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S4 : 10화
“나 역시, 인간을 들이는 것 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님프족 사제이자 사천왕 중 한명인 라테일이 길카터의 옆에 서며 느릿한 말투로 거든다.
그녀의 말에 따라 장내에 모여 있던 님프족들 역시 그녀의 뒤에 선다.
피슉.
“나는 어떤 쪽 이던 틀린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방법은 좀 아니지.”
란돌프가 자신의 손바닥에 박혀있던 엘시아의 단검을 빼내어 엘시아의 품에 던진다.
“어째야 하지, 동전 던지기라도 할까.”
란돌프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말 하자 매섭게 쏘아 붙이는 나이트엘프족의 여왕 헤니완.
“네 녀석은 이런 문제로 장난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어이 망한 왕국 여왕님. 때와 장소를 가리는 법을 배우는 게 좋을 걸? 어디서 되도 않는 상전 질 이야. 아직도 네년 왕국에 있는 줄 알아?”
헤니완의 하대에 열이 받은 란돌프가 평소 꾹 꾹 쟁여왔던 노여움을 분출한다.
“저자식이?”
“여왕님!”
“명을 내려 주십시요!”
어느새 여왕의 근처로 몰려든 나이트 엘프족들, 게 중 몇 명은 활 까지 들고 있다.
“허 참, 너무 만만하게 보네? 나도 바슈족의 족장을 맡고 있는 몸 이다.”
란돌프가 기가 찬 듯 내뱉자 순식간에 나이트 엘프들의 곱절이 넘는 바슈족 청장년들이 란돌프의 뒤로 으르렁 대며 몰려든다.
“어디 해 보자 이거야?!”
칠성 처분 여부의 찬/반을 두고.
여태까지 쌓여있던 불만들 까지 폭발한 혼란스러운 상태.
“...그만들 두게.”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잔잔하게 울린다.
낮게 뱉은 소리지만 파문을 일으킨 목소리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님!”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를 기점으로 갈라지는 사람들의 행렬.
금방이라도 뒤얽혀 싸울 거 같던 진영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허리가 구부정한 엘프 노인이 뒷짐을 지고 찬찬히 걸어 들어온다.
칠성과 길카터 근처에 까지 당도한 엘프 노인.
으르렁 거리던 사천왕도 소크라테스라고 불린 엘프 노인을 향해 예를 올린다.
“스승님, 거동도 불편하신데...”
“하도 시끄러워서 나와 봤네.”
소크라테스, 엘프족의 대현자.
한 때 모든 엘프들의 왕 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조용히 은거하며 천년왕국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사천왕을 포함한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좋다. 그럼 스승님께 이 문제를 맡기는 건 어떠냐.”
란돌프가 나이트 엘프 여왕, 헤니완 쪽을 향해 물었다.
자기들 끼리 수근 덕 대는 나이트엘프.
그리고 님프족 무리들.
“...스승님의 의견 이라면 우리도 따르겠다.”
헤니완의 말을 끝으로 칠성의 처분은 소크라테스의 판단에 맡겨졌다.
“흐음....”
둥근 바윗돌 위에 앉아 칠성을 한참이나 내려다보는 소크라테스.
그 때 였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엘프족 소년.
칠성에게 빵을 주기도 했던 소년 콘이 소크라테스에게 달려갔다.
“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작정 소크라테스에게 달려간 콘.
소크라테스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인다.
“흐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시장에서?”
끄덕끄덕 거리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속삭이는 콘.
“아이고, 죄송합니다. 스승님! 애가 철이 없어서.”
“아닐세.”
콘의 아버지로 보이는 엘프가 달려와 콘을 반 강제로 끌고 나간다.
“...좋아. 결정했다.”
오랜 고민 끝에 입을 떼는 소크라테스.
청중의 이목이 집중된다.
“나 소크라테스는, 흑마법사 김칠성을 천년왕국의 주민으로 받아들인다.”
담담히 결과를 발표한 소크라테스.
“예쓰!”
칠성의 양 주먹이 허공으로 올라간다.
“봤냐? 새키 들아?!”
마치 격투기 챔피언이라도 된 양,
바윗돌 위로 올라가 양 팔을 들어 보이며 자신을 반대했던 무리들을 조롱하는 칠성.
익숙하지 않은 모욕으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나이트 엘프족의 여왕.
“그렇지!”
“그럴 수가!”
그리고 마치 풍선이 부풀 듯 수군거리느라 바쁜 주민들.
