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S3 : 26화
“아~~ 큰일 났네.”
수헌부 요헌들의 반 강제적 안내에 따라 수용된 방공호.
아무래도 최소 수천은 수용하기 위해 지은 듯, 방공호의 너른 공간이 한참이나 남아있었지만, 너끈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수근 거리며 돌아다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저 쪽 에선 이태완이 주변을 둘러보며 불만어린 목소리로 꿍얼대고 있다.
“으이 휴.”
한숨 같은 것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는 박인규.
슬쩍 보니 잔뜩 풀이 죽어 보이는 박지민이 멍하게 말없이 벽면을 손톱으로 따닥 따닥 긁고 있다.
벽면의 울퉁불퉁한 마감에 손톱의 날이 조금씩 나간다.
“괜, 찮냐?”
아마 마음이 마음이 아니겠지.
지민이 씁쓸하게 입술을 빨아당겨 빱! 소리를 내더니 피실 웃는다.
“선배, 나 오늘 생일이다?”
“그러냐?”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하나 했더니, 생일이었나.
뭐, 케잌이라도 사 주어야 하나.
“...나는 서른이 되면 내가 어른이 될 줄 알았어.”
지민의 미소는 생일에 대한 기쁨이 아니라 자조였다.
자기는 지금이나, 초임때나, 학생때나.
그보다 어렸던 고등학생때 즈음 부터나....
그때 즘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살은 어른이다.
이십대 후반 즈음엔 의심했지만.
이십대 중반의 자기가 생각하기에 서른 살은 어른이었고.
이십대 초반의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서른 살은 어른이었다.
그보다 어릴 때는 말 할 것 도 없고.
그러니까 서른 살은 어른이다.
자기만 빼고.
그런 기분이었다.
결국 박인규의 말이 맞았다.
호기롭게 전쟁터에 뛰어드는 종군 기자라도 된 양, 악마들이 점령했다는 서울을 향해 멋지게 차를 몰아 들어온 것 도 잠시.
진짜 악마가 눈앞에 나타나자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못 했다.
그냥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하룻강아지다.
“어른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거 랬는데....”
악마만이 그럴까.
선배들이 구태여 말렸던 소위 ‘위험한 사건’ 들도 다 마찬가지 일 거다.
그런 현장에 뛰어들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뛰어들지 못 하는데.
“...가야겠다.”
혼자서 이것저것 중얼거리던 박지민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뭐?”
잘못 들었나? 박인규가 되묻는다.
“나 진짜 기자 될 거야.”
박인규의 눈동자를 또렷히 들여다보며 말하는 지민.
전과 달리 지민의 눈 안에는 어린 치기도 없었고,
막연한 로망도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은 사람의,
저 너머를 보는 눈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뭐...뭐라고?”
그래서 박인규는 당황했다.
벌떡 일어나는 지민.
박인규가 따라 일어나려는 사이 지민은 벌써, 박인규의 핸드핼드 카메라를 챙겨들고 나갈 태세다.
“이거 빌릴게 선배.”
“어딜 간다는 거야 계집애야!”
덜-컹.
마침 방공호의 문이 열린다.
추가로 이송해 온 피난민 들이다.
“모두 질서를 맞추어서....”
요원들의 지시와 함께 우르르 소란스럽게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의 행렬.
지민은 그 틈을 이용해 나갈 생각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지민에게 따라붙는 박인규.
“선배 따라오지 마요.”
“얀마! 너 카메라도 못 다루잖아!”
지민의 팔을 낚아채는 박인규.
잠시 박인규를 처다보던 지민.
눈을 반달로 만들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 카메라 찍을 줄 아는 거 알잖아요. 선배.”
“너....”
사실이다.
서울로 혼자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영상 핑계를 대며 따라 붙은 것이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걸 지민이 알고 있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알면서도 묵인했지만 이제는 밀어내는 것, 정말로 위험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턴 혼자 갈게.”
그리고 그렇게 위험하다는 걸 안 녀석이 가려고 한다.
박인규는 두려웠다.
박인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렇게 말 하는 지민의 눈빛은 처음 보는 눈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는 손 떼라, 여기서 부턴 나 혼자 갈게.’
기억도 흐릿한 예전에 누군가가 했던 말이 아련하게 박인규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나도 간다.”
결심한 박인규가 불쑥 말한다.
“선배?”
“이번에는 가야겠다.”
“선배 제발요.”
말리는 지민에게 분명한 어조로 똑똑히 말한다.
“나도 기자야.”
단호한 말투. 그리고 표정.
한참이나 박인규의 눈을 들여다보던 지민.
끄덕인다.
“...그래요. 가요. 같이.”
박인규가 끄덕여 보인다.
비장하게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
“누나! 같이 가요 누나.”
태완이 따라붙었다.
“아냐. 너 여기 있어.”
“아 왜요. 저도.”
“너 누나 말 안 들을 거야?!”
박지민이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매서운 말투로 따져 묻자 당황하는 태완.
