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S4 : 17화
“헉!”
숨을 들이키는 칠성.
눈앞에 보이는 천장.
후!
“살았나.”
고개를 바딱 들었던 칠성이 다시 몸을 뉘인다.
온 몸이 뻐근하다.
아니 뻐근하다는 말도 모자라다.
마치 관절 사이사이, 뼈마디 사이사이에 톱니바퀴들이 끼어들어 돌아가고 있기라도 한 듯한 통증이 밀려들어온다.
“끄으으...”
짧게 신음 하는 칠성.
“뭐야 다들. 모여가지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칠성이 말 한다.
“젠장! 잘난 척은!”
웃으며 몰려드는 사람들.
칠성이 깨어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천왕을 포함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다.
짧은 검진과 식사를 마친 칠성.
“나가자. 모두 기다리고 있어.”
길카터가 칠성에게 말 한다.
누가? 의심이 갔지만 묻지는 않는 칠성.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예의 엘프 꼬마.
콘이 들러붙는다.
“나. 나도 마법 알려주세요!”
흠. 귀찮게 시리.
무심하게 콘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어 헝클어 버리는 칠성.
“꼬맹이. 헛생각 말고 공부나 해. 부모님 잘 도와드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칠성.
맨 몸이던 상반신 위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친다.
“마법같이 재수 없는 거, 없어도 돼는 세상에 살게 해 줄 테니까.”
끼-익.
열리는 문.
옷을 들쳐 입으며 슬쩍 뒤 돌아보는 칠성의 모습에 문 밖에서 들어온 햇빛이 후광같이 비춰든다.
그게 눈이 부셔서 눈을 가늘게 뜨는 콘.
문을 나선 칠성.
엘프, 나이트엘프, 바슈, 드워프, 님프.
수많은 종족의 수많은 남녀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적어도 만 여 명은 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파.
건물 앞에는 수많은 이종족들이 건물 입구를 둘러싸고 칠성을 기다리고 있다.
제대로 여미지도 않은 웃옷.
헐렁한 옷 사이로 반쯤 드러나는 칠성의 상반신.
“아...”
“정말이다.”
“진짜로 있어!”
칠성의 모습을 보고, 마치 외계인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는 수많은 이종족들.
“뭔데.”
그런 칠성을 향해.
순식간에 그 수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는다.
“뭐. 뭐야. 왜들이래.”
각자 종족의 방식으로 예를 올리는 그들.
“메시아시여!!”
엄청난 음성의 파도가 메아리친다.
저 멀리, 칠성과 그를 둘러싼 이종족 무리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높은 나무의 가지가 그네라도 되는 양 위에 앉아있는 누군가.
“삭풍이 돌아올 때 구원자가 오리라. 그때가 되면 일어나리라. 네 명의 천왕이. 가슴에 십자가를 품은 메시아와 함께.”
혼잣말을 하듯.
중얼중얼 무언가를 읊은 것은, 칠성과 이종족들이 처음 만난 날. 칠성과 말다툼을 했던 엘프 소녀다.
방금 소녀가 중얼거린 것은.
칠성이 허무맹랑하다고 비웃었던 예언의 마지막 구절.
“칫. 내 말이 맞았죠?”
아스라한 햇살처럼 웃는 소녀.
* * *
그러한 일이 있고 약 50년 뒤.
졸면서 보초를 서고 있던 페젤론 왕국 성벽 위의 병사.
돌연 번쩍.
눈을 뜬 그가 옆의 동료를 툭툭 쳤다.
“야, 저거 뭐냐..?”
“커흠. 예? 뭐 말이십니까?”
역시나 졸고 있던 병사가 입가의 침을 닦으며 되물었다.
“야 저...저거. 저거?! 씨발!”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 병사.
몸을 돌려 어딘가로 달려간다.
“무슨, 무슨 일이십니까?!”
뒤따르는 동료 병사.
두뚜우-.
성내에 울리는, 경고음을 내뿜는 뿔피리.
“마왕이 나타났다!!”
“대마왕군이 처들어온다!!”
패닉에 빠진 성내.
혼란에 빠져 뛰어다니는 사람들.
허름한 옷을 입고 빨래를 하던 엘프족 처녀가 그 소리를 듣고, 주변을 살피더니 빨랫감을 던져놓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그녀가 향한 곳에 있는 건 마을에서 가장 높은 나무.
재빨리 타고 오르는 엘프족 처녀.
나무의 꼭대기에 오른 그녀.
성 밖으로 시선을 던진 그녀의 표정에 점차 활기가 돈다.
그런 그녀가 보고 있는 것.
쿵!
쿵!
성 밖의 지평선을 가득 채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군새.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이종족의 군대.
엘프와 님프.
