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S5 : 37 화
지구를 침공한 핏빛가죽 일족의 마족 카르샤크.
그 강대한 마력에 응전할 만 한 유일한 수단은 마신이 되는 대관식.
하지만 마신이 된다면 모든 사람들과의 1000년간의 이별.
아니 영원한 이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칠성은 이 방법은 입에 올리지도, 아니 마치 머릿속에서 아예 지우려는 듯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UHD 후방 기지.
기지라고는 하지만 워낙에 넓은 부지위에 조성하다 보니 하나의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한편에.
전망이 매우 좋은 언덕 위에 집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물론 겉보기와 달리 사실은 UHD 에서 만든 방호시설을 완벽히 갖춘 쉘터 중 하나였지만 말이다.
“...진짜 잘 해놨네.”
한솜이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선 칠성이 감탄했다.
그 집 안은 칠성의 옛날 집으로 꾸며 놓았다.
칠성의 비서인 성진의 특별 주문이 있은 덕 이었다.
누나와 부모님, 칠성이 모두모여 살던 그 아파트를 그대로 재현해둔 집.
모든 것이 그때 그 시절 그대로였다.
“먹자~!”
저녁 식사의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보다 숫자가 늘어있었지만 말 이다.
된장국을 한 술 뜨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누나와 칠성은 물론이고 늘어난 사람들의 숫자.
누나의 남편인 정현우가 참석했고.
칠성의 약혼녀인 한솜이 역시 물론이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손님.
“어머!”
“또?”
“어디어디! 나도 보자.”
누나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는 칠성의 어머니.
칠성의 누나가 임신한 지도 몇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미래의 조카까지 참석한 자리.
세계가 멸망해 가고 있는데, 칠성과 가족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카르샤크는 엄청나게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매우 느리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잡아 마석을 추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이 지구에 자기를 이길 상대가 없으니 여유를 부리는 것 이다.
화기애애하게 밥을 먹던 와중.
칠성이 입을 뗀다.
간단하게, 차원 이동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이판사판 이었다.
칠성은 UHD 항공 모선의 엔진역할을 맡고 있는 특수 마석을 떼어 사용할 계획이었다.
이동 가능한 인원은 수 십 명 수준.
가능한 이동 횟수는 약 3~4 회 수준.
그 3~4 회의 횟수 안에, 정착하고 살 만한 세계를 찾아낸다.
그것이 계획이다.
가족과 극히 가까운 지인 몇 만 데리고 가자는 계획이었다.
모두가 딱히 어떠한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칠성의 입만 바라보며 듣고 있던 그 때.
“그거면 돼?”
한솜이가 물었다.
아니, 묻는 다기 보다는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
장영실 소장은 이마노프를 통해 칠성과 대관식의 비밀을 알았을 때 큰 결정을 했다.
바로 즉시 한솜이를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한 것 이다.
칠성에게 면목 없지만, 칠성이 마신이 되어 싸워주는 것이 인류가 걸어볼 마지막 찬스였다.
한솜이는 전후 이야기를 듣는 순간 거의 즉시 이해했다. 안희운전을 마치고 나서 붕괴되어가는 헌특부 건물을 빠져나갈 때, 칠성에게 접근했던 마계의 원로위원들을 직접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영실 소장은 한솜이에게 부탁을 했다.
기회를 봐서 차분하게, 칠성을 설득을 해 달라고.
“나 오빠한테 실망이야 정말. 그거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한솜이가 소리 질렀다.
물론 지금 한솜이의 태도는 기회를 보지도,
차분하지도, 제대로 설득하지도 않았지만 말 이다.
“야! 한솜이!”
덩달아 칠성도 목소리를 높였다.
알고는 있었다.
차원을 넘어서 도망가자는 의견에 반대 할 거란 걸.
