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S5 : 36 화
이기지 못 하는 상대를 만났을 때.
대처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안 싸우면 돼.”
“응?”
멍하게 되묻는 한솜이를 내버려두고 칠성은 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한다.
환자복 차림의 칠성이 회복실을 나와 UHD 건물들 사이를 가로지른다.
“어디 가는 건데!”
놀란 한솜이가 뒤 따른다.
칠성은 느꼈다.
마신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핏빛가죽 일족 카르샤크와 주먹을 나누었을 때.
그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못 이겨.’
못 이긴다.
사람은 사리판단이 빨라야 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수준차이가 너무나도 아득하게 멀어지면,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 것 인지 가늠을 할 수가 없다는 뜻 이다.
하지만 칠성은 그 자신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실력자였다.
그렇기에, 진정한 강자와는 단 한 번의 일합만 나누어 보아도 그 실력을 가늠 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다.’
그 붉은 피부의 마족은 날 상대로 제 실력을 내지도 않았다.
그것이 칠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가늠해 보건데 카르샤크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칠성을 완벽하게 죽이는 것 도.
순식간에 지구를 초토화 시켜버리는 것 도 가능했을 것 이다.
“문 열어.”
“어, 어 여기는....”
칠성이 무심한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 은 UHD 전진기지. 하늘을 나는 항공 모선의 엔진실 이었다.
칠성이 다짜고짜 문을 열라고 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요원 둘이 서로 눈치를 보며 칠성을 멈춰세운다.
“여, 여기는 출입이....”
“HSY0312.”
대답은 않고, 아니 질문도 채 듣지 않고 UHD 1급 비밀코드를 술술 대는 칠성.
비밀코드의 조합은 HSY 한솜이. 0312. 3월 12일.
한솜이의 생일이었다.
아마도 알게 된다면 한솜이의 얼굴이 벌것게 달아올랐겠지만,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한솜이는 눈치조차 채지 못 했다.
“여, 여기는 코드뿐만 아니라 승인이 있어야....”
너무나 당황해선 안쓰러울 정도로 말을 더듬거리는 요원이 다시 한 번 칠성의 앞을 막아선다.
그런 요원을 향해 칠성의 안광이 번뜩인다.
“내가 승인한다.”
숨이 턱 막힌 요원.
UHD 의 머리가 승인한다는 데 더는 할 말이 없다.
“예.”
취식-.
결국 열리는 엔진실.
그들의 앞에 들어난 것 은 기묘한 빛깔들로 빛이 나고 있는 거대한 마석.
거의 모선의 크기 그 자체만한 커다란 마석이다.
그리고 그 마석에 매달려 있는 각종 기계장치들.
아니, 오히려 마석 위에 UHD의 항공 모선을 지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닌 표현이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마석은 여러 가지 색색으로 번갈아가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상도 못 했는지 초조하게 칠성에게 따지던 상황도 잊고, 입을 살짝 벌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한솜이.
걱정이 되는 듯 눈빛을 주고받는 문지기 요원들.
그리고 만족스러운 표정의 칠성.
“그래, 이정도면 되겠어.”
슥-.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칠성.
아까 전 코코에게 들은 상황 설명,
그리고 자신의 추리를 토대로 칠성이 내린 결론.
차원 이동이다.
칠성은 판브루크 대륙에서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차원이동을 약 100 여년간이나 연구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연구한 바로는 굉장히 다양한 차원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판브루크 대륙에선 여러 차원에서 무차별적으로 소환해 온 여행자들이 상당수 있었기에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축척된 데이터도 상당했다.
그중에는 지구와 유사한 행성들도 끼어있었다.
지하철이 다니고 it 기기를 쓰는 또 다른 세상 말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행성을 마석 덩어리 정도로 취급하며 대량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사이코 패스가 나타난 이곳에서 굳이 살아갈 필요가 없는 것 이다.
적당한 행성을 물색해 차원이동을 한다.
가족들을 데리고.
어떤 차원, 어떤 상황 위에 떨어지던 어지간해선 가족들을 호강시킬 자신이 있는 칠성이었다.
