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화. 일기
화살 맞은 사람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세월은 화살처럼 빨랐다.
춘경지에 파릇파릇 싹이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간초목이 초록색으로 뒤덮이고 살찐 짐승이 어슬렁거리다가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고 보리밭에 황금물결이 일렁였다. 관용구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우리 기사님은 뭐하실까요?”
“아, 좀!”
늑대성의 일 년은 더욱 정신없고, 더욱 빨리 흘러갔다. 공식적으로 로벨 로드릭 왕은 칩거에 들어갔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과 명예롭게 결투하여 승리했으나 부상을 입어 요양이 필요하단 핑계였다. 이와 관련하여 볼탄 반도에 크고 작은 혼란이 일어났다.
‘무적무패 왕’이 아니라 ‘거의 무적무패 왕’이란 우스갯소리는 애교였다-페르젠 ‘주니어’ 백작, 당신 말이다- 심기 불편한 수준의 무력을 동반한 도발도 있었다. 펄프 대장과 울프 용병단은 여름에만 세 번 출정해야 했다.
심지어 로벨 로드릭 왕은 죽었는데 그 충복들이 진실을 숨기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어린 집사는 동원 가능한 모든 채널로 반박하고, 프란시스 시티의 대주교를 모셔와 신앙고백, 양심고백을 치러야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가을이 찾아오고, 추수제가 찾아오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이 찾아왔다.
“매정한 사람. 냉혹한 사람. 피도 눈물도 오줌도 없는 사람. 늙은 집사님은 기사님이 걱정도 안 돼요?”
“걱정은 무슨... 가만, 내가 왜 늙은 집사예요?”
“이제 어린 집사는 따로 있으니까요.”
마녀 키르케가 불쑥 나온 아랫배를 가리켰다. 고상한 섭정 부인이 할 행동이 아니라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잖아요. 집사가 될지 상인이 될지 모르고요.”
“헤에? 상인이 되었으면 하나 봐요?”
“말이 그렇다고요. 말이. 아무튼 기사만 아니면 되요.”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꼭 맞지는 않았다. 서른이 넘어서도 기사 문학에 심취한 귀부인 키르케는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 기사님 같은 기사님이 되면 참 좋을 텐데요.”
“이 소란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요?”
기사 한 명이 세상을 바꿨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사건·사고까지 생각하면 ‘소란’이란 말로 부족했다. 어린 집사는 그 문제의 기사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공왕 폐하라면 걱정하지 마요. 그 양반이 갈 곳이 뻔한데 걱정할 게 뭐 있어요.”
“뻔해요?”
“우리 폐하 친구 없는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알잖아요. 눈치 안 보고 지낼 곳이 몇이나 되겠어요?”
최근 발길이 뚝 끊긴 모 기사를 생각하면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영리한 키르케가 모를 리 없는데, 그래도 안 보이니 걱정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우리 아이 이름은 뭐로 하죠?”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말이 아주 효과가 좋았다. 신혼부부에게는 국가운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음... 늙은 집사님 이름으로 지을까요?”
“제 이름이요? 가만있자, 그러면 요한 파우스트 ‘주니어’인가요?”
마녀 키르케는 오랜만에 듣는 어린 집사 이름에 미소 지었다.
“아뇨. 아뇨. 나의 늙은 집사님 말고, 진짜 늙은 집사님이요.”
“아, 우리 할아버지요?”
어린 집사가 아니게 된 어린 집사는 까칠한 수염을 긁적이고 오래전 작고한 조부모를 떠올렸다. 가족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그 이름을 증손자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 요한 게오르크 파우스트... 에잇, 줄여서 오르크 파우스트 어때요?”
“오르크 파우스트! 전 좋아요! 싸움을 잘 할 것 같은 이름이에요!”
“아,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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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숲은 쓸쓸했다.
봄의 활기, 여름의 열정, 가을의 기쁨을 기억하기에 황혼은 유난히 슬프고 안타까웠다. 로벨은 깃펜을 놓고 창밖의 자작나무 숲을 보았다. 아늑하고 평화롭지만, 왠지 한숨이 나왔다.
“이걸 뭐라고 할까, 성지에서 돌아온 순례자의 기분일까,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독자의 기분일까.”
로벨의 일기가 끝나길 기다린 듯 부드러운 팔이 목덜미를 감쌌다.
“마지막이라고 항상 슬픈 것은 아닙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농부의 발걸음을 생각해 보시지요.”
“그야 내일이 있으니까?”
“공왕 폐하께도 내일이 있지 않습니까.”
로벨은 고개를 돌리고 호른 경의 손을 끌어당겼다. 무적무패 왕의 힘은 사라졌어도 아직 챔피언이고 기사였다. 구도를 무시하고 키스를 남길 수 있었다.
“푸히히잉-! 푸히힛-!”
창 밖에서 모닝스타가 울부짖었다. 또 아야와 이야카하고 싸우는 모양이다. 매일 산책을 나가지만, 산으로 강으로 들판으로 뛰어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운동부족이라 신경이 날카로웠다. 짐승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른 경이 아쉬움을 남기고 떨어지며 말했다.
“아무래도 시골이고, 황량한 숲이다 보니까...”
“그런 말 마시오.”
로벨이 늑대성을, 고향마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호른 경은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로벨은 잉크가 마른 책을 천천히 덮었다. 자서전이라 하면 너무 거창하고, 일대기라 하기에는 결말이 나지 않아 그냥 일기라 이름 붙였다. 전공이나 업적보다 소소한 일상이 많이 담긴 로벨의 일기, 기사의 일기였다.
“경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로벨이 자작나무 숲에 온 뒤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에는 30년 치를 몰아 쓰는 게 무슨 일기냐는 옆구리 꼬집힌 이야기도 있었다. 다행히 그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일이 올 거란 말.”
그리고 조금 무안한 듯 헛기침을 섞었다.
“진짜 내일은 곤란하고, 내년 봄이 오면 함께 여행을 갑시다. 회색산에도 가고, 버팅거 호수에도 가고, 기회가 되면 하얀 숲과 검은 숲에도 가보는 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공왕 폐하께서는 지금...”
“물론, 로벨 로드릭으로는 불가능하오. 제후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로벨은 기사의 일기를 쓸어 만졌다. 가죽 표지 아래 저자가 비어있었다.
“하지만 제네카 호른이면 괜찮지 않겠소?”
긴 연애 끝에 나온 청혼이었다. 레이디가 먼저 요구한 것이 자존심 상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과 신분을 생각하면 문제 되지 않았다. 패트릭 호른 경의 표정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밝아졌다. 첫 번째로 밝은 사람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내 갑옷을 못 입는 것은 조금 싫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칼은 가져갈 것이오. 모닝스타도 탈 거고. 갈기만 염색하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염려할 필요는...”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로벨이 아닌 로벨은 의자에서 몸을 돌려 새 가족을 보았다. 창밖의 숲 향기와 오래된 목재가구와 네발짐승들의 울음소리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때 로벨 로드릭이라 불린 기사가 정중히, 그러나 웃음이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내 이름은 제네카 로드릭이오. 그리고 이제는 제네카 호른이라 불리고 싶소. 청컨대, 부디 나와 결혼해 주겠소?”
역사상 가장 화통한 귀부인 프로포즈였다. 그래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예. 기꺼이 함께 하겠습니다, 마이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