나이트엘프와 오크들.
드워프와 바슈족.
그리고 이름조차 모를 거대한 몽둥이를 든.
짐승의 머리를 한 키가 2-3미터에 이르는 거구들.
그리고 그들 모두를 이끌고 있는 한명.
떡 대가 매우 큰 오크 두 명이 어깨에 이고 오는 침상.
그 위에 섹시한 복장의 서큐버스의 허벅지를 배게 삼아 누워있는 한명의 인간.
아니 반인반마.
서큐버스가 먹여주는 포도를 받아먹고 있는 김칠성.
어마어마한 숫자의 다종족 군대.
마왕군의 발길이 대지를 울린다.
* * *
이것이 칠성이 이세계에서 겪었던 600년간의 이야기의 축약판 이었다.
그리고, 현재.
“어? 이건 뭐야?”
“벤틀니 아니야 벤틀니.”“아 진짜네 ~”
제주도. 세계 자동차 박물관.
가족들과 함께 온 제주도지만,
칠성의 어머니의 성화로 한솜이와 김칠성만 따로 제주도 관광지들을 돌고 있었다.
“응? 아니 저. 밥도 같이 먹고.”
“아유, 요즘 애들 그런 거 싫어해요. 밥은 나중에 먹으면 되지. 데이트해라. 엉?”
칠성의 아버지가 아쉬운 듯 말을 꺼냈으나 어머니의 부추김으로 나선 길 이었다.
가족들은 칠성이 미리 잡아 둔 특급호텔의 스위트룸과 휴양시설에서 즐기고, 두 사람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한 관광객들이 자취를 감춘 제주도 관광지들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 진짜네~ 이런 거 비싸겠지?”
한솜이가 벤틀니사의 오래된 클래식 카와 벽에 붙어있는 벤틀니사 로고, 그 밑에 새겨져있는 설명문을 스윽 읽어보며 말 했다.
“왜. 하나 사줘?”
접근 금지선을 넘어 벤틀니 클래식카의 사이드 미러를 매만져 보던 김칠성이 장난기 가득한 투로 물었다.
그러곤 킬킬대고 웃는 두 사람.
“오빠 있는 거 돈 밖에 없어 솜이야.”
“아유 진짜, 무슨 말을 못 해.”
칠성의 어깨를 툭 치며 웃는 한솜이.
남들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소리만으로도 혼비백산한 것 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여유로운 태도.
하지만 구지 따지자면 이 두 사람은 전쟁 소식은커녕, 전쟁터에서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지더라도, 심하게는 본인 몸에 총알이 박혀오더라도 자기 몸에 피가 나는 게 아닌 총알이 찌그러질 테니, 이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 도 당연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이 들른 곳은 제주도 에코랜드.
“꺄아~ 날씨 진짜 좋다!”
노란색 칙칙폭폭 기차에 몸을 실은 한솜이가 기지개를 펴며 소리 질렀다.
두 사람 손에는 파란색, 분홍색 솜사탕이 들려있었다.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놀이동산에서 흔히 볼 법한 관광용 기차를 타는 게 메인 컨텐츠인 에코랜드.
옆으로 탁 트인 호수가 지나가는가 하면, 푸르른 녹음 속을 기차가 달려갔다.
물론, 관리하는 인력들조차 어딘가로 자취를 감춘 뒤라.
솜사탕 기계는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칠성이 돌려서 솜사탕을 만들어낸 것이었고,
기차는 관리인도 없이 저 혼자 레일을 따라 끝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두 사람의 순발력으로 달리는 기차에 뛰어올라 탄 것 이었다.
그러면서도 마냥 재밌어 하고 즐거워 하니,
세상에 종말이 오더라도 데이트를 할 두 사람이었다.
“쌤!! 저 질문 있어요!”5, 60년대 풍의 느낌을 재현해 둔 고등학교 교실.
교련복과 옛날 교복을 입은 마네킹들이 앉아있는 사이에서 손을 번쩍 든 한솜이가 질문한다.
딱딱.
“반장! 쟤 좀 조용히 시켜라.”
선생 마네킹에 입혀져 있던 팔 토시까지 챙겨 입은 김칠성이 교탁을 절반을 분리해 낸 당구 큐대로 두들기며 반장 마네킹에게 명령했다.
한솜이를 조용히 시키라는 명령에도 멀뚱멀뚱.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네킹.
“요즘 애들 말을 안 들어. 교권이 땅바닥에 처 박혀서~!”
허리에 양 손을 올리고 마네킹에게 화난 척 리액션을 하는 김칠성.
그런 칠성을 보고 큭큭 거리며 웃는 한솜이.
“쌤! 첫사랑 이야기 해 주세요!”
다시 번쩍 손을 드는 한솜이.
