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S3 : 13화
강도들을 경찰들에게 넘긴 뒤 도착한 바.
“너무 늦었는데 그냥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만나기 이렇게 힘든데 아깝잖아요.”
반짝반짝 하는 주희의 눈.
에휴 쩝. 뭐 괜찮겠지?
뭔지는 잘 몰라도 술인지 음료수인지 희한하게 달다구리한 술을 삼키는 칠성과, 익숙한 듯 즐기고 있는 주희.
“진짜 신기해요. 가끔 칠성씨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잊고 산다니까요.”
“음? 뭐가.”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주희가 느끼는 감정은 묘했다.
정확히는 평소 김칠성의 모습과, 이번에 강도들을 제압 할 때의 모습도 그렇고, 예전에 김규형의 부하와 싸우던 모습도 그렇고.
이런 게 같은 사람의 모습 이라는 게 매치가 안 되는 것 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잖아요. 칠성씨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굉장히 험한 세계를 살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러면 뭔가 사람도 굉장히 심각해지고, 삭막해 질 것 같은데. 칠성씨는 전혀 안 그러잖아요. 오히려 어쩐지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치고....”
“흠.”
주희의 평을 들은 칠성이 목을 긁었다.
“뭐, 그런 거 다 소용없더라고.”
그랬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 더 살아본 결과.
“내가 심각한 척, 세상 고민 다 안고 있는 척 해봐야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거든.”
천진난만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정말로 세상을 모르거나.
“그러니까 웃는 거야. 심각하게 꽁 하고 있으면 나만 손해거든.”
어지간히 세상을 아는 사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슬그머니,
또 오래된 기억이 고개를 든다.
이세계에서 겪은 추억들과 악몽의 혼재된 기억이.
쩝, 입맛이 쓰다.
“달달하네. 이거 한 잔 더!”
그렇게 술을 들이키는 칠성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김주희는 칠성을 반짝 반짝 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오올....’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 감탄하는 주희.
‘멋있어.’
손에 턱을 괴고 칠성을 바라본다.
그러던 와중에.
“어? 한솜이씨!”
반갑게 손을 들며 누군가를 부르는 칠성.
‘뭐? 그 여자가 여기에?’
깜짝 놀라 칠성이 부른 방향 쪽을 보니 입구에서 금발을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자 슬쩍 무관심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금발을 한 사람.
한 눈에도 우락부락 하게 생긴 남자다.
‘전혀 아니잖아!’
삐끗.
황당하네.
괴었던 턱을 놓치는 바람에 거의 넘어질 뻔한 주희.
“아~ 뭐야. 헷갈렸네. 허허허.”
대수롭지 않은 듯 머리를 긁으며 넘기는 칠성.
하지만.
트득.
자기도 모르게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이 조금 터진 주희.
‘환장하겠네.’
자기가 가지고 싶어서 못 가져본 게 별로 없는 주희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런 근성이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재능이 좀 있을 뿐인 말단 디자이너에서 세계적인 패션 그룹 JH를 키워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남자는 자꾸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 거 같다가도, 뜬금없이 교통사고 같은 불안감이 덮쳐온다.
“어, 피나.”
그렇게 말하며 냅킨을 하나 접어서 주희에게 주는 김칠성.
주희는 일부러 손으로 받지 않고 피가 흐르는 입술을 그대로 둔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손으로 주희의 입술을 닦아주는 칠성.
“한솜이씨랑은 어떤 사이에요?”
툭, 던지듯 나온 주희의 물음.
“응? 뭐... 내가 원래 한솜이씨가 있는 3팀으로 헌특부에 들어가기도 했고...”
그런 게 궁금한 게 아니다.
“잤어요?”
“예?!”
당황해서 존댓말이 나온 김칠성.
‘그럼 그렇지.’
마치,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생글 눈웃음을 짓는 주희.
“아니, 아니. 내가 뭐래. 취했나 봐요. 히힛.”
그럼 방법이 있지.
확정타를 찍을 차례다.
* * *
같은 날 퇴근시간 전 무렵.
수헌부 3팀 사무실에 있던 지우혁.
[링 마이벨~ 링 마이벨~]
핸드폰이 울린다.
