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S3 : 10화
김소령의 소개가 이어진다.
“네 그럼,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개발팀을 이끌어 주실 연구 수석 정명석님입니다.”
검은 후드 밑으로 빛나는 눈빛의 정체는,
김칠성과 싸우다 도망친,
한 때 안희운의 부하이기도 했던 흑마술사 정명석이다.
190cm 정도나 되는 키, 창백한 피부톤에 빡빡 민 머리.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험상궂게 생긴 인상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안녕하십니까.. 정명석입니다.”
슬쩍 목례를 하는 정명석.
“정명석님은 세계 5대 헌터 스쿨중 하나인 필리핀의 아세안 헌터 스쿨 출신이시고요...”
“중퇴입니다.”
정명석이 김소령의 설명을 끊었다.
“아 예, 그러시고 최근엔 영국의 마법사 집단 황금새벽회의 마법사로 등록 되어 있으시기도 하고요. 그. 소위 유학파다. 이렇게 생각 하시면 되겠습니다.”
유학파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오호.’ ‘그렇구만’ 하는 납득하는 반응들이 끄덕끄덕 퍼졌다.
하지만 좀 아는 사람이 보기엔 김소령의 설명은 터무니가 없는 설명이었다.
던전테크놀러지는 사실 공학의 한 분야로 취급 되는 게 정설이었다.
각종 공대엔 던전테크놀러지 전공들이 개설되고 있었다.
그래서 마법사 보다는 이공계 출신의 연구진이 대부분 이었다.
단순히 헌터 스쿨에서 마법 훈련을 받은 사람을 연구원으로 쓰기엔 무리가 있다는 소리다.
한술 더 떠 애시 당초 황금 새벽회는 아예 국가와 연결되어있는 조직조차 아니었다.
문과 몬스터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의 시대부터 의식 마법을 숭배하는 이들이 만들어서 모인 일종의 오컬트 집단.
요즘 시대에 들어서야 마법에 대한 전문성으로 재평가 될지 모르나 오히려 엮이는 게 꺼림칙한 사이비 종교집단에 가까운 이들 이었다.
모쪼록 한 국가의 정식 연구 인력으로 선 부적합한 이력.
그런데 이런 수상하기 한 이력을 가진 이가 김소령의 혀 위에서 소위 엘리트 ‘유학파’ 로 거듭나자 어째서 인지 납득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이다.
물론 장성들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 위주로 사람을 뽑아서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 은 당연히 아니다.
“또한 정명석 님은 흑마법사입니다. 수헌부 장관 김칠성 장관이 흑마법사 인건 아시죠? 같은 계열의 마법사 인 겁니다.”
그 차이는 우주의 행성과 먼지의 차이겠지만 말이다.
“오오오...”
어쩐지 같은 계열의 마법사란 이유만으로 여기저기서 기대의 음성이 터져 나온다.
“그럼 정명석씨, 슈퍼 병사 양성 계획에 대해서 설명 해 주시죠.”
김소령이 정명석에게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고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흐으음....”
정명석이 어떻게 말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청중을 둘러봤다.
“아, 쉽게 쉽게 해 주세요. 우린 그런 거 잘 모르니까.”
참모총장의 당부와 함께 너나 할 것 없이 껄껄 거리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 한 것 이다.
이걸로 정명석의 긴장이 풀려서 인지, 아니 애초에 긴장을 하고 있기나 했던 건 지나 모르겠지만 설명이 이어졌다.
“...소령님께서 슈퍼병사 양성 계획이라고 설명 하신 것은. 지옥의 힘을 끌어오는 방안입니다.”
“지옥의...라면?”
장성의 물음에 정명석의 가랑가랑한 목소리가 이어진다.“네. 생각하시는 그런 게 맞습니다. 제 특기는 의식마법인데, 악마의 힘을 빌려오는 방법에는 소환과 초환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중간계약으로 악마들의 본체가 아닌 매개체에 그 힘만 빌려오는 방법을 통해서....”
설명을 이어가던 정명석이 말을 멈추었다.
장성들이 모두 벙 찐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결과적으로. 장병들을 인간을 초월한 존재로 거듭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헌터들보다도 강해진다는 게 사실입니까?”
박중령이 타이밍 좋게 물었다.
이건 질문 이라기보다는 도움이었다.
“그렇습니다.”
정명석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술렁거리는 분위기가 가득해졌다.
긍정적인 술렁거림 이었다.
