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4화. 이별
죽은 자의 왕, 밤의 주인, 야만인 학살자, 볼탄 반도의 마지막 수호자이자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가 죽었다.
그것은 예정된 죽음이면서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
“저기, 백작? 죽은 거야? 진짜?”
최후의 수호자는 로벨 로드릭 손에 죽어야 했다. 최소한 로벨 로드릭의 명령으로 죽어야 했다. 이렇게 암살 당하듯, 사고 당하듯 쓰러져서 안 되었다. 로벨은 발끝으로 고개 숙인 뱀파이어 군주를 건드렸다. 뱀파이어 군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흘러나온 것은 소리가 아니라 핏물이었다.
“...죽었네?”
얼빠지는 상황에 얼빠진 대사였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 볼탄 반도의 혼란을 주도해온 거악(巨惡)이 이리 허무하게 쓰러질 줄 몰랐다.
“머, 뭣이여? 우리 영주님이 죽은 것이여?”
“우리 영주님은 무슨! 저건 괴물이야! 사악한 악마라고!”
“그, 그래도 저렇게 죽이면... 조금 비겁한 게 아닌가...?”
로벨만큼, 아니, 로벨보다 당황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강철성 마을 주민들이었다. 부모형제의 원수가 죽었다는 것에 기뻐하는 한편,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눈앞에 칼을 든 기사가 누군지 모르거니와 그 기사가 영주님을 죽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오, 무적무패 왕.”
메인 홀 뒤편, 필시 주방으로 이어졌을 어두운 모퉁이에서 더스틴 폴라 경이 나타났다. 롱보우를 어깨에 메고 컴포짓 보우와 화살 한 움큼을 쥔 것이 의심의 여지 없는 백작 살해범이었다. 로벨이 입술을 떼기 전에 소란이 일어났다.
“무적무패 왕이라고?”
“지금 와, 왕이라고 했지?”
큰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들을 사람은 다 들었다. 엎어지면 코 닿는 늑대성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그럼 공왕 나으리가 우리를 구해주신 건가?”
“그래! 공왕 폐하가 우리 영주님을 죽였다!”
“잠깐만, 영주님을 죽인 것은 저 활을 가진 나으리인데?”
마도(魔道) 저편으로 건너간 뱀파이어 군주가 알면 울화통 터질 상황이었다. 이러려고 수백 년을 숨어 지내며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었다.
“경이 어떻게 여기에...”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더스틴 폴라 경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대거를 뽑았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뱀파이어 군주의 머리카락을 잡고 목을 그었다. 핏물이 왈칵 쏟아지고, 강철성 주민 사이에서 비명인지 탄식인지 모를 새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로써 ‘도반 도트넘 백작’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허나 단순한 확인사살이 아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주석잔을 꺼내 꿀렁꿀렁 흐르는 핏물을 받았다.
“이것이 불로불사의 비약인가.”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뱀파이어에게 물린다’, ‘뱀파이어의 피를 마신다’는 요식 행위였다. 마법을 위해 주문을 외우고 제사를 위해 제물을 올리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해야 효과가 있다 믿기 때문이다. 이론상 본인이 믿고 타인이 믿으면 피를 마시지 않아도 뱀파이어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었다. 인간의 고정관념은 바위처럼 단단해서 혼자 쪼개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반대는 가능했다. 신뢰보다는 의심이 쉽고, 긍정보다는 부정이 빠른 법이다.
더스틴 폴라 경은 빛바랜 노을에 술잔을 비춘 후 입술로 가져갔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마침내 잔이 비었다.
“...흡혈귀의 왕이라더니, 그냥 흡혈귀와 차이가 없군.”
말하는 본새를 보니 여러 번 잡아먹은 모양이다. 하긴, 마을의 신부가 사라졌다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소용없어요.”
마녀 키르케가 경악에 찬 침묵을 깨고 말했다. 로벨 외에 관심을 주지 않던 더스틴 폴라 경이 처음으로 돌아보았다. 마녀는 지팡이를 가슴으로 당기고 말했다.
“아이러니(irony)란 말을 아세요?”
“문학적인 역설 말이냐?”
기사치고 인문학 소양이 훌륭했다. 마녀가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기사님이 왕이 되지 못해서, 기사님이 백작님을 죽여서, 그래서 기사님이 찾는 마법은 사라졌어요.”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주어가 반복된 탓은 아니었다.
“무적무패 왕은 이미 왕인데, 무슨 소리냐. 그리고 왕과 마법이 무슨 상관이지?”
허풍쟁이는 문득 이상한 생각을 했다. 마녀 키르케는 로벨을 ‘공왕 폐하’라 부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마녀의 왕은 볼탄 반도 왕이 아니라 누구일까.
“결론만 말하면, 기사님은 영생을 가지지 못해요.”
“...뭐라고?”
조금 흥분한 듯했다. 평생 추구한 것이 허사로 돌아가면 그럴만한데, 입가에 피를 묻히고 사람 죽인 칼을 들고 흥분하면 곤란했다. 로벨이 흐룬팅을 뻗어 앞을 막았다.
“경, 진정하시오.”
그것도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괴성을 지르며 칼을 쳐내고 덤벼들었다. 마녀 때문에 흥분한 이유도 있지만, 자신이 불사인지 아닌지 테스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진짜 불사인 뱀파이어 군주가 누구 손에 쓰러졌는지 생각하면 무모했다. 아주 많이 무모했다.
로벨은 칼날로 대거를 쳐내고 칼자루로 더스틴 폴라 경을 밀어냈다. 상대가 활잡이란 것을 고려하면 바로 제압했어야 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세 걸음 떨어지자 즉시 컴포짓 보우를 당겼다. 어느새 화살이 다섯 개나 쥐어져 있었다.