“...그럼 여기 사람들은 죄다 어떻게 되는 건데? 우리 말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답이 칠성의 입에서 튀어나올 까봐 걱정되는 눈빛으로 묻는 한솜이.
마치, 김칠성이 그런 결정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하는 표정.
한솜이의 눈망울이 떨린다.
“...다들 죽겠지 뭐.”
* * *
UHD 의 작전 지휘실.
김칠성이 적과의 전투 중 쓰러진 지금,
이곳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아....”
책상위에 팔을 얹고 양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을 내쉬는 장영실 소장.
회의를 위한 원형 탁자 위에는 현 상황을 나타내는 홀로그램 모빌들이 마치 마법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또각, 또각.
그리고 그런 지휘실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한 무리.
그 무리의 선두에 선 것은 자신 있는 걸음걸이의 여자.
글래머스한 바디를 연구원이라곤 믿겨지지 않는 붉은 가죽 드레스에 끼워 넣곤, 그 위에 연구원의 상징인 백의를 대충 걸쳐 입은 굉장히 기가 세 보이는 여자.
아니, 마족이었다.
“아, 이마노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던 영실이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숨을 돌렸다.
머리 위로 솟은 뿔이 증명하는 분명한 마족.
하지만 UHD 연구원인 장영실 소장과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마족. 이마노프.
지금은 UHD 연구소의 팀장 직위를 달고 있는 이마노프.
하지만 한때 그녀는 사실 이런 평범한 직무 보다는 ‘채찍의 이마노프’ 로 불리던 마족이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실수로 불러들인 마계의 마족들.
땅 끝으로 추방된 군대인 피의 군주 메피스토.
바로 그 악명 높은 메피스토의 오른팔 중 한명으로 언급되던 것이 채찍의 이마노프였던 것 이다.
세월이 흐른 만큼 과거의 그 화려했던 흔적도 지워졌다.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날카로운 채찍은 온데 간데 없었고, 그 대신 학구적으로 보이는 자주빛깔의 안경테가 걸쳐져 있었다.
목청 높여 전쟁터를 호령하던 말투 대신,
조용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법을 배운 말씨 역시 변한 것 중 하나였다.
물론, 가학적일 만큼 노출도가 높은 패션센스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옷에 테클 걸지 말아요.”
“아니, 내가 언제....”
“걸려고 했잖아요? 방금.”
딱히 복장에 대한 사내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마노프가 노출도 있는 옷을 입을 때 마다 장영실 소장이 눈 둘 곳을 도무지 찾지 못 할 뿐.
“칫”
그리고 장영실 소장이 이마노프 앞에서 눈 둘 곳을 모르고 허둥댈 때 마다 차혜진은 장영실 소장에게 슬쩍 눈을 흘기며 안 들리게 혀를 찼고 말 이다.
이마노프가 갑작스레 찾아 온 것은 쓸데없는 담소나 나누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있어요.”
“뭐?!”
“네, 이마노프 씨가 말 해주신 게....”
“내가 직접 하지.”
이마노프와 함께 온 그녀의 동료들이 방법이 있다고 나서는 것을 이마노프가 막아서곤 직접 설명했다.
이마노프는 마계에 대한 압도적인 지식과 본능적인 마법에 대한 이해도로 UHD 의 연구에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UHD 연구원들은 그녀가 마족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동료 그 이상으로 이마노프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마노프가 말 하는 이 사태의 해결책.
“솔직히 김칠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질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 한 해결책.
그것은 바로 마신의 대관식!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장영실 소장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대관식. 그것은 말 그대로 관을 수여하는 의식.
그것도 마신의 관을.
즉, 김칠성을 정식으로 마신으로 만들 길이 있다는 소리였다.
“확실해요, 아니 오히려, 마계의 원로위원들이 바라는 바 일걸요?”
“참 나...!”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를 들어버린 장영실 소장이 다리에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마노프의 말은 대충 이러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계의 원로위원들은 김칠성을 마신으로 추대하길 원했다.
