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01화 (601/605)

601화. 양해

로벨은 어린 집사를 대동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오래된 성의 냄새가 나는, 그래서 항상 마음이 편안한 메인 홀에는 출정준비를 보고하기 위해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외팔이 더치가 모여 있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로벨은 세 용병에게 편제, 보급품, 무장상태 등을 간략히 전달받은 후 함께 아성(牙城)을 나왔다.

봄 햇살이 가득한 안뜰에는 허풍쟁이 제이콥, 과묵한 몬트, 흉내쟁이 퍼시발 등 로벨의 직속 랜스가 전투마에 오른 채 대기 중이었다.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모닝스타의 고삐를 잡고 다가왔다. 험상궂은 용병도 냅다 들이박는 말이 마녀의 말은 따랐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고깔모자를 살짝 올리고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별일 없을 거야.”

“끼잉... 낑...”

아야와 이야카가 사나운 모닝스타를 피해 멀찍이 돌아왔다. 로벨은 나이든 네발 친구도 따뜻하게 다독여주었다.

이제 서른 명으로 늘어난 패거리를 이끌고 늑대성을 나섰다. 전원이 말을 타서 걷는 것보다 빨랐다.

“공왕 폐하가 나오신다!”

“제자리 지켜! 거기! 투구 똑바로 써라!”

늑대 언덕에서 굽어보니 장관이 펼쳐졌다. 울프 용병단 770명이 소대, 중대, 대대 단위로 사열했다. 전쟁 소식을 듣고 모인 성 안 시민과 성 밖 농민이 2, 3천 명이었다.

크고 높은 빌라, 커다란 성벽, 활기 넘치는 시장, 강인한 군대까지. 그 옛날 잡초 무성한 흙길에 초가집 몇 채 듬성듬성 있던 로드릭 마을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로벨이 반평생에 이룩한 업적이었다.

“내 마을, 내 사람은 앞으로도 성장할 거야.”

“공왕 폐하?”

어린 집사가 힐끔 보았다. 로벨은 멜랑꼴리한 기분을 털어내고 사열한 울프 용병단 사이를 가로질렀다.

사전에 연습한 듯 로벨과 로벨의 기마대를 따라 좌향좌, 우향우로 돌아섰다. 발맞춰 움직이는 것이 ‘정예’의 소양이라는 평소 지론대로면 울프 용병단은 정예 중의 정예, 최정예 군대였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방향을 전환해서 도시를 빠져나가기까지 15분이 걸리지 않았다. 용병술을 모르는 시민이 봐도 대단한 장관이라 함성이 터져 나왔다.

로벨을 따르는 숫자가 1천 명으로 늘어났다. 봄농사가 한창인 농부와 새순이 난 목초지로 양떼를 모는 목동이 로벨을 보고 모자를 벗었다.

무적무패 왕을 흠모하는, 혹은 이 기회에 무명을 떨치고자 하는 기사들이 찾아와 가슴에 칼을 붙이고 합류했다. 종군상인이 고집불통 당나귀를 재촉해서 따라 붙고 옛 신의 상징 짊어진 순례자와 철부지 아이가 각자의 이유로 뒤쫓았다.

그렇게 로벨을 따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이대로 볼탄 반도를 가로지르면 1, 2만 명은 아무렇지 않게 모일 것 같았다. 로벨의 명성 때문인지, 아니면 살랑거리는 봄기운 때문인지 전쟁이 아니라 축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종군하는 펄프 대장이 어이없어 중얼거렸다.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하는군.”

“어? 뭐라고 했소?”

외팔이가 슬쩍 보며 물었다. 펄프 대장은 어색한 헬름을 만지며 말했다.

“긴장하는 놈이 하나도 없잖아. 누가 보면 동네 마실 나가는 줄 알겠다.”

가까이서 엿듣던 용병들이 낄낄 웃었다.

“강철성이라 해봐야 꼴랑 600명 아니오?”