“아니 왜...왜.왜...왜 나만...”
억울하다는 듯 박인규와 박지민을 번갈아서 본다.
“여기 있어라.”
태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박인규.
“지민아!”
박인규가 지민을 부른다.
지민이 박인규의 말을 따라 입구방향을 보니,
인산인해의 인파 속, 그림처럼 비어있는 길이 생겼다.
끄덕.
지민이 박인규와 사인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방공호를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 * *
가양대교 인근....
“허억!”
지우혁이 악몽이라도 꾼 듯 숨을 크게 들이키며 잠에서 깨어났다.
“흐읏...허억...”
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고통에 숨 쉬기도 힘들었다.
지우혁이 눈을 뜬 곳은 텐트, 1인용 텐트의 속 이었다.
“후우우우....”
숨을 고른 지우혁이 온 얼굴을 찌푸린다.
“...뭐야 이거.”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자신의 몸에 상처가 있는 자리마다 소주라도 끼얹어 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온몸에 말이다.
옆구리 부근엔 쌈장도 발려져 있는 것 같았다.
된장도 아니고 말이다.
“쌈싸먹을 일 있나...”
손으로 찍어서 냄새를 맡다가 혀를 대 맛을 본 지우혁이 찌푸린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지우혁이 텐트 밖으로 향한다.
부상을 입지 않은 부위가 없는 지경인지라, 비틀비틀 거린다.
“끄후....”
몸을 서서히 돌려본다.
여기저기 쑤신다.
체감 상으론 거의 살아있다고 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그래도 어떻게 살긴 살았네.’
뚜둑,
스트레칭하는 몸에서 괴기한 소리가 난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이 많은 직업이다 보니 감각이 있다.
이번에는 정말 돌아가신 할머니도 만나고 온 것 같은데 살긴 살았다.
“윽!”
천천히 스트레치를 하려다 보니 옆구리에서 갑작스러운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갈비뼈는 완전히 나간 거 같고....’
온 몸에 심각한 수준의 부상이 가득했다.
말 그대로 헌터라서 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가장 먼저 손이 찾는 것은 담배다.
없다?
“어~ 이제 일어났서?”
치아에 문제가 있는지 새는 듯한 발음.
웬 술병을 든, 꾀죄제한, 누가 봐도 노숙자 느낌의 노숙자가 한손엔 담배 불을 붙여 들곤 그렇게 물어왔다.
어쩌다가 나이도 지긋한 거 같은데, 그것보다도.
“담배.”
노숙자가 들고 있는 것.
지우혁의 담배다. 말바로 레드.
“미이친놈. 물에 빠진 놈 건져놨드니 담배 내노래.”
술에 취해서 그런 건지 발음이 새는 건지 무진장 거슬리는 말투.
하지만 비틀거리면서도 한 대 뽑으라는 듯 담배 갑을 지우혁에게 드민다.
쩝.
별 반박 없이 한 대를 쑥 빼내는 지우혁.
목숨 값으로 담배 한 갑 이면 싸지.
‘아차.’
라고 생각 한 순간 지갑을 확인 해 본다.
아니나 다를까 지폐가 싹 사라져 있다.
“에휴.”
술 취한 노숙자 상대로 자 잘못 따져서 뭐하겠는가.
무식하지만 나름 응급조치?를 해주려고 한 거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쓰레기 인생.
이럴 때 얻은 지폐를 토해낼 리 없다.
겉모습만 봐도 알 만 하다.
그래서 뭐라고 시비를 걸 까 하다가 그냥 내비 두고 붙여주는 불을 받아 담배를 빤다.
툭.
그러고 있는데 노숙자가 무언가를 던져준다.
“머그라 그거.”
받아보니 둥그런 공 같은 것 이다.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건 종이에 싸여져있다.
“약 된다 머그라.”
그렇게 말 하곤 어딘가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노숙자.
술술 풀어보니 무슨 비둘기의 토사물로 만들었을 것 같은 색상의 둥근 공이다.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종이에 싸 대충 아무데나 던져버리는 지우혁.
일단은 수헌부로 돌아가야겠다.
자기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린 그 근육질의 악마가 제압 2팀의 사람들을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보면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일단 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조금 걸어 나오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전혀 노숙자들이 있을법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냥 뜬금없이, 강가에 조성해 둔 조그만한 볼품없는 잔디밭 한 가운데에 아까 그 노숙자의 텐트만 쳐져 있다.
“으훗...”
아픈 옆구리를 쥐고 이를 악물며 계단을 오르는 지우혁.
옆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뜬금없을 정도로 바로 도시가 펼쳐진다.
“꺄악!!”
비명소리가 들린 것 은 그때였다.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불량하게 생긴 덩치 두 명이었다.
둘 다 대충 봐도 190cm 가까이 되어 보이는 데다 살집과 근육질의 몸.
둘 모두 엄청난 거구에 한 녀석은 야구 배트까지 쥐고 있다.
