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8화. 자연권
호른 성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성문이 굳게 닫히고 용병이 두 명씩을 짝을 지어 성벽에 배치되었다. 기름이 아까워 잘 태우지 않는 화톳불이 이른 아침부터 활활 타올랐다. 성에서 자란 로벨은 성의 이상한 낌새를 즉시 알아챘다.
“호른 경은 어디 있지?”
성벽 위의 병사가 정지를 외치기 전에 로벨이 먼저 질문했다. 선수를 빼앗긴 수비병은 경고도, 질문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했다. 로벨의 말 모닝스타가 너무 화려해서 주눅이 든 탓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쩌면 오백 년 후에도 탈것은 위엄의 척도가 되었다.
“우, 우리 영주님은 왜 찾는 거요!”
너무 당황해서 몇 단계 절차를 건너뛰었다. 로벨은 수비병이 깜박한 것을 알아서 밝혔다.
“나 로벨 로드릭이야.”
“무적무패 왕!”
성문을 부술 필요도, 성벽을 뛰어넘을 필요도 없었다. 까만 갈기의 하얀 백마가 흔치 않으니 무적무패를 의심하지 않았다. 호른 성의 낡은 성문이 열리고 호른 경이 고용한 자작나무 숲 출신 용병이 모였다. 전원 완전무장한 것이 아주 안 좋았다.
“호른 경은?”
“이쪽입니다.”
수염이 나지 않은, 그러나 신분은 가장 높은 기사 종자가 말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호른 경의 기사 종자를 따라갔다. 전설적인 왕의 전설적인 애마가 신기한 용병이 멋대로 손을 댔다가 깨물려 비명을 질렀는데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걱정 때문에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기사 종자가 눈치 보며 변명했다.
“마스터는 공왕 폐하께서 걱정하실 테니 알리지 말라 했습니다.”
무엇을 알리지 말라고 했는지 설명하면 좋을 텐데, 이미 다 알고 왔다 생각한 듯 변명이 먼저 나왔다. 로벨은 어린 종자를 닦달하는 대신 걸음을 서둘렀다. 호른 성은 그리 큰 성이 아니라서 기둥 몇 개 계단 몇 칸 지나면 영주의 침실이었다.
로벨의 보폭을 따라가지 못한 기사 종자는 뛸 듯이 움직여 먼저 침실에 도착했다. 숨 돌릴 틈 없이 노크하고 소리쳤다.
“마스터, 공왕 폐하께서 문병 오셨습니다.”
로벨은 잠시 마녀 키르케를 떠올렸다. 마녀가 클리셰를 무시해서 웃은 일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쿵! 쿵! 우당탕! 쿵! 소리가 들려왔다. 하인들이 매일 청소할 텐데 뭐 숨길게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되었다! 안으로 모셔라!”
호른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한 것보다 기운찼다. 기사 종자가 방문을 열고 비켜섰다. 로벨이 그러지 말고 멀리 가라고 눈짓했다. 보통은 마스터 외에 명령을 듣지 않지만, 마스터의 마스터라 그냥 따랐다. 표정을 보아 반항하면 무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로벨은 사람을 모두 물린 후 홀로 호른 경을 보러 들어갔다. 기사가 원래 그런지는 몰라도 로벨의 침실만큼이나 단조로운 방이었다. 한쪽에는 칼과 방패, 갑옷, 수리도구 등이 쌓여 있고, 다른 한쪽에는 깃펜, 잉크병, 두루마리 등이 놓여 있었다. 로벨은 무기에 잠깐 시선을 뺏겼다가 정신 차리고 호른 경을 보았다. 양가죽을 씌운 침대에 친숙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데 타박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조금 풀렸다.
“...어떻게 된 일이오?”
호른 경의 오른쪽 다리가 붕대에 칭칭 감겨 침대 위 발걸이에 보기 좋게 걸려있었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귀엽긴 하나 웃을 수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몸은 가장 귀한 재산이었다. 호른 경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작아 보이지 않소.”
침대에 누운 남자라면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이다. 호른 경이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했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오나, 도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도적... 이라고?”
