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S1 : 14화
* * *
다음날.
칠성은 오전에는 조소장님을 도와 신규 몬스터 정보 작성에 협조했고 오후에는 긴급출동에 대비했다.
출동에 대비했다는 건 다시 말 하면 놀았다는 거다.
시간 때울 겸 시시콜콜한 게임을 하거나 컴퓨터로 드라마를 봐도 딱히 제재하는 사람도 없다.
일지작성, 도감작성, 팀원 기록부 등 찾자면 서류 업무가 없는 것 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펜대 굴리는 공무원처럼 책상 차려둔 것도 큰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까지나 실전이고 실력위주의 조직이었다.
특히나 칠성의 트레이닝을 담당하는 사수가 지우혁 이었기 때문에 더 멋 대로였다.
“1000억입니다. 1000억이요!”
“...재미있냐? 그게?”
“야 이게 장난 아니라니까?”
아까부터 지우혁이 빠져있는 드라마는 무슨 아줌마들이나 볼 법한,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멜로드라마 같은 것 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1000억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억~? 말이 되냐 저게?”
“하~ 새끼. 뭘 모르네. 정치인들 스케일이 네놈 같을 줄 아냐?”
그런 시시콜콜한 시간 죽이기를 하는 사이 체력 단련을 갔던 한솜이와 김태홍이 돌아왔다.
“아그~ 개운해!”
블라우스와 H라인 스커트, 전형적인 회사원 차림으로 트레이닝 백을 둘러맨 한솜이가 가뿐하게 기지개를 폈다.
“다녀...왔습니다.”
그 뒤를 따라 비실비실 사무실로 들어온 김태홍은 밝은 인상의 한솜이와는 대조적으로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채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아~ 진짜.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남자가 엄살은!”
“아그그극!”
한솜이가 김태홍의 등짝을 팡 치자 김태홍이 죽어가는 소리를 낸다.
“하간 멀었어요. 이제 매일 각오하세요! 제가 같이 해 드릴 테니까요.”
“예에....”
김태홍이 죽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당연히 기사와 마법사의 체력차이는 넘사벽이다.
언 듯 보면 체력단련을 핑계로 부하직원을 괴롭히는 상사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김태홍이 묵묵히 불만 없이 다 감내 하는 것 은 은연중에 한솜이가 왜 유난을 떠는지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근히 챙긴단 말야.’
지난 번 그린 그래스 레이드에서 김태홍이 일각의 차이로 거대 사마귀에게 목숨을 잃을 뻔 한 일이 있었기에 한솜이가 유난을 떠는 것 이다.
딴에 팀장이라고 굉장히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늘은 별 일 없이 지나갔네요.”
그 말 대로였다.
근무시간이 다 지나가도록 지령이 와야 할 헌터폰은 조용했다.
그리고 금요일 근무시간이 다 지나갔다는 말은~
“횝니까 고깁니까?”
“오늘은 회예요!”
회식이란 소리다.
* * *
“아~ 말도마세요 팀장님이 자기 따라오라면서 암벽등반을 올라가는데....”
“푸하하핫.”
전우애라고 할까.
일반 조직하고는 다르다.
칠성의 환영회를 명목으로 이어진 술자리는 끝도 없는 웃음소리로 계속되었다.
“아! 팀장님 노래 한 번 들어야죠!”
“아 정말 못한다니까요.”
“에이!”
지우혁을 필두로 띄우는 분위기에 한사코 빼던 한솜이가 결국 못 이기는 척 일어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정말로 수줍은지 조심스럽게 이어가는 가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예쁜 두 눈에 향기가 어려....”
* * *
회식 자리가 파 한 뒤,
버스 정류장.
“아 정신 좀 차려 봐요.”
“히힝.”
집 방향이 같다는 이유로 거나하게 취한 한솜이를 떠맡았다.
한솜이는 술집을 나선 뒤로 더 취기가 올라오는지 이제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 하고 있었다.
정류장의 벤치에 앉히고 일단 숨을 돌린다.
아니 왜 오늘따라 택시도 이렇게 없는 거야.
“내가 사람은 되게 잘 보는데....”
응?
눈으로 도로 위에 택시가 있나 좇고 있는데 한솜이가 그렇게 말 한다.
“믿어도 되는 거죠? 내 감이 그런데...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칠성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한솜이는 그런 말을 남기고는 스믈스믈 눈이 감기더니 그 대로 칠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아니 그거보다도
“참 나. 한솜이 팀장님. 정신 차려요. 예?”
흔들어 봐도 정신을 차릴 줄 모른다.
“에휴.”
팔자야.
취한 사람 바닥에 내팽겨 칠 수 도 없으니 잠깐 그대로 두기로 한다.