“경! 멈추시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옆면으로 첫 번째 화살을 쳐냈다. 두 번 보고, 세 번 봐도 놀라운 재주지만 이상하게 더스틴 폴라 경은 놀라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의 화살이 묘하게 움직이더니 연이어 두 발, 세 발, 네 발 쏘았다.
아무리 달인이라도 칼을 회수하는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으니 전부 쳐내지는 못했다. 로벨은 왼팔로 얼굴을 보호하고 몸으로 때웠다. 장력이 100파운드 가까운 잉그비아 롱보우라면 모를까, 작고 가벼운 컴포짓 보우의 화살은 아무렇지 않았다. 철판에 튕겨나가고 물결무늬를 따라 빗겨나갔다. 더스틴 폴라 경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물러났다.
“정신이 나갔군! 불량식품 때문인가?”
양식(糧食)이란 단어가 꼭 먹는 것에만 붙지는 않으니 불량이라면 불량이었다. 최소 300년 상한 불량식품이었다.
“본인을 용서하시오!”
용서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상체를 뒤로 젖혀 마지막 화살을 피하고, 허리 반동으로 다시 끌어올렸다. 조금 빠르고, 조금 강하게 올렸다. 흡사 공성추의 해머 같았다. 앞으로 튕겨 나간 전두골이 더스틴 폴라 경의 콧대를 세게 때렸다. 불꽃이 번쩍였다.
“윽... 투구를 쓸 걸...”
맨날 훈계하면서 정작 본인은 하지 않으니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동의를 구하기 위해 더스틴 폴라 경을 살폈는데 동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로벨이 따끔했으니 폴라 경은 으스러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눈알이 뒤집혀서 혼절했다.
“일 년 치 결투를 오늘 다 한 것 같아.”
“이게 고작 일 년 치라고요?”
허풍쟁이가 엉망이 된 메인 홀을 둘러보고 중얼거렸다. 성난 용병과 굶주린 강도가 휩쓸고 간 성이 이러할까, 꼭 전쟁터 한복판에 온 기분이었다. 시체와 시체 비슷한 것은 두 개 뿐이지만.
“어, 어쨌든 끝났습니다요. 아... 끝난 거 맞지요?”
이제 집에 가자는 눈빛이 강렬했다. 로벨은 칼을 내리고 주위를 보았다. 강철성 주민들이 머뭇머뭇하며 성 안으로 들어왔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약탈인지 방화인지 모르지만, 로벨에게 잘 된 일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어도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어.”
“또 뭐가 남았습니까요?”
“이번 일의 원흉이 남았잖아.”
허풍쟁이는 죽은 백작을 보았다. 하지만 뱀파이어 군주는 진짜 원흉이 아니었다.
“기사님...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발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로벨은 두 친구를 보았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외팔이 더치, 겁쟁이 데비 등 수많은 친구 중 두 사람을 데려온 이유가 있었다. 한 명은 자신을 이해할 마법사 친구고, 한 명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광대 친구였다.
“어린 집사를 늑대성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볼탄 반도 공작, 포클랜드 후작, 크레타 시티와 청옥성의 권리를 전부 위임하겠어.”
“저, 공왕 폐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펄프 대장에게 울프 용병단을 맡길 거야. 만약 펄프 대장이 은퇴한다고 하면 어린 집사와 상의해서 다음 대장을 뽑도록 해. 조지 솔트와 애꾸눈 볼포스 중 한 명을 추천할게.”
이어서 헨리 상회장, 페리 행정관, 리암 수사, 그람 형제, 마틴 총독, 기타 친분이 있는 기사들에게 전언을 남겼다. 바보라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유언이었다.
“아니야. 나는 죽는 게 아니야. 장례식 같은 건 치르지 마.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 거야.”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무슨 헛소리냐’, ‘농담하지 마라’, ‘재미없다’ 등으로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로벨의 정체를 아는 마녀 키르케와 로벨의 당부를 외우기 바쁜 허풍쟁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게 좀 서운했는지 굳이 묻지 않은 이유를 덧붙였다.
“내가 있으면 마도의 수호자가 계속해 나타날 거야. 그 힘을 탐내는 사람도 계속 나타날 테고. 그것은 칼로 막을 수 없어. 백작이 그러했고, 더스틴 폴라 경이 그러했으니까.”
저 둘이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실체를 바라는 괴물과 영생을 꿈꾸는 인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고 로벨 로드릭을 죽일 수 없어. 로벨은 너무 많은 사람과 친해졌는걸. 이제 와서 로벨이 사라지면 많이 실망하고 많이 다칠 거야.”
인지의 세계만큼이나 실체하는 세계도 중요했다. 로벨이 사라지면 10년 전 혼란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야.”
사람들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건사고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로벨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온건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허풍쟁이는 로벨의 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알았다. 항상 그랬듯 고용주의 결정을 모두에게 전할 뿐이다. 마녀 키르케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어린 집사가 슬퍼할 거예요.”
“그렇지 않아.”
로벨은 확신을 담아 부정했다.
“어린 집사는 내 가족이야. 나를 나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야. 전부 알고 있을 거야.”
“그럼 호른 기사님은요?”
로벨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로벨은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내릴 수 있는 가장 신중한 답을 주었다.
“그 사람도 내 가족이야.”
“우리와 다른 가족인가요?”
“응.”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래도 긴 이별은 아닐 것이다.
“잘 지내. 내 친구.”
“행복하세요. 기사님.”
마녀가 웃었다. 역시 슬픈 결말은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