눈치를 보며 핸드폰을 받으며 복도로 나온 지우혁.
“나경씨?”
하나경이다.
[뭐 하고 있었어요?]
전화기에서 입을 때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지우혁.
“예? 아. 뭐 저야 공부하고 있었죠.”
하나경한테 자기는 공무원 준비를 하는 공무원 지망생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회사에서 퇴근시간까지 시간 죽이고 있었다고야 할 수 없고,
적당한 시나리오를 돌려 쓸 수 밖에.
[공부하는데 막 핸드폰 받고 이래도 돼요?]
“네에?”
아니, 뭐 맞는 말 이기야 하다만. 자기가 해 놓고?
[하하하하. 농담~. 저번에 말 한 도서관 이예요?]
“네. 그렇죠 뭐.”
[안 그래도 그럴 줄 알고. 가는 중 이예요!]
“예에?!”
[기다리고 있어요! 곧 도착하니까.]
“어, 언제, 언제요?”
[한 삼십분?]
다급하게 시계를 확인하는 지우혁.
이런, 퇴근시간이 한 시간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크으...’
반차쓰기 죽어도 아깝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하나경과의 이 관계를 망치고 싶진 않다.
업보다.
백수인 척 하기도 힘들구나!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는 지우혁.
“아,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고 달리기 시작하는 지우혁.
털컹!
“야, 우리 반차 어떻게 쓰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시름시름 사무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김태홍에게 묻는다.
“반차...? 야간 팀이 내 줘야 하는 거잖아 우리는.”
업무의 특수성 상. 휴가도, 월차도 쓰기 힘들다.
헌터란 건 대체하기 힘든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다만 반차 정도는 나름 융통성 있게 돌아가는 중 이었다.
그것도 해당 근무시간을 대신 해 줄 인력이 있을 때 말이다.
“야간 팀한테 확인하고. 팀장님한테 보고하고. 근데 웬 반차야? 지금 한 시간만 있으면 퇴근인데?”
“아~ 몰라! 그런 일이 있어!”
머리를 벅벅 긁고서 재킷과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뛰쳐나가는 지우혁.
잠시 뒤.
“어, 우혁씨~”
도서관 쪽으로 다가오던 하나경이 지우혁을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아...안녕!”
도서관 앞 벤치 근처에서 지우혁이 어쩐지 헉헉 대며, 넥타이를 목에서 풀고 있다.
“풉, 왜 그렇게 숨이 차요?”
“아, 운동. 운동을 좀 하느라....”
뻘뻘 땀을 닦는 지우혁.
“와아, 우혁씨 이렇게 입고 공부해요?”
하나경이 감탄하며 지우혁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네?”
그러고 보니 깔끔한 검은 정장바지.
풀어 헤쳤지만 새하얀 남방.
공무원 고시 공부하는 학생의 복장이라기엔 좀 과하다.
“그, 그런데 웬일 이예요?”
몇 번 만나긴 했지만 미리 약속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적은 없는데.
“나, 됐어요.”
그렇게 말을 던지곤 두 손을 모아 턱밑에 댄 채 지우혁의 반응을 기다리는 하나경.
“됐다고요?”
씨익 웃으며 끄덕끄덕 해 보이는 하나경.
“아 진짜?! 와!”
이제야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고 아리까리하던 표정이 확 피는 지우혁.
원하던 유치원에 정교사로 합격이 된 것이다.
“꺄~”
“잘됐다아~”
그런 지우혁을 양 손으로 잡고 빙글 빙글 돌며 뛰는 하나경. 그에 맞추어 같이 겅중겅중 뛰어주는 지우혁.
“완전 잘 됐죠!”
“나경씨는 될 줄 알았어요.”
“헤헤.”
“이제 선생님이네 선생님!”
뿌듯한 표정으로 하나경을 내려다보는 지우혁.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내가 다 사줄게.”
지우혁을 보며 묻는 하나경.
자기가 무슨 돈이 있다고.
“월급 들어오면 사줘요. 들어오면.”
“에이! 뭐 곧 들어올 건데! 기분이다. 내가 쏜다!”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돌격하는 하나경.
그런 하나경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지우혁.