생긴 건 멀쩡한 여자가 말이야.
해가 지고, 어둠사이를 아스라이 비추는 벤치 근처의 가로등이 한솜이의 백금발 머리칼에 쬐여 반짝거린다.
멀쩡하게 생긴 곱상한 얼굴위로 벤치의 가로등 조명이 내려앉아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잠든 얼굴, 빛나는 피부에 귀여운 얼굴까지.
헌특부에서 간판으로 밀지 못 해 안달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마 그래서 언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겠지만, 정말인지 어디 가서 연예인이라도 해도 될 듯한 용모였다.
백옥같은 피부와 검고 긴 속눈썹.
체리빛깔의 살며시 벌어진 입술.
한솜이의 달큰한 채취가 코끝을 스쳤다.
‘보랏빛 향기 일려나?’
새근새근 한 숨소리.
언제나 늘 파이팅이 넘치는 한솜이.
그것이 무언가에 몰려서. 무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화려한 커리어에 가려져 있지만,
해봐야 고작 이십대 중반. 아직은 무언가를 책임지기 힘든 나이인데.
‘약한 여자의 몸으로’ 라고 생각하는걸 알면.
싫어하겠지?
나더러, 믿어도 되는 사람이냐고?
“휴....”
조용히 한숨을 내쉰 칠성.
스-윽.
‘어라?’
그때, 뭔가 쎄~ 한 감각이 스친다.
칠성이 재빨리 눈을 굴려서 확인하자 어두운 계통의 옷을 입은 남자 두 놈이 앞을 지나간다.
칠성과 한솜이 앞을 지나간 이인조. 문제는.
‘저 새끼들이 왜 여기 있어?’
저 두 놈이 일전에 칠성이 공원에서 애정 어린 교육을 실시하고 경찰에 넘겨줬던 ‘헌터 전문 강도’ 들 중 두 명이란 거다.
분명히 경찰한테 연락 받았던바 대로라도 경찰서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여기에?
찝찝하다.
“일어나 봐요.”
“응?”
칠성이 뺨을 툭툭 때리며 깨우자 부스스 눈을 뜬 한솜이가 반문했다.
“왜 그래요?”
“잠깐 뭐 좀... 알아봐야 겠어요.”
칠성이 몸을 슬며시 일으키며 그렇게 말 하자 저 쪽에서 슬금슬금 걸어가던 녀석 둘이 갑자기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걸음을 재촉하더니 이내 뛰기 시작한다.
“새끼들아 거기 안 서?!”
* * *
“곱게 안서면 더 맞는다?!”
김칠성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사태파악이 안 된 한솜이는 어리둥절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냅다 김칠성 뒤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칠성씨!”
“젠장! 그만 따라와!”
욕지기를 뱉은 놈들의 신형이 일렁이며 지면을 박차고 나간다.
‘보법?’
“잡히면 뒤진다!”
놈들도 무도인 으로서 어느 정도 수행이 된 몸 인 듯, 김칠성과의 거리를 쉽게 좁혀주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 정도 수준의 놈들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물론 칠성이 전력을 다 하면 순식간이 쥐포가 되어 버리겠지만,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듯, 목숨을 다해 전력으로 도망치는 놈들의 선방에 칠성은 어쩐지 대견한 마음까지 들었다.
‘역시 매가 약이지? 새끼들.’
만병통치약은 매다. 저 녀석들도 저번에 흠씬 두들겨 맞으니 이번엔 안 맞으려고 저렇게 기를 쓰고 도망가는 거 봐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녀석들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듯한 근처 건물 건축현장의 차단벽 사이로 꺾어 들어가 도망쳤다.
타당탕.
“흐~음...”
놈들보다 한발 늦게 녀석들이 도망친 건설현장 속으로 발치의 철판 등을 우당탕 밟으며 들어갔다.
“새끼들. 가지가지 하네.”
어둠과 건축 중인 회색빛 건물을 엄폐물 삼아 모습을 감춘 놈들을 향해 혀를 쯧 찬 칠성은 슬쩍 눈을 감았다.
모습이야 쉽게 감춰도 쉽게 감출 수 없는 게 마나다.
일반인 보다 마나량이 많은 무도가 따위야 마나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눈 감고도 어디 있는 지 훤하다.
눈을 감은 칠성에게 펼쳐진 어둠 속 공간.
찬찬히 심상을 가라앉히자 주변 사물의 마나가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한다. 흰색 빛 같은 주변의 마나들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라.’
칠성이 눈을 번쩍 떴다.
“칠...칠성씨!”
술에 취해 비틀대던 한솜이가 어느새 김칠성을 따라잡곤 헥헥 거린다.