야구 배트에 흥건한 핏자국이 눈에 띈다.
놈들이 메고 있는 커다란 백팩에서 돈뭉치 하나가 떨어지는 게 보인다.
“아이 아가씨, 누가 헤친대?”
“꺅!”
달래는 듯한 말투와는 상반되게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은 바닥에 주저앉은 아가씨의 긴 롱헤어 머리채를 비튼 행주라도 되는 양 비틀어 쥐고 흔들고 있었다.
혼란을 틈타 치안이 약해 진 사이 저들 멋대로 휘젓는 무리다. 놀랍지도 않다.
놀라운 건 그런 놈들 앞에 선 사람이었다.
“야이노무 쉐끼드라...앙가?”
술에 잔뜩 취해 고주망태가 된 할아범.
지우혁을 구해준 그 노숙자다.
‘뭐야 저 영감이 미쳤나?’
지우혁이 깜짝 놀라 눈이 땡그래졌다.
“이 영감이 미쳤나....?”
그리고 덩치 불한당 듀오도 지우혁과 동감인 듯 했다.
“어어..? 이쉐끼들아 남녀가 유별한데 다큰 처녀를 어..?”
술병이 출렁인다. 그러면서 덩치들에게 자신의 가슴팍을 들이밀며 시비를 거는 노숙자.
“뭐야.”
한녀석이 노숙자의 가슴팍을 친다.
노숙자가 비틀거리며 밀려난다.
“쳤어? 쳤어 이 시캬?”
어우 쒸, 별로 안 좋은데....
지우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어깨를 매만지며 몸을 슬쩍 풀었다.
어찌 되었던 생명의 은인 비슷한 건데 죽게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아무리 온 몸에 상처를 입고 폐인이 되었어도 헌터는 헌터다.
저 녀석들 정도야 너끈하다.
자기들 끼리 킬킬 거리던 놈들 중 한 녀석의 주먹이 위로 올라간다.
지우혁이 재빨리 대지를 발차며 달리려는 순간!
“허컥!”
콰당탕!
순식간에 지우혁이 아스팔트 바닥 위를 굴렀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캔에 발을 헛 딛은 것 이다.
평소라면 금방 자세를 바로 잡고 다시 달렸겠으나 부상으로 몸의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라 그대로 넘어졌다.
“젠장!”
쓰러진 상태에서 지우혁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노숙자가 위험....
하지만 지우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훨씬 놀라운 관경이었다.
거구의 녀석은 예상대로 노숙자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허나.
콰직!!
바닥에 몸을 눕히게 된 것은 노숙자가 아니라,
오히려 주먹을 휘두른 거구였다!
녀석의 주먹질은 빗나갔다.
동시에 강력한 카운터로 거구의 명치에 꼽힌 노숙자의 주먹.
전력으로 휘두른 주먹이 빗나가자 균형이 무너진 녀석이 동그라지자 빠른 동작으로 따라붙어 녀석의 턱밑을 밟아 바닥에 처박았다.
어찌나 세게 처박았는지 주변 아스팔트 바닥이 포격이라도 맞은 듯 널뛰기 하며 일어났다.
“븅신~ 크크크크 자폭 오지네.”
베트를 쥔 녀석은 상황파악이 안 되는 듯 보였다.
일련의 동작이 워낙 물흐르는 듯 했기에.
지우혁 조차도 간신히 그 동작이나 눈을 좇았을 뿐.
베트를 쥔 녀석의 눈엔 그저 제 친구가 자기 혼자 헛손질을 하고 고꾸라져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것으로 보이는 모양인 듯 했다.
게다가 방금의 일합으로 승리한 노숙자의 모습 역시 도무지 승리자로 보이지 않는 탓도 있었다.
노숙자는 그러거나 말거나 비틀거리며 생수 기계라도 된양 소주병을 90도 병나발로 꿀꺽 꿀꺽 불고 있을 뿐 이었다.
“할멈한테 안부 전하셔 영감!”
녀석이 병나발을 불고 있는 노숙자의 머리를 노리고 베트를 마치 타격을 하는 야구선수라도 된 양 폼을 잡았다.
“멍청한 녀석.”
지우혁이 중얼거렸다.
지우혁은 이제 노숙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지 않았다.
노숙자가 다음엔 무엇을 할지가 오히려 궁금했다.
떼구르르...
역시나 베트를 쥐었던 녀석도 다음순간 눈을 까뒤집고 얼굴을 아스팔트에 갈고 있었다.
부러진 베트가 바닥을 굴렀다.
“고...고맙습니다?”
아가씨도 그저 얼떨떨한 듯 보였다.
노숙자를 공격하려던 녀석들이 제풀에 갑자기 쓰러졌는데.
도무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가 없었던 것 이다.
“뭐.”
소주병에서 드디어 입을 뗀 노숙자가 쓰러져 있는 두 녀석을 슬쩍 보며 말한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 판단하는 족속들이 큰 코 다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