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무집행 흑마법사-96화 (96/145)

# 96

S4 : 15화

머릿속에서 온갖 계산이 오가는 칠성.

아니. 오히려 칠성이 할 결정은 오로지 하나 뿐 이었다.

그런데 그때.

“형아. 빨리 가.”

칠성의 손을 잡고 흔드는, 키가 칠성의 명치 부근까지밖에 오지 않는 어린 엘프.

평소에 극단적으로 낯을 가려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콘 이었다.

“뭐?”

칠성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콘이 아니었다.

“콘이 맞다 칠성. 어서 가라.”

어느새 다가온 란돌프가 칠성의 어깨를 잡았다.

“냉정하게 봐 칠성.”

그렇게 말하는 엘시아의 살짝 충혈 된 눈에 눈물이 맺혀있다.

“너라도 살아야지.”

“아니, 무슨 소리 들을....”

퍽!

그때였다.

칠성의 뒤통수를 묵직한 주먹 만 한 돌덩이가 강타한다.

“어떤 새...”

뒤통수를 잡으며 돌아보는 칠성.

“뭐 하냐 재수 없는 인간! 잽싸게 꺼져!”

그런 말을 하며 쓰게 웃고 있는 심아인이었다.

“뭐하는 짓이야 새끼야!”

칠성이 버럭 소리 질렀다.

“어이구 무서워! 인간이 본성을 드러냈다! 쫒아내라!”

그러면서 바닥에서 돌을 주워 던지는 심아인.

“꺼져라 인간! 꺼져!”

심아인을 따라 칠성에게 자그마한 돌을 던지기 시작하는 이종족의 무리들.

하지만 돌들은 칠성의 주변에 탁탁 소리를 내며 떨어질 뿐, 전혀 칠성을 맞추진 않는다.

“...가. 어차피 네 싸움도 아니었잖아.”

멍 하니 선 칠성에게 라테일이 말한다.

“어서 가!”

“가라고!”

타닥 타닥 떨어지는 돌들의 소리와.

자꾸만 가라는 외침들.

그게 과거에 누군가 한 말을 칠성의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고 있었다.

* * *

과거.

“떠나게.”“예?”

소크라테스와 같이 식사를 하던 칠성에게,

소크라테스가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이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소리네... 떠나게. 여기 있으면 자네는 결국 불행해 질 걸세.”

말없이 한참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던 칠성.

“뭔 소릴 하는 거예요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는 소크라테스.

“자네가 평생에 걸쳐 갈구하던 것. 여기에 있으면 얻지 못 하게 될 거야.”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구기는 칠성.

“예?”

되묻는 칠성의 눈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진심어린 말을 뱉는 소크라테스.

“...그러니.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겨 버리기 전에 도망치라. 이 말이야.”

* * *

다시 현재.

수만의 인간 군대에 둘러싸인,

수 천의 이종족들.

기적이라도 있지 않는 한,

참혹한 패배가 확정 되어 있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칠성.

“...김칠성. 너 만큼은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그만둔다면, 용서하겠다. 우리의 편에 서라.”

수십, 수백, 수천의 이종족.

엘프와 님프, 바슈와 드워프.

그리고 그들 사이의 칠성.

자신에게 항복, 그리고 면죄부를 얻은 제국의 시민으로 살아갈 것 을 제안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압도적인 병력의 수장. 길리엄.

누가 보아도 이 쯤 돼서 못 이기는 척 하고 받아들임이 옳다.

뻔한 자살행위를 하는 멍청이는 별로 없을 것 이다.

곰곰이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긁던, 칠성의 손가락이 위를 향해 서서히 올라간다.

중지다.

“좆—까!”

부릅뜬 길리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저...저 정신 나간!”

“이야아아아!!!”

칠성의 욕설이 경기를 알리는 공이라도 된 양.

이종족 전사들과 인간의 군대가 뒤얽힌다.

부욱!

홀리오더들이 발급했다는 면죄부가 갈갈이 찢겨 허공에 휘날린다.

“일이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는군요.”

홀리오더 배르도닐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기도하듯 눈을 지그시 감는 배르도닐.

“바꿀 수 없는 것도 있는 것이겠지요.”

