알려져 있다.
‘과연 2차 대전 때 일본 제국 천황제 뺨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한 인간 답달까, 무능한 독재자들끼리는 뭔가 통하는 게 있다는 것 같단 말이지.’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업적이 과장되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한 때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던 자기 아버지 면전에서 구 일본군 군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하라고 지시하는 건 한 가지를 의미한다.
이미 북조선 내에서 김정일의 입지와 권력이 확고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라바울 가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주름살투성이인 김일성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으나, 이번에 그걸 알아차린 건 정환이 유일한 듯 했다.
‘하지만 아직은 김일성이 1인자인 건 명백해, 김정일 본인도 그걸 아는 거 같고.’
김정일의 입장으로 얼결에 합석하게 된 백승철과 유혜림 등과 잔을 나누면서도 정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안하무인의 태도와는 달리 공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북한 경제팀에서 근무할 때 읽은 자료들은 사실인 거 같은데.’
정환은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일전에 자신이 몸 담았던 북한 경제팀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북한은 수령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뒤집히는 국가인 만큼, 북한의 최고존엄인 김 씨 일가, 그 중에서도 특히 김정일의 심리에 대한 프로파일링 자료는 반드시 한번 쯤 볼 수밖에 없었다.
- 잔인하고 의뭉스러우며, 아무도 믿지 않는 편집증적이며 변덕스러운 성격. 행정적 능력이나 리더쉽은 찾기 힘들지만 권력욕이 매우 강해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권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음.
김정일은 처음 정계에 입문할 때, 항상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마다 아버지를 부축하는 등 아버지와 자신의 혈연관계를 과시했다고 한다.
김일성이 거동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팔팔한 40대였을 때부터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는 이야기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김정일이 자신의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분명히 예의바른 아들의 그것이었다.
그 태도가 언제까지 갈지는 몰라도 말이다.
‘역시 지금 정면으로 돌격하는 건 자살행위야. 일단 측면을 다지면서 내 사람, 내 라인부터 만들어놔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북한을 장악할 수 있어.’
정환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도 파티는 진행되어 마침내 참석자들 대부분의 얼굴에 취기가 얼근하게 흐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 때 김일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래, 오늘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 오랜만에 내 핏줄기들이 이렇게 다 모였는데, 어디 가족들끼리 얼굴이라도 봐야하지 않갔어? 다들 일어나 보라우.”
“............!!!!”
그 말에 김정일을 포함해 그 주위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핏줄기라는 말은 자신의 정실 소생인 김정일 뿐 만 아니라 정부, 한 마디로 자신의 측실 소생까지 전부 포함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북한의 최고지도자라는 김일성이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치부인 사생아(아무리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해도)를 불러낸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아까 그 노래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 그다지 심기가 편치 않은 모양이군.’
김정일 역시 그걸 감지했음인지 대놓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방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파티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아, 뭣들 하고 서 있어? 어서 내 아새끼들을 불러오지 않고!”
“네, 네, 수령님. 말씀대로 하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환갑 넘은 노인이 자기 아들과 손자를 보고 싶다는 데 그걸 말릴 명분도 없었다.
김일성의 말에 연회장에서 침묵을 지키던 간부들과 장령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더니, 이내 김정일과 달리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던 몇몇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비록 소수였지만, 정환도 그 시선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는데, 아무래도 이미 상당수는 그가 김일성의 혈통, ‘백두산 줄기’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곧 몇몇 사람이 움직였고, 정환 역시 구석 테이블에서 걸어 나와 김일성 앞에 섰다.
“아바디, 여기 아바지의 장손인 정남이가 있습니다. 정남아, 할아버지에게 인사드려라.”
“오냐, 정남아, 이 할아버지 보고 싶었지?”
김정남,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일성의 장손, 정환이 회귀한 미래에서는 차기 북한의 수령이 된 자기 동생한테 타지에서 독살당하지만 여기서는 정환보다 몇 살 어린 조카다.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 김일성에게 귀여운 맏손자를 보여줘서 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은 듯 했지만, 김정남의 태도는 영 비협조적이었다.
“아바지, 나 여기 싫어, 재미없어. 돌아갈래.”
“정남아! 어른이 물어보시면 대답을 해야지!”
김정일이 얼굴을 찡그리며 무섭게 다그쳤지만, 워낙 귀하게 자란 탓인지 14살에 불과한 김정남은 모르는 어른들이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는 게 불편했는지 칭얼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싫어. 싫단 말이야. 나 집에 갈래.”
“요놈 간나 새끼....”
“됐다, 애가 뭘 알겠니. 경희는?”
