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S2 : 2화
* * *
“업무들 봅시다!”
칠성과의 인사가 끝난 로비,
뿔뿔이 흩어 지는 분위기.
칠성이 떠나고 난 자리,
한솜이는 심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칠성은 착각했지만 한솜이가 보낸 눈빛은 경외감 이라던가, 다른 세계의 사람을 보는 그런 존경심 어린 눈빛이 아니었다.
‘아 진짜.’
한솜이는 심란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 이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칠성에게 꽂히다니.
시작은 자신을 걱정 해 주던 모습이다.
안아 올린 건 둘째 문제고, 나직한 ‘괜찮아?’ 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이건 솔직히 칠성의 의도와 상관없이 충분히 멋있어 보일 수 있는 상황이니 그렇다 치자.
기분을 전환 해 보려고 머리까지 바꿨다.
머리가 식었다고 생각하고 별 부담 없이 출근했는데~왜?
직접 보니까 또 심장이 쿵! 하는 게 아닌가.
찬찬히 뜯어보면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어떤 미남을 볼 때 보다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서 무진장 억울하다.
“괜히 바꿨나?”
애꿎은 머리칼만 꼬며 만지작거리는 한솜이였다.
* * *
같은 시각,
칠성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은 한솜이 만은 아니었다.
모 패션회사.
흰색의 반질거리는 마감재로 번뜩하게 꾸며둔 수백평 규모의 사무실, 통유리 벽으로 방들이 나누어 져 있는 곳곳에 직원들 책상이 파티션과 함께 세워져있다.
마네킹을 옮기는 직원, 컴퓨터로 모델의 사진을 편집하고 있는 직원, 잔뜩 쌓인 서류 더미들 속에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직원.
파일로 정리된 무거운 사진첩들을 낑낑 대며 옮기는 갈색 롱헤어를 하나로 묶은 여직원을 따라 가 보면 마네킹에 피팅 해 둔 옷들을 두고 토의중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파스텔톤의 스웨트 셔츠를 베이스로 귀여운 이미지 중심의 라인업이고요...”
흰색 남방에 금색 장신구, 염소수염에 동그란 뿔테안경을 쓴 배불뚝이, 김정태 수석 디자이너가 설명을 이어간다.
주변에는 다른 디자이너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동그랗게 둘러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으며 경청한다.
오로지 펌이 들어간 단발에 회색 트랜치 코트로 멋을 낸. 기껏해야 20대 쯤 되 보이는 여자 디자이너만 팔짱을 끼고 한 손을 턱에 괸 채 못 마땅하단 눈으로 뚫어져라 마네킹을 노려보고 있을 뿐 이었다.
“이걸 지금 다음 달에 내겠다고요?”
“네, 네... 그렇습니다만.”
여자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을 것 같은 김정태 디자이너가 여자의 한 마디에 긴장했다.
“아니 아니, 좋은데 좋은데... 디자인은 좋은데. 판매 시기가. 다음 달이면 봄도 아니고 초여름인데 고객들이 이걸 산다 쳐 봐요, 한 보름? 입고 버리고 새로 사라는 거 아니예요?”
여자는 디자인 팀에게 만큼은 신적인 존재였다. 여자가 매우 차분하게 하나하나 조목조목 쏘아붙이자 김수석 디자이너가 우물쭈물 거리며 몸을 꼰다.
“뭐 꼭...궂이... 버리라고는... 예. 그렇죠.”
그 말에 여자가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짝다리를 짚고 몸을 좌 우로 흔들며 옷을 노려본다. 무언가 계산하듯 혼자 중얼거리기 까지 한다.
김수석은 물론 주변의 다른 직원들까지 초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아주 좋은 생각이예요!”
여자가 활짝 웃는다.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좌중의 분위기가 한숨과 함께 풀어진다.
순서를 이어가 이번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검은 톤의 옷.
“남성 라인은 고요하고 차분한 던(Dawn, 새벽) 톤을 루즈한 핏과 깔끔하고 심플한 디테일로 구현했습니다. 그리고...”
김수석 반대편에 있던 다른 남자 디자이너의 설명이 이어진다.
“너 지금 나하고 장난치니?”