챙!

으득 이를 갈며 칼을 빼든 길리엄이 김칠성을 향해 검을 겨누며 분노에 찬 일갈을 뱉는다.

칠성의 미래,

그리고 이 세계의 미래를 단숨에 바꾸어 놓기 시작한.

성기사 군단장의 역사적인 그 한 마디.

“지금 이 시각부로. 흑마법사 김칠성을 인류의 적, 마왕으로 선포한다!!”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진다.

* * *

판브르크 대륙을 지배하는 인간들의 대 제국,

페젤론의 군대와.

그에 반하는 레지스탕스 저항군 천년왕국 의 이종족 군대.

도합 수 만 여명의 사람들.

쿠-웅!

이름모를 바슈족이 머리를 쳐박고 쓰러지는 것을 끝으로.

수 만명이 이루던 아수라장의 전장터에 간신히 서 있게 된 것은,

한명은 김칠성.

다른 한명은 인간족의 종교 지도자.

홀리오더인 배르도닐.

고작 두 사람 뿐 이었다.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쓰러져 있는,

널브러져있는 목숨의 여부조차 분명치 않은 수만의 인파들.

“대단하시군요.”

배르도닐이 칠성을 바라보며 쓱 웃더니 쿨럭.

기침과 함께 각혈을 했다.

“너야 말로.”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예의 보랏빛 아우라를 온 몸에 감은 채.

큰 부상을 입었는지 짝 다리를 짚고,

배터리가 다 된 플래시 불빛 같은 것을

한쪽 눈에서 껌뻑이고 있는 칠성이 받아쳤다.

칠성은 분투했지만 홀리오더 배르도닐의 마력도 심상치 않았다.

이 자리에 온 홀리오더 4인 중 나머지는 그저 들러리고,

배르도닐이 진정한 전력임을 눈치 채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여기저기서 부상을 입고 낑낑 대는 사람들.

배르도닐이 마법이 섞인 명령을 할 때 마다 불사의 좀비처럼 벌떡 일어나 덤비던 성기사들 무리도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신탁을 한때나마 의심했던 제가 부끄러워지는군요.”

“뭐라고?”

혼자서 중얼거린 배르도닐의 말.

잘 들리지 않았는지 칠성이 되물었지만, 동문서답만 하는 배르도닐.

“그렇다면 정말로 당신을 이 자리에서 제거하지 못 한다면 큰일이 나겠군요....”

쿨럭.

다시 한 번 각혈을 한 배르도닐이 칠성에게 다가와 제안한다.

“인정하겠습니다. 당신은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제가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물론 전채 홀리오더 중 배르도닐은 말단에 가까운 존재.

하지만 김칠성의 잠재력은 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던, 저 위험한 불순종자는 이 자리에서 제거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사 절 쓰러뜨린다고 쳐도 이런 결과. 당신이 바란 것은 아닐 겁니다.”

쓰려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는 배르도닐.

칠성이 그 손길을 따라 주변을 둘러본다.

그야말로 참혹한 관경.

“...어쩌라고.”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빠드득. 이를 가는 칠성.

“개소리 하지 마.”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하공에 손짓하는 배르도닐.

이내, 쓰러져있는 수많은 이종족들의 몸에서 가느다란 흰색 실같이 빛나는 무언가가 뻗어나온다.

그리고 배르도닐이 손짓한 옆에,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하는 빛의 조형물.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은 빛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십자가다.

“...무슨.”

눈이 커진 칠성.

“물론 제 마력으로도 이 모든 사람들을 치유시키긴 무리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피가 흐른 입술을 올려 씨익 웃는 배르도닐.

“이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옮겨주는 마법이라면. 의외로 그리 많은 마나가 들지 않거든요.”

창연하게 빛나는 십자가.

배르도닐의 키 보다 훨씬 큰 빛나는 십자가가 거친 기운을 내 뿜으며 날카롭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재미난 마법이지요. 물론 별로 쓸 일은 없는 마법입니다만. 오늘은 쓸모가 있을지 도 모르겠군요.”

그저 말없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칠성.

“하긴, 제 말을 믿기 힘드시겠죠. 이럼 어떻습니까?”