“중천금인 왕족의 말. 번복은 없겠지?”
길카터가 검을 검집으로 갈무리하며 헤니완을 향해 묻는다.
으득.
“물론이다.”
분한 듯 이를 악문 헤니완이 대답을 남기곤 돌아서서 걸어 나간다.
* * *
헤니완과 나이트 엘프들이 김칠성과 길카터 쪽을 한 번씩 노려보며 자기들의 서식지로 사라지고 나자,
칠성의 편을 들었던 주변 사람들이 긴장이 풀려 한숨을 내 쉬었다.
“어찌됐든, 축하한다. 너도 이곳의 주민이다.”
란돌프가 커다란 손으로 칠성의 등짝을 툭 치며 말 했다.
‘쩝! 여기도 오래는 못 있겠구만.’
칠성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저렇게 도끼눈을 뜬 사람이 많아서야 마음 편하게 있긴 글른 것 같다.
대부분이 인간들 밑에 노예로 있었다고 하니 이해를 못 하는 바도 아니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라고 불린 엘프 노인이 왜 칠성의 편을 들어주었는지가 의문이다.
어쨌든지 공식적으로 있어도 된다는 쪽 으로 결론이 났으니.
‘당분간은 꿀 좀 빨아 볼까.’
어쨌든 칠성도 밖에서는 도망자 신세, 여기까지 인간 군대의 추격이 따라 붙을 리 도 없을 것 같고.
좀 촌구석 같지만 사는 형편은 괜찮아 보이니 잠깐 지내면서 호의호식이나 해 보자!
“오늘부터 넌 소크라테스님 몸종이다.”
...라는 칠성의 생각은 해가 뜸과 동시에 박살나고 말았다.
“뭐?!”
몸종? 슬레이브?
“몸종 이라고 해 봐야 집안일을 돕는 수준이다. 요리도 네가 해야 하고.”
끙.
칠성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저 날 백수로 호의호식이나 하려고 했더니.
“천년왕국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일을 한다. 대체 소크라테스님이 네녀석의 뭘 보고 원하신 건 진 모르겠지만....”
“...잉? 야 그런데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은 일 안하지 않냐?”
칠성에게 일을 알려주던 젊은 바슈족 청년.
저번에 칠성을 밧줄에 묶고 끌고 온 장본이기도 했던 녀석이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런데 이놈이 은혜도 모르고! 소크라테스님이 아니었으면 네놈은 진즉에...”
그러면서 칠성의 멱살을 콱 틀어 잡는다.
아주 버릇이구만?
평소 같으면 불같이 화를 낼 만 한 상황이었지만, 어느새 이 불같은 성격의 바슈족의 멱살잡이에 적응이 된 칠성은 그저 분란을 일으키는 것조차 귀찮을 따름이었다.
이 젊은 바슈족의 이름은 심아인.
기껏해야 엑스트라 수준의 존재감을 갖고 있으면서 이름이 너무 멋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칠성이었다.
“아 형제님. 왜이러시나 형제님. 놔봐.”
뻔뻔하게 형제님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으며 멱살을 잡힌 손을 탁탁 치는 칠성.
“흥!”
심아인이 콧김을 뱉으며 멱살을 놓는다.
아무도 알려준 이 없것만 칠성이 터득한 것 한 가지.
여기서는 형제님 타령을 하면 어지간한 건 봐 준다.
하여간 그렇게 몇 일간 칠성의 몸종생활이 이어졌다.
원인 모를 지병이 있는 소크라테스의 생활 전반을 돕는 게 일 이었다.
뭐, 이랬던 저랬던 집안일 수준인 것 이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농사일 이라든지 하고 있으니 오히려 보직으로 치면 꿀 보직이었다.
청소면 청소, 빨래면 빨래. 산책할 때 따라 나선다던가.
그리고.
“이게 무엇인가...?”
요리.
소크라테스 영감이 눈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곤 코를 킁킁 거렸다.
“콩나물 해장국 인데요.”
말 그대로 소크라테스 앞에 놓인 건 콩나물 해장국 이었다.
다진 마늘과 대파, 고추와 소금과 양파, 후추등을 넣었고 물론 메인은 콩나물.
황태를 넣으면 더 좋지만 상대는 엘프니까 참았다.
이세계에 떨어진 뒤로 끈덕지게 한식을 추구해온 칠성은 이제 스스로 콩나물을 기르고 수제 두부를 만드는 경지까지 와 있었다.
