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S2 : 22화
김규형이 옥상에서 추락하고 난 뒤에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호텔에 붙잡혀 있던 인질들은 구울과 김규형의 일당, 헌터들이 뒤얽힌 난 전 속에서도 다행히 별다른 부상자나 사상자 없이 전원 무사히 구출되어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아직도 고기를 못 먹겠어.”
사건이 있은 지 한참 뒤의 직원 식당에서 이런 말과 함께 수저를 놓은 여직원처럼 의외의 휴우증을 겪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말 이다.
김규형의 조직원 전체는 헌터/ 비헌터를 가리지 않고 검거 되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김규형...님이?”
철창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택배기사로 변장했던 궁수가 중얼거린다.
“고작 그런 놈한테?”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여 격투가가 빠드득 이를 간다.
차원을 넘고 넘어 김규형을 따라온 세 명의 독실한 추종자들은 아직도 현 사태를 믿지 못 하는 것 같지만 말 이다.
칠성과 합을 맞추어 김규형의 일당을 좇는 데 판춘봉은 의외라면 의외고, 클리셰라면 클리셰 적인 장소인. 한 건물의 뒤편 커다란 쓰레기통 속 에서 발견되었다.
온몸이 밧줄로 포박당하고 덕테이프로 눈과 귀가 봉해진 판충봉을 다행히도 쓰레기통을 비우려던 청소부가 발견했다.
판춘봉은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말로 재수가 없었다면 쓰레기통에서 수거 차량으로, 수거 차량에서 쓰레기 매립지 까지 하염없이 흘러갔을 것 이다.
뭐, 재활용 쓰레기가 아니니 재활용 당하진 않았겠지만 말 이다.
“에휴 썩을, 남자 새끼가 간이 콩알 만 해 가지고.”
“아! 그럼 어떡해요. 그 놈 무서운 거 알잖아요.”
그렇게 자기 잘못은 없다는 듯 변명조로 말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칠성에게 쓴 적 없었던 존대를 하는 판춘봉.
미안한 걸 알긴 아나?
김규형전의 후반부, 티브이, 개인 휴대폰 등 미디어 채널에 김규형의 방송을 송신한 것은 어떤 연금술이나, 마법의 기술이 아닌 판춘봉의 해킹 기술이었던 것 이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긴...했네?”
정말 의외로,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 싶은 건 가차 없이 치우는 김규형이 협조하면 목숨은 보존 해 주겠다는 판춘봉과의 약속을 지킨 것 이다.
그냥 악당이라기보다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게 더 무서운 거지만.’
“그리고...이거요.”
판춘봉이 칠성에게 내 민 것은 USB였다.
도금된 바디에 검은색 꽃문양이 들어가 있는, 나름 고급스럽다고 만들었는데 디자인에 대한 감각은 썩 훌륭해 보이지 않는 USB.
“이게 뭔데?”
“‘익명의 사자들’ 이요.”
“뭐?”
칠성은 반문하며 USB를 다시금 살폈다.
“뭐, 보안키 같은 건가?”
“아니요. 프로그램 전체. 라고 할 수 있죠.”
“아니, 여기에 그 프로그램이 다 들어갔다고?”
익명의 사자들. 판춘봉이 오랜 기간 설계하고, 김칠성이 현실로 옮기도록 투자해 준 프로그램.
25명?의 자가 학습형 인공지능 A.I 들이 인터넷 세상의 보안 장벽들을 뛰어넘어 다니며 증거를 물색하고 범인을 추적하는 일종의 인공지능 형사팀.
다만 그걸 구동할 설비를 마련 해 준다고 억대의 돈을 끌어다 쓴 칠성의 입장에서, 그 프로그램이 고작 USB 하나에 들어가 있다는 게 이상하니 따질 수밖에 없는 것 이다.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쉽게 설명 해 보면요, 중요한건 걔들이 자가 학습형 인공지능 이란 거예요.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됐지만 얘들은 이미 제 해킹 기술을 뛰어넘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만든 너보다 만들어진 프로그램이 더 대단하다고?”
“네 황당하게 들릴 건 아는데... 하여간 얘들은 물리적 저장장치나 특정 PC등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까지 찾았어요. 전 못했던 건데 말이죠.”
프로그램인데 컴퓨터에 저장을 안 해도 된다고?
“...계속 해 봐.”
“쉽게 말해서 얘들은 이제 프로그램이란 형태를 뛰어넘어서 인터넷 선을 타고 자기들 멋대로 떠돌고 있어요. 각자 흥미 있는 것들을 찾아서 말이죠.”
시키는 일을 하는 것 도 아니고 자기가 흥미 있는 걸 찾아서 흩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프로그램이 무슨....”