디자이너의 말을 끊어먹은 회색 코트의 여자의 눈빛이 냉랭하게 빛난다.
다시 얼음장같이 굳어진 분위기.
“보그지 3월 여름추천 콜렉션 갭꺼. 표절을 해? 네가 지금 회사 이미지 병신 만들려고 작정을 했어?!”
칼날같이 쏘아낸 말에 일시정지 되었던 좌중이 패닉 상태에 돌입했다. 지적을 받은 디자이너는 얼음같이 굳었고 주변의 디자이너들은 물끓듯 수근대기 시작했다.
“3월 보그”
김수석이 자신의 옆에 있던 어시스트의 귓가에 소곤거리자 어시스트가 들고 있던 스마트 패드에 해당 사진을 띄워 보여준다.
과연 마네킹에 걸려있는 디자인과 유사한. 아니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모를까 디자이너의 눈으로 보면 빼도박도 못 할 표절이다.
“죄송...죄송합니다.”
표절 디자이너가 고개를 숙인다.
“뭐 어쩌자는 거야. 당장 네 멍청한 옷이랑 양심 없는 대가리 들고 꺼져!”
트랜치코트의 여자가 디자이너가 들고 있던 시안들을 뺏어 바닥에 내팽겨치며 소리 지른다.
남자가 주섬주섬 자신과 관련된 물건들을 챙겨 쭈뼛거리며 퇴장한다.
“후우... 김수석님.”
“예..예.”
“모니터링 좀 신경써서 해 주세요. 네?”
“예, 예...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쁘신 거 아는데, 괜히 수석이신 거 아니잖아. 저딴 게 나한테까지 오게 하면 어떡해요.”
김수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연신 고개를 숙일 뿐 이다.
“3일 남았으니까 시간 없어요. 남자 라인 빈 자리는 대충 저걸로 하죠. 나쁘지 않네.”
여자가 방 한켠에 있던 마네킹에 걸려있던 갈색톤의 옷을 가리킨다.
아무런 기대도 안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품이 선택된 것을 알고 좋아서 소리 없는 쾌재를 지른다.
옷의 점검이 끝나고 나서 무리가 해산하기 시작하자 처음의 갈색 롱헤어 직원이 애써 가져온 사진첩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음 달 잡지에 실을 거 확정 해주셔야 하는데요.”
여자가 사진첩을 펼쳐보이며 말을 걸자 회색 트랜치 코트의 여자는 걸어가는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사진첩을 직원에 손에 들린 채로 척척 펼쳐보이며 지시한다.
“8번, 19번, 32번, 44번, 47번. 47번 메인....”
“8번... 19번... 32번....”
롱헤어의 여직원이 팔뚝에 붙여둔 포스트잇에 펜으로 땀땀히 불러주는 번호들을 적는다.
“...이렇게 92번까지 해서 끊고요. 진아씨?”
“네. 넷?”
“머리도 좀 풀고요. 좀 꾸미고 다니라니까? 회사 이미지가 있는데. 머리 안감은 거 아니지?”
“넷...네....”
회색 코트의 여자가 직원의 머리를 풀어서 정리해 주다가 머리카락을 자신을 코에 대고 킁킁 거린다. 진아라고 불린 직원이 사진 파일을 양손으로 그러쥔 채 얼굴이 벌게진다.
“오늘도 회사 일 혼자 다 하시는군요?”
사무실 한편 사장실 앞에 서서 회색 트랜치 코트의 여자를 지켜보고 있던 검은 양복 차림의 멀쑥한 포마드 헤어의 중년 남자가 인사한다.
“아 안녕하세요. 진아씨 내가 말한 대로 확정하고. 가 봐요.”
중년 남자를 발견한 여자가 화색이 되더니 직원을 무른다. 두 사람의 태도를 보아 남자는 아마도 여자의 상사. 사장 쯤 되는 듯 하다.
“네.”
진아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사라진다.
사장실로 들어선 두 사람.
그런데 CEO 의자에 앉는 것은 중년의 남자가 아닌 트랜치 코트를 입은 디자이너, 주희다.
버튼을 조작하자 통유리 벽 전체에 검은색 블라인드가 자동으로 내려간다.