“왜 그래요? 뭐 이렇게 빨라!”
김칠성이 불만을 토로하는 한솜이를 향해 오지 말라는 듯 손을 뻗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슬며시 느껴지는 바닥 전체의 검푸른 마나의 기운.
그리고 주변에 감지되는 마나가 너무 많았다.
김칠성의 눈이 전투적인 눈매로 크게 떠진다.
“팀장님. 도망가.”
깡 그르르릉...
쇠파이프가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린다.
칠성의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컨테이너 사무실,
아직 창이 달리지 않은 회색빛 건물의 2, 3 층. 1층의 기둥 사이 등에서 검은 복색의 남자들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입구 부근도 놈들 중 일부가 막아선다.
2, 3층에서 대기 중이던 녀석들이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날려 칠성이 있는 지상에 내려선다.
대략 30여명의 능력자 군단이 순식간에 칠성과 한솜이를 둘러싼다.
번쩍.
켜진 라이트를 스포트라이트 삼아 아까 칠성에게 쫒기 던 녀석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크크크크....”
검은색 마스크 너머로 녀석이 웃는다.
“히야... 너네 진짜... 뭐 하는 새끼들이냐?”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김칠성이 주변을 둘러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곧 죽을 놈이 궁금한 것 도 많네.”
눈이 웃고 있는 검은색 마스크는 칠성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비아냥 거리며 엄지를 치켜들어 자신의 목을 그어보였다.
‘귀엽기는 진짜.’
놈들의 자신감이 뭔지 알겠다.
녀석들 사이사이에 저번과 엇비슷한 느낌의 마나 번 아티펙트를 지닌 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 열 놈 정도가 검은 마스크의 지시에 맞추어 아티펙트를 발동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번보다 훨씬 큰 규모의 마나번을 일으키고, 그 사이에 덮치면 무슨 수 있겠냐는 심산이겠지.
“*스파크*”
파칙!
칠성이 나직이 시동어를 읊었다.
미약한 어둠의 전류가 칠성의 손가락 끝에서 부터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어둠의 전류가 강타한 것 은 아티펙트 딱 한 개였다.
김칠성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가운데 라인, 북쪽에 있는 녀석의 것을 손보았다.
정말 약간의 변동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무언가 이변이 생겼다는 눈치조차 채지 못 했다.
‘어라?’
한 손에 아티펙트를 들고 준비하던,
칠성이 손을 본 아티펙트의 주인 그 보인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느꼈지만,
상황이 워낙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지라 딱히 어떤 조취를 취할 생각은 못 했다.
‘별 이상 없겠지.’
그리고 대부분 대형 사고는 이런 안일한 정신이 불러들인다.
“해!”
쥐잉-.검은 마스크의 구호와 함께 십 여 개의 아티펙트에 마나가 주입되었고, 상호 작용해 증폭되도록 설계된 아티펙트들이 공명음을 울부짖는다.
파카앙!
휘리리릭!
공사장 전체를 뒤덮는 스케일의 마나번 주문이 폭발했다.
마나 번의 아우라가 공사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끄악!”
“우, 우웨엑!”
“무슨 짓 이야!!”
하지만 대규모 마나번이 강타한 것은 녀석들의 목표인 김칠성이 아니었다.
마나번은 그 대신 주변에 있던 검은 복장의 남자들을 덮쳤다.
김칠성 좌, 우의 괴한들이 무슨 일이 일어난 지도 모른 채 마나의 폭풍우에 휩쓸려 바닥을 굴렀다.
“이...이게 뭐야!”
검은 마스크 주변과 김칠성이 망가트린 아티펙트를 쥐고 있던 부근의 놈들만 무사했다.
“사람 졸로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리가 있냐?”
원래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수한 세월이 걸리나, 그걸 무너뜨리는 것은 단 한 번의 손가락 질 이면 충분한 법이다.
칠성이 망가뜨린 아티펙트는 마나번 마법의 방향을 지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 이었다.
나가야할 방향을 잃은 마나번의 폭풍이 기존의 의도와 달리 미쳐 날뛰어 놈들을 덮친 것 이다.
“더 할 거 있냐?”
칠성이 마스크를 쓴 놈에게 던지듯이 물었다.
“시작도 안 했다. 죽여!”
쓰러져 있던 녀석들이 각자 준비해둔 둔기를 그러쥐고 몸을 일으켰다.
공사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파이프나 철근을 들었다.
마법이 실패했지만 머릿수로 밀어붙일 셈 인 것 같았다.
“이야아아!!”
검은 마스크의 명령과 함께 놈들이 김칠성과 한솜이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