“우리도 전투인원은 그 정도야. 그리고 용병이란 놈이 언제부터 승리를 확신하고 싸웠지?”

“어... 그러게...?”

오늘만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용병이란 족속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장사하는 상인처럼, 밭일하는 농부처럼 내일을 생각하고 내년을 생각했다.

“그런데 왜 긴장이 안 되지?”

“그야 질 거 같지 않으니까?”

“왜 질 거 같지 않은데?”

“글쎄? 우리 왕 때문인가?”

로벨을 오래 따른 고참 용병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최근에 합류한 조지 솔트도 자연스럽게 그리 행동했다. 오래 살아서 세상 보는 눈이 조금은 생긴, 혹은 일선에서 물러나 객관화가 잘 되는 펄프 대장은 맹신적인 분위기가 낯설었다.

“이게 마녀 아가씨가 말한 건가?”

구세주니 마도의 수호자니 하는 것은 여전히 모르지만, 로벨이 로벨이 아니게 된다는 뜻은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이번 전쟁도 이기면 정말 어찌 될지 모르겠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쇼? 꼭 이기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이 많으면 피곤하고 아는 게 많으면 고단한 법이다. 펄프 대장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우물우물하다가 때려 쳤다.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라.”

생각이 많이 필요한 외팔이는 그저 덕담이라 여기고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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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을 따르는 천 명의 사람 중 승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로벨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다고 천 명의 목숨을 가지고 패배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알면 ‘걍 아무 생각이 없는 거 아니냐’ 쏘아붙일 텐데, 그 말이 맞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군영을 세우자.”

로드릭 시티에서 9마일 밖에 오지 않은 북쪽 숲 외곽이었다. ‘고작 여기 올 거면 도시에서 쉬지 그랬어요’, ‘강철성까지 이틀 더 가야 합니다’ 같은 군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로벨을 따라 전쟁터를 누빈 것이 최소 15년이었다. 로벨의 승리를 확신하는 만큼 로벨의 작전에 의심도 없었다. 적어도 전장에서는 그러했다.

“여기서 야영한다! 준비해라!”

고참 용병이 상황을 전파하며 부대원을 움직였다. 전쟁터가 직장인만큼 할 일을 몰라 헤매는 용병은 없었다. 수레에서 천막을 꺼내 능숙하게 말뚝을 박고 지주를 세우고 나무를 베어 바리케이트를 엮고 돌을 모아 화덕을 만들었다. 숙련된 장인들이 의례 그러하듯 긴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 ‘저기’, ‘그거’, ‘이거’로 막힘없이 주둔지가 건설되었다.

로벨은 가장 먼저 세워진 지휘막사에서 몇몇 핵심인물을 불러 모았다. 왕이라면, 책임자라면 독단에도 양해가 필요했다. 양해해 줄지는 둘째여도 말이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아무래도 농담 같은뎁쇼?”

의심, 분노, 헛웃음, 그리고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로벨의 결심은 확고했다.

“내가 찾은 세 가지 방법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거야.”

이구동성으로 ‘그럴 리 없다!’ 외쳤다. 다만, 다른 두 가지 방법을 짐작하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입을 다물었다.

“로드릭 주민은 공왕 폐하를 일당백 기사라 칭송하지요.”

로벨 다음으로 지휘권이 높은 펄프 대장이 입을 열자 모두가 침묵했다. 경박스러운 허풍쟁이와 이해가 느린 외팔이만 뭔 개소리냐 표정을 지었다. ‘저걸 허락할 생각이우?’ 허락이 필요한지 모르지만 허락할 생각 없었다.

“하지만 일당천은 아니잖습니까? 저기에는 직업적인 개놈의 종자만 300명입니다. 백작의 기사도 여럿 있겠지요. 그런 곳에 혼자 가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이 늙은 놈을 죽이고 가시지요.”

펄프 대장치고 결연한 태도였다. 로벨이 흐룬팅 손잡이를 잡기 전까지만 말이다.