중년의 남자가 사장석 맞은 편 의자에 앉으며 말한다.
“아니 회사 이정도 키워 두셨으면 현장은 직원들에게 맡기셔도 되지 않습니까?”
“헤헤헤. 부장님 제 성격 아시면서? 커피? 카푸치노 맞죠?”
책상 한쪽의 폰으로 진아에게 커피를 사 오라며 지시하는 주희를 중년의 남자는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주희 역시 직원들에게 그토록 까칠하게 굴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다.
10대 후반에 이미 패션 업계에 뛰어들었다.
이십대 초반에 소위 ‘대박’ 이 터지고 세운 회사는 대한민국은 물론 아시아 전체지역에 지대한 파급력을 끼치는 패션 회사로 거듭났다.
매달 발행하는 패션지는 63개국으로 수출되고 있었고 오프라인 브랜드 매장도 유럽 진출을 막 시작하는 중 이었다.
CEO 김주희. 주희의 이름을 딴 JH 는 이미 패션계에 한 획을 긋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JH는 문어발식 경영으로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며 세를 점차 불려나가는 중 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JH산하 기업의 부장자리를 맡고 있는 기성남 부장. 기부장은 주희가 10대 시절 그 꼬물거리는 손으로 만들어 온 포트폴리오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성을 높게 평가 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주희가 성장해 오는 걸 꾸준히 지켜봐 온 기성남 부장에게도, 기성남 부장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 자신을 알아보고 꾸준히 믿어 주었음이 고마운 주희에게도 두 사람은 피만 섞이지 않았지 딸과 아버지 같은 관계였다.
“주희야. 저번에 말했던 거 준비 해 놨어. 그거 말해 주려고 왔지.”
“아. 정말요? 역시 삼촌밖에 없다니까. 헤헤”
“참 나, 그리 좋으냐? 그녀석이 뭐 길래 네가 이런 거 까지 신경 써서 챙겨줘?”
여자가 켜 둔 커다란 모니터 대기화면 화면 가득히 김칠성의 얼굴이 떠있다.
“내 백마 탄 기사님이라니까?”
김칠성을 향해 허공에 키스를 한다.
그러곤 부끄러운 듯 몸을 베베 꼬며 커피를 삼킨다.
“your the one....”
* * *
그리고 주희가 그러고 있을 때 즈음...
인천 월미도에 등장한 그린도어 던전 안.
거친 정글 같은 배경의 공간.
쿵, 쿵-!
순식간이었다.
유난히 긴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경차 크기의 개미핥기 형태의 몬스터 네기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아우 어깨야.”
김칠성이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스트레칭하며 꿍얼거렸다.
“바... 방금 그게...?”
김태홍이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몬스터가 등장하자마자 선봉으로 나선 김칠성이 순식간에 캐스팅도 없이 불러낸 10개의 다크 스피어가 김칠성이 팔을 허공에 휘두를 때 마다 몬스터들에게 날아가 단단한 몸통을 솜사탕처럼 쑤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폭발. 몬스터가 바닥에 눕게 되는 데에 체 몇 분 도 걸리지 않았다.
망설임도, 군더더기도 없다. 압도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야...! 이게 대체?”
지우혁 역시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름 프로 헌터로서 현장에서 몇몇 마법사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레벨의 마법사는 처음 본다.
정확히는, 뉴스라던가 소문을 통해 칠성이 흑마법을 쓴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야 했지만 눈으로 보니 또 이건 장난이 아니구나 싶다.
“아, 나중에 나중에.”
그러거나 말거나 칠성은 귀찮다는 듯 대답은 미뤄두고 몬스터의 시신에 접근한다.
칠성도 마냥 오래된 친구의 의문을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뜬금없이 이세계로 소환당해 600년간 있었다는 둥의 말을 할 수도 없고. 입장이 좀 애매 한 것이다. 대충 둘러대야지.
칠성은 개미핥기 같은 몬스터의 시신에 접근해 마석 정제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시신에서부터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라 그러모아진 마나의 흐름이 칠성의 손 끝 허공에서부터 신비로운 고체의 물질로 재탄생 하고 있었다.
연보랏빛의 마석은 처음엔 눈깔사탕 크기로 시작해 점차 산위에서 굴린 눈덩이처럼 덩치가 비대해 져 만 갔다.