“...사람도 아니고. 그죠? 바로 그 부분 이예요.”
칠성의 말끝을 춘봉이 잡아챘다.
몇 번을 들어도 꿈같은 이야기에 칠성은 그냥 두 손을 들었다.
“됐고, 그래서 이게 뭔데?”
칠성이 USB를 춘봉에게 들이밀며 물었다.
“걔들을 불러올 수 있는 호출 장치요. ‘만들어 준 은혜를 갚겠다’ 나... 그리고 그것보다도.”
“뭐.”
“...걔들은 이번 일을 ‘옳다’고 판단했어요. 자신들이 김규형 일당을 검거하는데 힘을 보탠 것을요. 그래서 자기들 판단에 ‘옳은’ 일이라면 얼마든지 힘을 빌려주겠다고요.”
“이게 무슨....”
이제 프로그램이 사람이 하는 일을 판단까지 하겠다고?
칠성은 USB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감당이 안 돼요 그런 거. 당신이라면 모르겠죠.”
판춘봉은 자신이 설계한 프로그램을 처음 실행 시키는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직감적으로 느꼈다.
절대적인 해킹능력을 가진, 끝도 없이 발전하는 A.I 해킹 집단을 만들어 낸 것 이다.
정보는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건 그런 범주를 뛰어 넘는 것 이었다.
이 세상에 힘을 갈망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무엇보다 이것을 탐내야 현명하다 할 만 했다.
그런데 심지어 자신의 손으로 100% 통제가 되는 것 도 아니다.
거기다 그들의 행동을 100% 예측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확신 할 수 있었다. 왜냐면....
‘내가 김규형을 도울 때 방해가 없었어.’
그들이 정의, 혹은 옳다고 생각하는 범주를 판춘봉도 가늠 할 수 없었다.
마치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판춘봉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길 없는 정보세상의 슈퍼맨을 무더기로 만들어 낸 것 이다.
자기가 만들어 냈지만 감당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차라리 김칠성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자신은 이 일에서 완전히 손 땔 생각이었다.
그리고...
“김규형을 추적할 때, 김규형이 숨겨둔 창고 같은 걸 찾았는데 말야.”
“뭔데.”
판춘봉이 칠성을 이끌고 간 곳은 경기도 근처의 한 회사 건물 이었다.
김규형과 연관이 있던 산하 회사였는데.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유령회사였다.
그리고 그 회사 건물 지하실의 붉은 문 앞.
“김규형이 연금술사라고 그랬던가...?”
판춘봉이 문을 따며 중얼 거리 듯 물었다.
“무슨 소리야.”
끼-익.
이윽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에 등장한건 보고도 믿기 힘든 관경이었다.
60여 평 쯤 되는 공간일까?
그 공간에 사람 두어명 지나갈 정도의 통로 같은 간극을 제외하곤 명치 높이까지 가득 금괴가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씨발.”황금의 무더기를 보고 칠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욕지기가 아니었다. 최상급의 감탄 표현이었다.
칠성의 머릿속에 금에 대한 시세표가 붙어있는 것 은 아니지만, 이건 농담으로라도 너무 많은 양 이다.
“이거... 어째야 돼?”
판춘봉은 자기가 캐낸 금광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얼떨떨한 시선으로 눈썹을 긁고 있을 뿐 이었다.
“...나한테 넘겨라.”
눈을 가늘게 뜬 칠성이 머리를 굴리며 말했다.
“뭐? 나도 내 몫은 챙겨야...”
“아니, 너 어차피 이거 소화 못 하잖아.”
품질 보증 서 하나 없는 출처가 불분명한 금덩이들. 써먹는 것도 일 이었다.
“너는 뭐 소화 할 방법 있고?”
“...어.”
칠성의 머릿속엔 이 소식에 그 누구보다도 눈을 빛낼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란 말 한마디에도 눈을 별처럼 빛내던 사람. 대통령.
“어떻게 던 될 거다. 너도 떼어 줄 거니까 걱정 말고.”
춘봉이 의심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해 보인다.
일들은 이렇게 처리 되어 가고,
온갖 진상들은 다 처리 되었는데도 처리되지 않는 이 진상.
“가르침을 주십시오. 스승님!!”
“하아...”
언제 볶은 건지 주황의 파마한 폭탄머리가 되어서 앞길을 가로막는 이 진상. 김태홍.
“일 없다니까.”
돌아서는 칠성을 붙잡는 김태홍.
“너...”
뒤돌아서 면박 주려는데, 김태홍의 표정이 이전과 조금 다르다.
뭐지?
“이렇게 까지 하긴 싫지만요, 자꾸 이러시면 저도 별 수 없습니다.”