“그게....오늘 몸이 째다고(좋지 않다고)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숙취야? 하여간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것이....”
하나 뿐인 딸, 김정일의 동생인 김경희가 불참한 것에 대해 김일성이 역정을 내자 김정일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연회장의 기온은 본격적으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아직 김일성이 북한의 1인자인 것이다.
“지, 지금이라도 군관들을 보내서....”
“치워라! 이래서 계집년들이 큰 일을 못하는 기야! 다른 애들, 영일이는 어디 있느냐?”
김일성의 입에서 ‘영일이’라는 말이 나오자 안 그래도 불편하던 김정일의 얼굴이 대놓고 썩은 표정이 되었다.
영일이, ‘김영일’은 김일성이 자신의 후처인 김성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정일의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바디, 접니다. 영일이입니다.”
“오, 도이치(동독)에서 돌아왔다는 말 들었다. 기래, 요즘은 어찌 지내니?”
김일성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낸 건 정환보다 몇 살 많아 보이는 청년이었다.
어딘가 심하게 겁을 먹은 듯한 김영일은 김일성의 뒤에서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는 김정일의 시선을 피하다가 이내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자기 목숨이 걸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이, 일 없습니다(괜찮습니다). 이게 모두 형님.. 아, 아니, 장군님이 물심양면으로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오, 기래? 거 잘 됐구나.”
김영일의 시원찮은 대답에 김일성은 어딘가 불편해보였지만 본인이 일 없다는 데 더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김일성에게는 김정일과 김영일 외에도 김평일(金平日), 김현 같은 몇 명의 자식들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현재 전부 김정일의 견제로 인하여 외국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환의 차례가 되었다.
“수령님, 정환입니다.”
“기래, 네가 정환이구나. 네가 그리 영특하다는 보고를 김대 학장에게 들었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하는 정환에게 김일성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정환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그의 어머니 김명애의 말대로 이미 김일성에게는 정환이 김대에서 올리고 있는 성적이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고저, 우리 전주 김 씨 문중에 대대로 골통에 먹물 들어간 애들이 많지 않았는데, 너처럼 골이 비상한 종자가 나타나니 이 아바디는 참으로 기쁘구나. 기래, 가문에 자력으로 김대 교수 간판 차는 아새끼 하나는 있어야지. 핫핫.”
‘아버지라..... 기분 참 묘하군’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책에서나 보던 한국전쟁의 수괴에게 아버지 소리를 하는 게 참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정환은 상황에 적응하려 애썼다.
‘침착하자, 여기서는 김 씨 일가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모든 게 달려있다. 저들 입장에서, 내가 아는 김일성이라는 인간의 시각에서 가장 듣고 싶어할 말이 뭘까?’
김일성의 칭찬에 정환은 더욱 깊이 머리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이 모든 게 아바이 수령 동지와 김정일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 덕분입니다. 앞으로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당의 인텔리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하하.”
“영특한 자손을 두어 기쁘시겠습니다. 수령 동지.”
“역시 수령님의 씨를 받아 그런지 김정일 장군님처럼 당당한 장부입니다. 이 모든 게 우리 조선의 복이 아닙니까.”
그래도 대답다운 대답을 하는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음에 기분이 나아졌는지 김일성은 연신 웃음을 자아냈고 장내의 다른 간부들도 일제히 아첨을 하며 웃기 시작했다.
“아바디, 우리 김가가 저 고려 시조 대부터 특출하지 않았습네까. 아바디 대에 이르러 그 광영이 하늘에 닿으니 자손만대로 번영할 겝니다.”
“장군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 모든 게 수령 동지 덕분입네다.”
김정일 역시 정환이 자신에게 별 적대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주위 간부들의 아첨을 즐기면서 위스키를 들이키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단순히 통성명이나 하려고 자기 핏줄들을 불러 모은 게 아니라는 게 곧 드러났다.
긴장이 풀리고 파티의 분위기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찰나, 김일성이 뜻밖에 다시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내 얼마 전 정치국에서 보고를 받았는데, 당 안팎의 상황이 영 심상치들 않아. 그래서 마침 이 자리에 모인 당과 군의 간부들끼리 골(머리)을 모아 방책을 구해보려 하는 참이야.”
“..............”
“최근 로씨야는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가 대권을 잡고 저기 중국에서는 등소평(덩샤오핑) 동지가 구라파(유럽), 심지어는 미제 자본주의자들과 왕래하겠다고 말하면서 우리 조선에도 개방을 권하고 있어. 이러한 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간부들, 그리고 정일이 너도 어디 기탄없이 생각을 말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