“크읏!”

그렇게 말 하며, 부상을 입고 쓰러져있던 길리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배르도닐.

배르도닐의 품에서 나오는, 아주 구풍의 휴대용 머스킷. 권총.

화기가 발달하지 않은 페젤론.

그 최상위 왕족들과, 홀리오더들 만이 휴대하고 있는 호신용 총 이다.

끼드득-.

총구가 길리엄의 관자놀이에 딱 붙여 겨누어진 머스킷의 방아쇠가 올라간다.

깜짝 놀란 칠성.

“야, 야! 무슨 짓 이야?!”

“홀리오더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길리엄을 보며 미소 짓는 배르도닐.

조용히 눈을 감는 길리엄.

타-앙!

순식간에 길리엄의 머리통이 수박같이 터져나간다.

풀썩, 생기를 잃고 쓰러지는 통나무 같은 길리엄의 몸뚱이.

“...사이코 새끼.”

비틀거리면서도 힐난하는 칠성.

“이정도로 진심이란 소리입니다. 만일 저 십자가에 은근슬쩍, 제가 강력한 인간들을 수혜 대상으로 끼워 놓았다면 곤란하시잖아요? 당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면, 이 자리의 인간 전부를 죽일 수 도 있습니다.”

까드드득 -. 탕!

연이어서 발사되는 머스킷.

이번엔 바닥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던 또 다른 홀리오더의 가슴팍이 핏자국으로 물든다.

“마음에 안 들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리는 칠성.

정말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주요병력을 죽여 버린 배르도닐.

“저를 위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뭔데.”

다가오는 배르도닐.

한숨을 내쉬는 칠성.

어차피 일격이면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다.

“성마법에는... 일반적인 마법과는 다르게, 판단 마법이 있습니다. 간단하지요.”

배르도닐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든다.

끝에는 뾰족한 크리스탈이 달려있는 묵주다.

“거짓을 하는 사람 손등에 구멍을 내는 주술입니다.”

자신의 손, 그리고 칠성의 손에 묵주를 묶는 배르도닐.

“판단은 신께서! 신의 위대함을 간접 경험하게 해 주는 소중한 기회랄까요.”

실실 웃는 배르도닐.

“각자 검증할 맹세를 하나씩 해 보면 됩니다. 저부터 하지요.”

웃음을 그친 배르도닐.

순식간에 정색하고는.

“나 홀리오더 배르도닐은, 십자가 마법에 대한 설명 중 어떠한 거짓도 없음을 선언한다.”

“...나 김칠성은 배르도닐이 거짓이 없을 경우. 십자가를 질 것을 선언한다.”

내뱉듯 말 하는 칠성.

묵주에 매달린 크리스탈이 울 듯이 덜덜덜덜덜 떨린다.

띵!

덜덜 떨며 소음을 내던 크리스탈이 이내 한줄기 빛과 함께 움직이 멈춘다.

“...양측 모두 진실.”

배르도닐이 심각한 표정으로 칠성의 손에서 묵주를 거두어 간다.

“...신의 판단은 둘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믿지 않겠죠! 믿음은 믿는 자의 것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전.... 믿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는 배르도닐.

도대체 이 노인이 무엇을 하는 것 인지도 잘 모르겠는 칠성.

그런 칠성을 남겨두고 뒷걸음질 쳐 거리를 벌린 배르도닐.

“그런 고로... 선택을 도와드리죠.”

철컥.

자신의 턱밑에 겨누는 머스킷.

“야!”

다급하게 부르는 칠성.

타-앙.

총성과 함께, 배르도닐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머스킷.

“씨...발!”

눈을 감고 치를 떠는 칠성.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 인가.

“후우....”

주변에 쓰러져 신음하는 아군을 둘러보는 칠성.

확실히, 십자가는 이종족의 사람들에게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후!”

기합 같은 숨을 내뱉는 칠성.

자살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퉁!

까드득.

칠성의 품에서 튀어 오른 마석.

씹어 삼키는 칠성.

“뭐, 해 보자고.”

한 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까칠한 기운을 잔뜩 품은 빛나는 십자가로 한걸음 성큼 다가간 칠성.

서서히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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