“뭔 소리야?”
“저 헌터스쿨 출신인 건 아시죠?”
그래, 안다.
이 녀석이 이상하게도 최약체 이미지지만, 사실은 학력 등만 보면 헌터 계에선 나름 엘리트라는 사실.
“그래서?”
“제가 콜럼비아 헌터스쿨 출신이거든요.”
의미심장하게 말을 잇는 김태홍.
어라? 콜럼비아 헌터스쿨...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청문회에서 장관님이 졸업했다고 한 그 학교요! 선후배들한테 싹 다 연락 돌려봤는데 당신 본 사람이 없드만!”
* * *
“지금부터 내가 차곡차곡 장관님 학력 위조 증거물들 모으고 다니면, 감당 하실 수 있겠어요?”
칠성이 돌아서자 김태홍은 이제 여유다.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눈을 치켜뜨는 것 이다.
“장관님이 장관 하는 거에 불만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알고는 있지, 지들이 누구 덕분에 그렇게 살 수 있는 지도 모를 배은망덕 한 새끼들.
그리고 배은망덕 이전에 정치인 놈들은 대게가 사람이 아니니까.
그거야 그렇다 치고.
“너 지금 나 협박하냐?”
기분 나쁘네 새끼가.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아는 동생이라고 진상 짓 좀 하더라도 봐줬더니.
“글세~요? 진실을 밝히는 게 왜 협박이죠? 네?”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선 한쪽 입 꼬리를 씨익 올려 보이며 칠성 쪽을 아래위로 훑는다.
아 놔, 저 새키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웠데.
칠성은 머리가 지끈 아팠지만, 김태홍이 저런 태도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김칠성은 이미 어떤 부분에선 김태홍의 스승이었던 것 이다.
사실 김태홍이 진심으로 협박을 하건 말건, 그건 큰 관계도 없었다.
김태홍에게 얼마나 물같이 보였는 지야 모르겠지만 김칠성은 문자 그대로 장관이다.
약간의 추문 정도야 덮는 건 어렵지도 않고, 나아가서 김태홍을 묻어버리는 것 정도도 간단할 터다.
더군다나 서로 티격 대긴 했지만 명백하게 대통령 진영과 같은 편이다.
김태홍이 야심차게 준비한 카드는 사실 공룡을 상대하기 위해 갈고닦은 이쑤시개를 공룡 앞에서 꺼내 든 격 일 뿐 인 것이다.
그런 것보다도 칠성이 궁금한 것은 이거였다.
“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김태홍의 촉대로 김칠성은 훌륭한 스승감이 맞다.
물론 훌륭한 스승의 조건을 어떤 부분으로 잡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겠지만.
지구에 있는 그 어떤 마법 선생 보다야 칠성의 경험치가 압도적이다.
그래서 우연히 그 사실을 깨달은 김태홍이 제자로 삼아달라고 매달렸다고 치자.
젊은 혈기에 진상짓 해 가며 매달려 보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협박까지?
김태홍은 바보가 아니다.
진심으로 김칠성을 협박해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 할 만큼의 천치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짓이라도 벌이지 않고는 견딜 수 가 없었단 소리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절실하게 매달리는가?
“힘을 원합니다!! 강한 힘을!!”
김태홍은 칠성의 질문에 너무나도 분명하고 불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그리고 그 대답에 칠성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뭐어? 힘을 원해? 지랄하네. 네가 무슨 소년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대체 진짜 이러는 이유가 뭔데?”
정곡이다.
현실은 현실이다.
무슨 격투기 만화 주인공처럼 뜬금없이 힘을 갈망하는 정신이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태홍은 이미 헌특부 최고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는 상비 레이드팀 헌터다.
더 이상 힘을 키운다고 해서 올라갈 자리가 없다.
떠벌 거리고 즉답하기 바쁘던 김태홍의 말문이 순간 턱 막힌 것이 정곡이라는 증거였다.
결과물을 말할 뿐 원인을 말한 적은 없다.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다.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말 해 봐. 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가짜는 제자 비슷한 걸로도 받을 수 없으니까.”
김태홍은 어쩐지 조금 전의 통통 튀고, 건방지고, 겁 없던 기색을 지우고 바닥을 바라보며 착잡한 분위기에 빠져든다.
가벼운 한숨을 뱉은 김태홍이 칠성을 보며 묻는다.
“한 대 하실래요?”
김태홍이 품에서 꺼낸 것은 담배다.
칠성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 해 보인다.
헌특부 사옥의, 환풍구가 돌아가고 있는, 옥상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조그마한 공간.
김칠성은 이미 꼬나문 담배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고,
김태홍이 막 불붙인 담배를 쭈욱 빨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