그런 술렁거림 속.
“정말 이 사람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 입니까?”
참모총장이 의심이 가는지 조용히 비서에게 물었다.
“글쎄요, 저도 아는바가....”
비서가 웅얼거리며 조심스레 대답하는 찰나.
“그럼요~ 맡겨만 주십시오.”
총장의 말을 엿들은 정명석이 자기가 질문을 낚아 채 대답한다.
“김칠성한테 이번에는 질 생각이 없으니까요.”
정명석의 올라간 입 꼬리 사이 드러난 치아가 번뜩인다.
꿀꺽.
정명석의 말에 좋게좋게 흘러가던 분위기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무슨 소리지?
새로운 육군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부른 연구 인력이 대뜸 다른 부의 장관을 이기겠다니.
그것도 ‘이번에는’?
꺼림직 한 분위기가 흐른 것도 잠시.
“아, 뭐 우리 육군이 이번에는 힘을 내서 수헌부 못지않은 성과를 내 보자! 이런 소리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아! 그렇지.”
“그럽시다! 김칠성 이깁시다!”
“이번 프로젝트는 타도 김칠성입니다! 하하하.”
대대장 박중령이 잽싸게 말마디를 붙이자 다시 순식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온다.
나랏님도 술자리에선 씹는다던데, 장난삼아 남의 장관 이름 막 부르는 게 문제랴.
“이번에야 말로....”
물론, 남 몰래 이를 가는 정명석의 가늘게 뜬 눈빛은 장난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한 20살 정도 이후부터 일 거다.
사람이 사람 자체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격적으로 판단받기 시작하는 것 은 말이다.
그때부터 대학 간판, 그 이후에는 직장, 그다음에는 연봉, 기타등등.
사실은 20살 이전에도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은연 중 평가받기 마련이지만, 그런 점은 가슴 아프니 잠시 넣어 두고 말이다.
어찌되었던 자기가 가진 게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대학 출신, 좋은 직장, 높은 연봉을 받을수록.
외제차를 끌고 넓은 집이 있을수록 노골적으로 좋은 평가가.
그 반대라면 노골적으로 나쁜 평가가 쏟아진다.
이건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하여간 대학 다닐 때 만 해도 같은 대학 학생들만 상대하니 잘 모르다가, 본격적으로 이런 사회의 생리에 피부가 닿도록 노출 되는 것은 대부분 20대 중후반.
그리고 마침 이 20대 중후반인 지우혁은 이런 사회의 생리에 요즘 들어 더 급속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럼 연봉은 얼마나...”
달칵.
잔에서 빨대에 밀려 돌아가던 얼음 조각이 멈추었다.
지우혁이 움직이던 빨대를 멈춘 것 이다.
장소는 흔히 볼 수 있는 국산 브랜드 커피 전문점의 한편.
빨대를 멈춘 지우혁이 눈을 들어 눈앞의 여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많이들 그러잖아요. 헌터들이 워낙 돈을 잘 번다고. 정말 그냥 궁금해서요.”
도시적인 미인이란 말이 깔끔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 미인상의 여자.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지우혁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하게 둘러댄다.
“아뇨, 그럴 수 있죠.”
20분? 인가.
결국 카페에 들어선 지 20분 만에 돈 얘기를 꺼낸 이번 소개팅 상대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지우혁.
요즘 들어 거의가 이런 식 이었다.
김주희와 김칠성에게 자극을 받은 것 일까.
하여간 최근 들어 외롭다며 이런저런 경로로 만나 본 여자들이 전부가 이렇다.
물론 소위 말하는 ‘어른들의’ 만남 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절차이니.
여자들이 돈을 밝혀서 그렇다기 보다는,
지우혁이 굉장히 어린 애 같은 사고방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엄연히 우리가 사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던가.
‘알고야 있지만은...’
씁쓸한 것은 어쩔 수 가 없는 것 이다.
더불어서 드는 생각은 자신이 헌터가 아니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것 같다는 의문.
사회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헌터란 직업이 가지는 이미지는 대게 두 가지.
첫째, 돈을 잘 번다더라.
둘째,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더라.
돈을 잘 버니까 인기가 좋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물론 애인으로서야?
얼굴이야 몰라도 몸짱은 기본인 데다,
돈까지 잘 버는 능력자들(초능력 말고!)이니 인기 만점.
결혼 상대로서는?