이마노프로서는 그게 설마 지구에 있는 이 김칠성인 줄 이야 몰랐지만, 얼마 전에 확신하게 되었단 것 이다.
핏빛가죽의 카르샤크는 마신이 되고싶어했다.
마신이 되기 위해선 원로위원들의 인정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대관식을 통해 마신의 관을 받게 되면 차기 마신이 되는 계약이 완성되는 것 이다.
마계는 힘과 지식이 존중받는 곳.
카르샤크는 마계를 제패한 자신이 당연히 마신의 관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원로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목숨을 걸어가며 카르샤크에 저항했고,
결국 카르샤크는 마신이 될 수 없었다.
마신의 보구인 마신의 심장을 탈취해서, 강제로 개조해 자신과 연결했다.
그리하여 마신의 심장의 기능인 무한한 마나의 저장.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세계의 행성들의 인간들을 희생시켜 막대한 양의 마나를 마신의 심장에 쌓아놓고 있었다.
그런 그의 최종 목표는 신계의 신들에 대한 도전!
나아가 창조신의 암살!
혹은 그에 준하는 성과를 내어,
핏빛가죽 일족을 그 어떠한 종족보다도 존엄하게 만드는 것 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일곱별의 마왕’ 에 대한 자신 나름의 해석을 통해,
일곱 개의 별의 마나를 자신이 흡수하면 신들과 싸울 수 있게 되리라 확신 하고 있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그의 야욕.
까닥하면 신들의 분노를 사 마계를 멸망시킬 수 도 있는 위험한 마족인 카르샤크.
그리고 그 비틀린 야욕을 꿰뚫어 본 마계의 원로 위원들.
마계의 수호신 이여야 할 마신의 자리에,
이런 위험한 야욕을 품은 마족을 앉힐 수 는 없다고 생각한 원로위원들의 필사적인 저항이 뒤따랐던 것 이다.
“마신이 된다 치면, 그럼 승산이 있는 거야?”
장영실 소장의 질문, 그리고 이마노프에게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들.
“되는 순간, 게임 끝.”
너무도 담담히 대답하는 이마노프.
마신의 심장은 본디 마신을 위한 것.
카르샤크가 손에 마신의 심장을 쥐고 있다고 해도 마신의 지위를 얻은 칠성이 명령하면 심장은 칠성에게 마나를 보내게 된다.
즉, 카르샤크가 전력으로 모은,
6개의 행성을 희생시켜 마신의 심장에 쌓아둔 마나를 칠성도 쓸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죽 쒀서 개 좋은 일 한다고 했던가.
칠성이 마신이 된다면 카르샤크가 딱 그 꼴이 되는 격 이었다.
“이 계획에 단점이나... 약점 같은 건?”
장영실소장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
여기까지 들어보니 무언가가 이상했던 것 이다.
이런 좋은 방법이 있는데 칠성이 여태까지 망설였을 이유가 없다.
그것도 마신의 자리를 몇 번이나 거절했을 것 이라니.
언 듯 이해가 안 가는 것 이다.
“유일한 단점이 있죠.”
이마노프는 굳은 얼굴로 안경을 벗더니 작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마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
마계는,
그 세계 자체가 마족이 아닌 자 들을 거부했다.
칠성의 경우엔 반마반인의 존재.
이 벽을 넘나들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알기로는 천년이예요.”
마신이 되는 자는 천 년간 마계에서 마신으로 마계를 보호해야한다.
카르샤크의 경우엔 마신으로 임명되지 않았기에 제 멋대로 활보하고 다니는 것 이었고.
대부분의 경우엔 마신이 다른 차원을 방문하려면 아주 복잡한 조건을 충족한 소환 계약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누군가가. 그것도 수준 높은 흑마법사와의 계약이 있을 때 단기간에 한해서였다.
마신 소환의 경지를 아무도 달성한 바 가 없는 지구.
칠성 입장에서 이런 것을 기대 할 수는 없고,
그대로 꼼짝 못 하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천년간의 이별이었다.
천년이나 사는 사람은 없으니,
다시 말 하면 영원한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