“아, 아니, 생각해보니 일당천이라 칭송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 여관집 지미던가...”

존경의 시선이 빠르게 흩어졌다. 로벨은 흐룬팅을 고쳐 매고 나직이 고백했다.

“난 강철성 백작이 무서웠어.”

이것도 상상 못한 고백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농담이라 생각하고 웃는 사람이 있었다. 꼭 짚어서 생각이 좀 필요한 외팔이 맞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그가 내 약점을 알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갈 약점 말이야.”

로벨의 정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반응이 엇갈렸다. 의외의 사실은 전자가 더 많다는 것이다. 펄프 대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고 허풍쟁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하지만 얼마 전에 깨달았어. 그것은 약점이 아니야. 백작은 절대 비밀을 건드리지 못해.”

뱀파이어 군주의 목적이 새 시대를 열 구주(救主)라면, 그 희망인 ‘로벨 로드릭’을 죽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난 무서운 게 없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피할 필요 없잖아.”

“그냥 이대로 군대를 끌고 가도 이길 텐데요.”

발가락 슈미츠가 중얼거렸다.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그건 내가 이기는 게 아니야. 강철성 백작이 이기는 거지.”

외팔이, 겁쟁이, 발가락 등은 이기는 게 이기는 게 아니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저희를 모두 데려온 이유가 무엇입니까요?”

“전술의 기본은 속임수야. 백작이 이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기 위해서지.”

더 알쏭달쏭해졌다. 로벨은 설명할 수 없는 설명을 때려치우고 그냥 말했다.

“나 무적무패야. 난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아.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

사실 그걸로 충분했다. 외팔이 이하 고참 용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잉그비아 왕국에서 그랬고, 모나카 왕국에서 그랬듯, 당장은 이해가 안 되어도 결과적으로 이기는 것은 로벨 로드릭일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무적’이고 ‘무패’였다.

“저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평소처럼 행동해.”

“평소처럼 말입니까?”

그러면 뭐하러 이 기가 막힌 작전을 설명했나 싶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왕이라면 독단에도 양해가 필요했다.

“그래. 평소처럼.”

로벨은 어린 집사를 한번 보고 말했다.

“내가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나는 그거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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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기가 막힌 작전’은 성공하는 좋은 작전이 대개 그렇듯 심플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북쪽 숲을 관통해 강철성을 기습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숱하게 한 빈집털이와 유사한데, 차이점은 ‘지나치게’ 소수란 것이다. 점령이나 약탈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암살자가 된 것 같습니다요.”

“실제로 비슷해.”

로벨은 구름이 달을 삼키기 기다리며 일행을 보았다. 그래 봐야 허풍쟁이와 마녀 키르케가 전부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 멤버였다.

“강철성은 늑대성보다 큽니다요. 거기서 백작을 무슨 수로 찾습니까요? 아니, 강철성에 있는 게 맞습니까요? 그 백작 나으리도 한 성깔하는데 군영에 있지 않을깝쇼?”

로벨은 허리에 찬 파나케아 투구를 툭툭 두드렸다. 그걸로 첫 번째 대답은 되었다. 다음은 도반 도트넘 백작의 소재였다.

“백작은 성 안에 있어. 아직 죽을 생각은 없을 테니까.”

“예예. 이기는 게 지는 거란 그 말씀이죠?”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전부 이끌고 출정했다. 뱀파이어 군주 입장에서 보면, 호른 경의 일로 화가 나서인지, 운명을 받아들여 새로운 신이 되기로 결심해서인지 몰라도 전력으로 싸우는 모양새일 것이다. 새 시대를 갈망하는 마도의 수호자로서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신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십중팔구 전장이 아닌 강철성에 있을 것이다.

그런 로벨의 예상은 절반만 맞았다. 도반 도트넘 백작, 인지의 세계에서 태어난 흡혈의 군주는 강철성에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강철성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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