오물거리는 소크라테스.
“오!”
입맛을 다신다.
“특이하구만.”
‘요시’
안 보이는 곳에서 승리의 주먹을 쥐어 보이는 칠성.
이내 한식의 늪에 빠져드는 소크라테스.
채식을 하는 엘프들은 요리라는 것이 거의 발달하지 않고 있었다.
요즘엔 샐러드 정도는 먹는 모양 이었지만.
고기 없이는 딱히 먹을 게 없는 인간들의 음식은 시도해볼 생각도 안하는 것 같았다.
‘이게 국위선양 아니겠냐.’
칠성은 외딴 세계에서 몸종일을 하는 자신의 처지도 잊고 속으로 낄낄거리기 바빴다.
대한민국 정부가 맨날 하고 싶어 안달이 난 한식의 세계화를 칠성이 이세계에서 이뤄내고 있는 게 아닌가.
‘다음은 두부조림을 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님프족들에게 나눠 받은 쌀로 만든 밥을 입에 퍼 넣을 때 였다.
“같이 먹지.”
소크라테스가 주방 한편 조그만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던 칠성을 불렀다.
잘은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엘프들 중에서도 귀족 같은 것 이라고 했다.
그리해서 천한(?) 칠성과는 겸상도 안 하는 게 법도였으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칠성에게 같이 먹자고 부르는 것 이다.
“그려요.”
이쪽 마을에 있는 엘프들이 그런 권유를 받았다면 안절부절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귀족이니 뭐니 하는 개념이 없는 칠성이야 쿨 하게 오케이 했다.
흔쾌히 자신의 밥을 들고 소크라테스의 맞은편에서 식사를 이어가는 칠성.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소크라테스.
한참 식사가 이어지던 와중.
“떠나게.”“예?”
뜬금없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 이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소리네... 떠나게. 여기 있으면 자네는 결국 불행해 질 걸세.”
말없이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는 칠성.
* * *
“인간들이다!!”
콰카앙!
습격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눈과 감각 지각을 교란하는 마법으로 눈속임이 되어있는 천년 왕국의 입구.
그 결계가 무너졌다.
마을 입구의 길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들어오고 있는 것은 말을 탄 기병대였다.
“이종족 반란군의 수준은 이정도 인가.”
차박. 차박.
금속 편자가 박힌 군마의 발걸음이 울렸다.
붉은색의 군마위에 앉아있는 것은 중갑옷을 입은 채, 보석처럼 빛나는 거대한 방패와 기병창인 랜스로 무장한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어마무시한 거구의 기사였다.
천년왕국 주민들에게는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마침 사천왕들이 임무를 위해 마을을 잠시 비운 때 였다.
“마치 벌레 같군.”
거구의 기사가 처든 랜스의 끝머리엔 마을에 단촐한 복장과 활 하나로 보초를 서고 있던 엘프 경비병이 괴로워하며 매달려 있었다.
픽!
정말로 벌레를 쳐내기라도 하는 듯 한 동작으로 랜스를 휘두르자, 엘프 경비병이 형편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흥. 이런 벌레들을 상대 하는 데는 지원 병력도 필요 없겠군. 우리 끼리 쓸어버리자.”
자신과 함께 온 기병들을 향해 명령하는 기사.
“사로잡을 것조차 없다. 목표는 몰살. 만일을 위해 폭약을 설치 해! 단 한 마리의 벌레도 빠져 나가지 못 하게 하라!”
“옙!”
순식간에 흩어지는 병사들.
일반적인 학살이 시작된다.
* * *
혼란스러운 천년왕국.
“무슨 일 이야?!”
그 소란 통에 소크라테스의 집에서 튀어나온 칠성이 주변을 살핀다.
다급하게 지나가던 심아인에게 묻자 답한다.
“인간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 네놈도 어서... 아니다. 네놈은 소크라테스님을 지켜!”
그런 말을 남기고는 재빨리 전선을 향해 뛰어가는 바슈족 청년들의 무리에 섞여서 사라지는 심아인.
다급하게 뛰는 마을 주민들.
그 사이에서 칠성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아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군사학에 관련된 병법서에 취미가 있었던 칠성의 명석한 머릿속에, 순식간에 이 상황을 타계할 기막힌 전법이 떠올랐다.
눈이 번뜩이는 칠성.
“이럴 땐 36계. 줄행랑 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