이제... 괜찮겠지?
짤그락 거리는 자신의 자동차 키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린다.
“저기 잠깐만!”
지우혁이 하나경을 불러 세운다.
잠시 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
메뉴판을 받아들고 살피던 하나경이 기겁을 한다.
“히익. 세상에, 여긴 너무 비싼 데 아니 예요? 나를 얼마나 벗겨먹으려고...”
“풉.”
그런 하나경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지우혁.
아니 내가, 벗겨 먹으려고 데려왔을 리가.
“크크크... 걱정 말고 골라요. 내가 사는 거니까.”
“아니아니, 우리 나가요. 이런데 쓸데없이 비싸기만 하고...”
“에이, 쓸데없긴요? 가끔씩 이런데서 분위기도 내 주고 해야죠.”
“...우혁씨 금수저?”
“예?”
“아니 차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고. 백수가 이런 돈이 어디서 나겠어요?”
“아~. 음....”
이제, 말할 타이밍이 된 거 같다.
“사실, 저 백수 아니예요.”
“네?”
“돈 잘 벌어요. 헌터거든요.”
그렇게 말 하며 주머니에서 수호헌터부 사원증을 꺼내 보여주는 지우혁.
“어...? 이게.....”
뜬금없는 지우혁의 고백, 그리고 자신의 코 앞에 들이밀어 지는 사원증.
사원증을 받아들고 멍하니 지우혁과 사원증을 번갈아 보는 하나경.
“아...”
멍하니 벌리고 있던 입을 다문다.
“나경씨도 백수 남친 보단 헌터가 좋죠?”
씨익 웃으며 묻는 지우혁.
어떤가. 전형적인 백설공주 형태의 드라마 속 백마탄 왕자가 아닌가.
그런데 어쩐지 혼란스러운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하나경.
“좋죠!”
이내 밝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죠? 어휴, 난 또 십년 감수했지 뭐예요. 혹시...”
지우혁이 한숨까지 몰아쉬며 긴장감을 닦아낼 때.
드르륵.
의자를 밀치며 일어나는 하나경.
“그런데 나는 그런 남친 없거든요? 그게 문제네!”
“나경씨?!”
훽 돌아서는 하나경을 벌떡 일어난 지우혁이 잡는다.
무슨 말을 해야 되지?
“아니 내가, 나쁜 의도로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외면하던 하나경이 그 말에 지우혁을 향해 돌아선다.
“나쁜 의도 아니니까. 내가 박수치며 좋아하기라도 할 줄 알았어요?”
이글거리는 하나경의 눈빛에서 읽히는 것.
다름 아닌 배신감.
지우혁의 손을 뿌리치는 하나경.
한 발짝 걷는데.
“아니, 깝깝하네! 지금 내가 백수 아니라고, 돈 잘 번다고 차겠다는 거예요?”
“후.”
열이 받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 지우혁에게로 돌아서, 짧은 키를 까치발 든 채 지우혁을 노려본다.
“그 문제 아니라는 거, 제일 잘 아시죠?”
강렬한 눈빛이 마주친다.
꿀꺽.
할 말이 없어서 입만 뻐끔 거리는 지우혁.
그러곤 훽 돌아서 순식간에 걸어 나가 버린다.
주문을 받으려고 다가오던 웨이터가 당황해서 길을 비켜준다.
“아니 겨우 이깟 일로 나랑 깨진단 거예요?”
제정신이 들었는지 하나경 뒤로 소리 지르는 지우혁.
“깨진다는 것도 이상하네요! 당신이랑 내가 무슨 사이이기나 했나요?”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소리를 지른 하나경이 레스토랑 문을 넘어 사라져 버린다.
“참...내.”
울컥한 지우혁이 물을 들이 키고 넥타이를 풀어 제치며 재킷을 챙겨 나서려는데.
“뭡니까?”
웨이터가 앞을 막아선다.
“아, 손님. 물 값....”
“아이씨! 젠장.”
성질을 내며 지폐를 계산서에 끼워서 건네주는 지우혁.
“쓸데없이 비싸기만 해서...”
하나경이 사라진 곳을 향한 눈, 못 마땅한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