“...허.”
김태홍이 바람 빠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몬스터 네기 에서 김칠성이 정제해 낸 마석의 크기는 네 개 합쳐서 마을버스 크기정도가 되도록 쌓여 있었던 것 이다.
아무리 마나가 풍부한 몬스터라도 태홍이 정제해 낼 수 있었던 마석의 크기는 손바닥 크기를 벗어나지 못 했는데, 정제술이 견고해 질수록 수확량이 는다는 것 은 상식이었으나 이건 대체 어느 정도 수준차이가 있는 것 인지 가늠이 안 될 지경인 것 이다.
“이야... 이건 진짜 대박인데.”
칠성도 칠성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었다.
여태껏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도어 속 몬스터로부터 제대로 마력추출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눈치 볼 것도 없겠다, 정말 작정하고 한 톨 한 톨 그러모아 정제를 하자 생각지도 못 했던 수준의 마석이 추출 된 것 이다.
‘무슨 가고일 같은 것을 죽인 것 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였다.
대게 생물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란 마나 수용량을 본격적으로 훈련하고, 마법적 방법으로 마나를 축척한 마법사가 아닌 바에야 덩치에 비례하는 것 이 상식이었다.
자신의 덩치보다 큰 마나를 지니고 있는 생물은 정말 드문 케이스였다.
거의 마법 친화적인 마법 생물로 불리는 신비의 존재들. 즉 드래곤으로 대표되는 녀석들이나 자신의 덩치보다 훨씬 큰 마나를 축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도어 속 몬스터들은 하나하나가 이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신비생물들 만큼의 마나를 축척하고 있는 것 이다.
“이건 로또다 로또.”
무엇보다 최고인 점은 가성비.
다크스피어 10기를 만들어 내는 데는 팔뚝 하나만한 마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수확량은 이정도. 드래곤 같은 신비생물을 잡는데 온갖 마법을 난사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거저먹기다.
아니 도대체가 말이 안 될 지경이다.
그래서 문득 드는 생각은...
‘키메라?’
인공생명체.
자연적으로 이런 생물이 존재할 리가 없다.
적어도 칠성의 상식에선 그랬다.
존재할 리 가 없는 게 존재하는 데 마냥 꿀 이라며 좋아할 것 은 아니다.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자면, 마법으로 만들거나 개조한다는 생명체 형태의 병기. 키메라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뭘 목적으로?’
키메라는 누군가가 만드는 것. 그렇다면 왜?
그러고 보면 도어는 형태부터가 좀 의심스럽다.
몬스터들의 소굴이 어찌해 사람에게 친화적인 문의 형태를 닮아 있는가?
물론, 이런 것들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지금 당장 꿀을 안 빨겠다는 건 아니지만.
“후후후후....”
칠성은 이차 정제술로 고압축마석, 칠성이 가지고 다니는 것 기준으로 한 개 반 분량을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엄청난 수확이다.
매 던전이 이런 식이라면 가히 마신의 심장이 부럽지 않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태홍은 확신이 들었다.
태홍이 어금니를 으득 문다.
마치 무언가 심각하게 따지기라도 하려는 기세로 칠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뭐야?”
칠성이 그 기세에 돌아보는데도 김태홍은 오히려 주먹을 꽉 쥐며 가속도를 높이며 칠성에게로 덤벼든다.
타타타탁!
넙죽.
“제자로 받아 주십시요!”
“뭐..뭐?”
매우 빠른 기세로 달려들어 큰절을 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린 김태홍에게 칠성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 제자로 받아 달라고요!”
“그런 거 안 키워!”
내가 미쳤냐? 귀찮게.
“아 치사하게! 받아달라고 형!”
태홍이 칠성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는다.
“아니 이 미친 새끼가! 급 친한 척 해도 안 받아줘!”
“아이 오빠!”
칠성이 기겁을 하며 발차기를 해 대지만 태홍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이 없다.
방년 24세 김태홍. 은근히, 판단력 하나로 살아온 인생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 김태홍의 판단력 세포 하나하나가 부들부들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김칠성의 제자가 되는 게 인생 최대 급 기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