매번 여초 커뮤니티 등에 예비 신랑이 헌터라는 걱정의 고민 글들이 간간히 올라올 정도로.
딱히 인기 있는 직업군은 아니었다.
돈을 벌어다 주면 뭐 하나?
과부가 될 지도 모르는데.
[야, 어때 어때? 이쁘지?]
수화기 너머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우혁은 괜히 성질이 나 길가의 돌맹이 하나를 발로 찬다.
“에휴~ 텄다 야.”
푸념하듯 한숨을 쉬며 말 하는 지우혁.
그런 지우혁 옆에서.
“나 아직 옆에 있거든요?”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가 지우혁의 통화를 듣고,
황당하다는 일그러진 눈썹으로 지우혁을 쨍 하게 노려보는 지우혁의 소개팅 녀.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별 꼴이야 진짜!”
통화 중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소개팅 녀의 존재도 잊고 본심이 나와서 당황하는 지우혁.
지우혁 반대 방향으로 훽 돌아서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소개팅녀.
“아니 그게, 지혜씨? 아..아니 예지씨?”
하도 소개팅을 했더니 상대방 이름도 헷갈린다.
불러 세우는 지우혁을 또다시 쨍 한 눈빛으로 째려본다.
“아..아니 그게 아니고 지현씨...? 제가 태워다 드릴 게요?”
마음이 맞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이 예의라는 게 있으니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부르는 지우혁.
“그냥 돌담에 머리 박고 뒈지세요!”
틀렸나 보다.
마치 침을 뱉듯 악담을 뱉고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지우혁.
“에휴.”
역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한숨을 폭 내쉬고는 깍지 낀 손을 뒷목에 붙이고 혼자서 걷기 시작한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상대 붙잡아서 뭐 하겠는가.
그래서, 핑계라면 핑계로 최근에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번에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인 것 인지도 몰랐다.
마침, 비번인 날 이었고.
그리고, 지우혁이 기다리던 액션 영화의 개봉일 이었다.
거기다, 평일인지라 점심시간 무렵에 가면 사람도 별로 없이 쾌적하게 영화 구경을 하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냥 운동용 저지에. 영화 보다는 조깅을 가는 듯한 복장으로 슬렁슬렁 영화관에 도착해 표를 끊었다.
팝콘과 콜라를 사서 극장에 들어가니 한산한 곳에 사람들이 따문따문 앉아있었다.
지우혁 옆에는 2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앉았다.
저도 남자인지라 반사적으로 외모를 평가한 지우혁의 눈에는 괜찮게 생겼다.
꾸미면 예쁠 것 같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이 여자.
‘아니 왜 내 팝콘 먹어?’
영화가 한창 진행되는 중 이라서 크게 뭐라고 하기 도 그렇고.
그런데 이 여자가 정말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우혁의 팝콘을 집어 먹는 것 이다.
거기다 심지어.
‘어허, 적반하장까지?’
지우혁이 팝콘을 먹으려고 손을 넣다가 그 여자의 손과 부딪히자 무시무시한 눈으로 지우혁을 째려보는 것 이다.
크고 땡글땡글한 사슴 같은 눈은 당장이라도 지우혁을 밟아 죽일 사슴같이 타올랐다.
‘뭐야 진짜.’
하여간 열 받으면 나만 손해다.
어차피 몇 푼 하지도 않는 거. 먹을 테면 먹으라지.
처음부터 다 먹을 생각을 하고 산 것도 아닌데.
쿨 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 한 지우혁은 영화에 집중했다.
여자도 자기 나름의 타협(?)을 했는지, 지우혁이 팝콘을 집어먹어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파하하하하.”
“깔깔깔깔.”
액션과 코미디가 적절하게 배합된 영화는 그야말로 재미 만점 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이의 사람들 이었지만 함께 웃고 나니 어쩐지 친해진 기분까지 들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이 나고 지우혁이 영화관을 나서려고 할 때 였다.
“세상에, 미쳤나봐!”
작은 비명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누군가가 열심히 달려와 지우혁의 뒤를 잡는다.
“저, 저기요!”
지우혁의 팝콘을 집어먹었던 여자다.
“뭐요. 이제 팝콘 없는데?”
지우혁이 뚱 하게 묻자 여자가 미안해 죽을 듯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지우혁 앞으로 들어 보인다.
“그러니까 이게...하하하.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날려 보내는 여자가 들고 있는 것,
가득 차 있는 손도 대지 않은 팝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