좋은 직업이기 때문에 헌터가 된 대부분의 헌터와 다르게,
정말로 사람들을 지켜주겠다느니,
고작 그런 이유로 성기사 교육을 받고 헌터가 된 한솜이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 해 봐! 마계 원로원 들 한테 마신의 관이라도 받아서, 신이랑 싸우겠다고 설치는 미친놈이랑 싸우기라도 할까? 지던 이기던, 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데?”
“...사람들이 죽잖아.”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한솜이.
“...어쩔 수 가 없잖아. 봐봐. 사람은 가끔씩 선택을 해야 돼. 그것도 너무 늦기 전에.”
차분한 목소리.
칠성의 조용한 설득이 시작되자 한솜이도 아무 말 도 못하고 그저 칠성의 눈을 바라볼 뿐 이었다.
너무나도 진정성 있는 눈동자.
한솜이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무작정 사지로 뛰어들길 원하는 사이코 패스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손잡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걸 꾹꾹 참고 있는 사람이 한솜이였다.
“...남들은 결국 남들일 뿐이잖아. 세월이 좀 많이 흐르면 잊혀 질 거야.”
그렇게 말하며 칠성이 한솜이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한솜이는 별 저항 없이 품에 안겼고, 그런 한솜이를 다독이는 칠성.
그 뒤,
칠성은 가족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상한 일들.
그러니까 고등학생 시절 차원을 넘은 소환을 당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소상히 한 톨도 빼놓지 않고 이야기 했다.
다른 차원으로의 도피라는 황당한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밤 깊이까지 이어진 이야기.
“차원 이동은 내일 아침입니다 여러분.”
카르샤크가 잔뜩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이쪽도 잠시 밤사이 정도는 여유를 부려도 되리라.
아침이 되면 텔레포트로 중요한 사람들을 빼 온 뒤,
이 세계를 뜰 것 이다.
* * *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밥 좀 더 줄까?”
“아니, 아니 됐어.”
어머니가 해 주는 밥을 먹고있는 칠성.
아침의 집안 풍경은 정말로 이상하고 묘했다.
어딜 봐도 익숙한 풍경 뿐 이라,
마치 평화롭던 그 시절인 양 자꾸자꾸 착각이 들었다.
하여간 이런 것도 지금 이게 마지막이로군.
“담배나 한 대 피자.”
“...예.”
아버지의 부름에 UHD 후방 기지 안의 언덕 위에 오른 칠성. 그리고 칠성의 아버지.
주변은 목초지.
원래 거대한 방목형 목장으로 쓰이던 지역인지라 어딜 봐도 푸르렀고 공기는 맑았다.
칠성의 아버지는 일상적인 이야기로 말문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네 말대로 라면, 네가 가족과 헤어 진지 600년의 세월이 지났었다는 거 아니냐.”
“그렇죠.”
이제 와서 의심이 드시는 건가?
하긴, 황당한 이야기긴 하니까.
“그런데 넌... 가족들을, 우리를 몽땅 잊었니?”
칠성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
“아뇨.”
“잊기는커녕 되려, 우리랑 같이 있고 싶어서 온 세상을 다 내다 버리고 싶다는 것 아니야.”
칠성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차가운 은쟁반이 가슴을 싸 하게 지나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둥글둥글한 쟁반이.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를 크게 한 움큼 퍼내.
무언가를 들킨 듯한 기분.
“세월이 얼마나 흐르건 상관이 없다 칠성아...
정말 중요한 것으로부턴 도망칠 수 가 없어.”
“.......”
인정하기 싫다.
그 때 였다.
가족들 모두가 짜기라도 한 듯.
어머니와 누나, 한솜이, 정현우 까지 슬쩍 아버지와 칠성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왔다.
“넌 훌륭한 아들이었다.
단 하루라도 널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
아버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인물은 하늘이 내리는 법이다. 이제 세상에 널 내주어야 할 때인 것 같구나.”
어머니는 또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리고 칠성은 그 순간.