“첫사랑은 무슨 첫사랑. 공부를 해야지 뭐한다고 첫사랑을. 자 교과서 펴라.”
“쌤 그렇게 오래 사셨으면 여자도 많이 만났죠?”
음.
저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가?
옆머리를 긁적인 칠성이 대답했다.
“여자는 많았지~ 어이? 라틴계. 무슨 뭐 백인, 크~ 막 모델 같은 애들도 있고? 어이? 흑인도 있고. 뭐 선생님이 안건들인 인종이 없다고 봐야지! 심지어 선생님 인기는 종족을 초월했어. 뭔지 알아?”
“어우~ 바람둥이. 신났네.”
허공에 손으로 여자 몸매를 슥슥 그려내는 등 아주 걸출하고 찐득하게 자신의 행적을 묘사하는 칠성을 보고 한솜이가 웃으면서 면박을 준다.
“한번은 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아. 남녀가 왜 일대 일로만 사랑을 나눠야 하느냐. 우리가 인류애인데. 그지? 그래서 열 댓 명을 동시에 와르르르-!”
“웩, 진짜?!”
한참을 재미나게 과장된 액션을 섞어가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썰을 풀어가던 칠성이 피식 웃는다.
칠성이 딱. 딱. 분필소리를 내며 칠판에 한자 두 자를 적는다.
愛人.
“여자는 많았지만 내가 마음을 준 애인愛人은 없었어.”
그러고는 한솜이의 눈을 바라보는 칠성.
“너 빼고는.”
역시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칠성의 능청에
진심인가? 잠시 동공이 떨리는 한솜이.
“에이~ 거짓말!”
“들켰나?”
깔깔 거리며 웃는 두 사람.
두 사람이 있던 곳은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5-60년대를 재현해 둔 일종의 테마파크.
번쩍이는 고고 클럽장. 연탄집 등등.
연신 감탄을 하며 재미나게 광광지를 누비던 두 사람.
호텔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다.
“와~ 고급진거 봐.”
“아이, 촌년.”
“지는?”
낄낄거리는 두 명.
한솜이의 말대로 고급진 식당에선 철저한 서비스로 두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물 잔이 반쯤 비기가 무섭게 어딘가에서 다가와 채워주는 웨이터.
사실 두 사람 모두, 헌터 생활로 큰돈을 벌게 되어.
이정도 수준의 레스토랑이야 남들 김밥천국 가듯 드나들 수 있는 경제 수준을 갖추고 있었지만.
평소 일상이야 집이나 차 같은 베이직한 물품들을 제외하곤 헌터가 되기 이전이나 후나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한번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레이드,
돈은 쌓아 놔도 사치를 부리고 다닐 시간은 없다.
관광지 여기저기를 가 보아도 관광객은 물론 관리자 들 도 거의 자리를 비운 상황.
식당 역시 텅 비어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여기저기 몇몇 테이블에 식사중인 사람들이 보였다.
게다가 이 호텔 사람들은 식당을 제외하고도 모든 곳이 정상 영업 중 이었다.
그만큼이나 서비스 정신이 투철 한 것 인지, 전쟁에 대한 현실감이 없는 것 인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특급호텔은 정상 가동 중이었다.
하기야, 여기가 아니라면 피난 갈 곳이 해외밖에 없다는 것도 그렇긴 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서성이다가 호텔 내부 수영장에서 잠깐 놀기도 하던 두 사람.
두 사람이 묵게 된 스위트룸 객실로 돌아왔다.
함께 목욕을 마친 두 사람.
퉁~!
목욕 가운을 입은 칠성이 침대 위로 점프 해 눕는다.
키식-!
예의 탱크탑에 숏팬츠.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한솜이가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하나 딴다.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았지?”
맥주캔을 호록거리는 한솜이에게 말 하는 칠성.
맥주캔을 빨며 칠성을 물끄러미 보던 한솜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데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를 리가 없다.
동료들은 전쟁터로 향했다.
각자의 선택.
칠성을 이기적이라고 욕 할 사람은 없다.
늘 고지식할 정도로 정의 일자인 한솜이가 할 말이 없을 리도 없다.
하지만 칠성을 위해서 애써서 모든 것을 잊은 척.
하며 함께 즐겨주고 있다.
아무도 언급 안 했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뜬금없이 던진 칠성의 말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솜이는 이상하다는 양.
어깨를 올려 보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 말 하고 싶은 생각 없는데?”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칠성의 옆자리로 와 앉는 한솜이.
“너만 네 걱정하는 거 아니야 바보야...”
아... 그렇구나.
이 여자도 무서운 게 있구나.
자신의 어깨에 기대오는 한솜이의 어깨를 말없이 손으로 감싸는 김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