자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불꽃과 마주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하다, 외면하고 있었을 뿐.
누구보다도 카르샤크와의 대결이 자신의 운명임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마주보는 한명한명 모두가.
칠성을 응원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칠성의 두 눈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칠성은 말없이 부모님들을 꽉 안아주었다.
부모님들 역시 눈물이 앞을 가리긴 마찬가지였다.
“도시락이야. 우리아들, 가다가 먹어. 응?”
“엄마...”
칠성은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어머니는 마계가 어디 뒷동산 너머에라도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이실까.
“부모님은 내가 잘 챙길게. 걱정 마.”
누나였다.
“그래.”
그리고 칠성을 말없이 누나의 배 위에 손을 올려 보았다.
퉁! 무언가가 차는 게 느껴졌다.
“삼촌 파이팅 하나보다.”
슥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 칠성.
“아, 저....”
턱.
어색하게 말문을 열지 못 하는 정현우의 어깨를 툭툭 치는 칠성.
“누나 잘 부탁해요.”
“...그래.”
나름 믿음직한 눈빛을 보여주는 정현우.
모두와의 작별인사.
마지막은 한솜이다.
한솜이의 이마에 키스를 한 칠성.
키스는 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뭐, 뭐하는 짓이야?”
기겁을 하는 한솜이.
한솜이의 손가락에서 약혼반지를 빼 가려고 했던 칠성.
다시 한 번 한솜이의 손가락을 빼려고 한다.
“돌려 줘.”
칠성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차피 기약 없는 이별이 될 가능성이 많다.
따지고 보면, 고작 얼마 되지도 않는 연애였다.
그런 것 으로, 한솜이 평생에 마음의 짐을 남겨두고 싶지 않다.
그럴 바에야. 모든 증거물을 자신이 가져가리라.
그리해 한솜이는 새로운 사람과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나으리라.
칠성의 생각에선 순전히 한솜이를 위한 발상이었다.
“싫어!”
그런데 한솜이가 반지 낀 손을 감싸 쥐며 숨긴다.
“오빠 너 웃긴다? 이거 내꺼 거든?”
“뭐라고?”
당돌하게 따지는 한솜이.
어이가 없어 웃는 칠성.
그러자 한솜이, 제법 진지한 톤으로 말을 이어간다.
“...나 오빠랑 결혼 할 거야.”
도저히 그저 해 보는 가벼운 농담이라기엔 너무나도 진지한 한솜이의 태도.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그건 마치 곧 죽을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지야 않더라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치 말기 암 환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철부지 같다.
“약속 했잖아. 약속 지켜. 나랑 결혼 해. 오빠 취소 못 해.”
그렇게 당돌하게 말 하곤,
아직도 눈물이 맺힌 눈가로.
콧물까지 한번 들이마셔 가며.
하지만 씩 개운하게 웃어 보이는 한솜이.
한참이나 그런 한솜이의 턱선을 쓰다듬으며 눈을 들여다보던 칠성.
“알았어.”
다시 가벼운 키스.
“결혼 하자고.”
영원히 이별 할 지도 모르는 슬픈 상황.
하지만 뭐가 좋은지 잠시간 키득거리는 두 사람.
그리곤 가족들로부터, 한솜이로부터 몇 걸음 크게 멀어지는 칠성.
후욱!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칠성을 둘러싸고 세 명의 모습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남색의 피부 톤에 흰 빛을 내뿜는 눈을 가진 거구의 마족, 산타클로스 같은 수염을 한 붉은 피부의 마족.
그리고 예의 염소 머리.
마계의 12 원로 위원 중 3명이었다.
“준비는 모두 되신 것이지요?”
그들이 칠성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약간 먼발치에선 가족들과 한솜이가 눈물을 훔치며, 인사를 하느라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칠성.
“가자.”
훅!
어두운 그림자가 칠성과 원로위들을 순식간에 삼키고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