로벨의 땅에 도적이 사라지진 오래되었다. 왕의 용병부대, 그것도 유라피아 대륙 각지에서 악명 떨치는 울프 용병단이 상시 주둔하는데 불법적인 소유물 이전을 시도할 직업군이 활동하기 힘들었다. 하물며 호른 경은 챔피언 타이틀을 가진 기사였다. 어설픈 칼잡이는 열 수레가 덤벼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본인에게 알려야지!”
“그것이... 크흠...”
호른 경이 난감하게 시선을 피했다. 이해는 되었다. 기사란 작자가 도적한테 당해서 주군에게, 그것도 연모하는 왕에게 일러바치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다. 로벨이라도 그러할 것이다.
“어디서, 누구한테 당했소. 내가 가서 당장...!”
“그러실 것 없습니다.”
호른 경이 부드럽게 말했다. 속뜻은 부드럽지 않았다. 하긴, 다리를 다치고 잡히지 않았다는 것은 이겼다는 것이고, 이겼으면 도적 중에 무사한 이가 없을 것이다.
로벨은 침대에 걸터앉아 호른 경의 몸을 이모저모 살폈다. 크게 상한 것은 오른쪽 다리지만, 그 외에도 칼에 베이고 피멍이 든 곳이 여럿 있었다. 솜씨 좋은 의사가 다녀간 듯 치료는 잘 되어있었다.
“도적이 아니라 암살자일 수 있소.”
로벨의 손길에 곤란한 척 좋아하던 호른 경이 얼굴을 굳혔다.
“누가 저를 노린단 말입니까.”
“그것은 모를 일이오. 혹시 원한을 산 적 없소?”
은원(恩怨)이 없으면 칼잡이가 아니다. 호른 경은 몇 가지 짚이는 게 있는 듯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처럼 무모하게 행동할 작자는 없습니다.”
기사에게 명예는 목숨보다 중요하다. 미래인이 생각하는 호기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중요했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이 남지만, 명예가 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성공 가능성도 낮고, 성공해도 영원토록 불명예가 전해질 위험을 감수할 기사는 없었다.
“상대가 기사가 아니라면?”
“그런...”
호른 경도 뼛속까지 기사였다. 기사가 아니면 상대로 여기지도 않았다.
로벨은 속이 상했지만 닦달하지 않았다. 어쨌든 호른 경이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표현은 안 했지만 자신을 책망 중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호른 경이 아니라 로벨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닐 수도 있었다.
@
로벨의 호른 성 방문은 다소 심심했다. 다리 다친 사람을 끌고 나갈 수 없으니 대부분 시간을 침실에서 보냈다. 혹여 오해할 수 있으나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시집을 읽고, 체스를 두고, 와인을 홀짝이며 지난 추억을 회상했다. 추억 대부분이 핏빛으로 물든 전쟁인 것만 빼면 퍽 정다웠다.
“죄송합니다. 모처럼 찾아주셨는데...”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가끔은 이렇게 노는 것도 나쁘지 않소.”
표정은 매우 나쁘다고 말하고 있었다. 역시 거짓말 못하는 참된 기사였다. 호른 경은 지나치게 활동적인 연인을 달래기 위해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이야기꾼을 수소문했다. 허나, 로벨에게 자극이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마스터, 심문 준비가 끝났습니다.”
눈치 없는 기사 종자가 불쑥 나타나 말했다. 왕과 마스터의 관계를 몰라서, 혹은 로벨이 다 알고 찾아왔다 생각해서 경계하지 않았다. 호른 경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닥치라 윽박질렀지만 한 발 늦었다. 로벨이 관심을 가진 뒤였다.
“심문? 무슨 심문?”
“성에 죄인이 하나 있어서... 제 영지의 일이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원론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왕이라 해도 봉신의 정당한 권리-군사권, 조세권, 사법권-에 간섭할 수 없었다. 왕이라 해도 말이다.
“본인이 알면 안 될 일이오? 본인인데?”
“그것은 아니지만...”
왕은 못해도 연인은 할 수 있었다. 심하게 말하면 속옷 디자인에도 간섭할 수 있는 게 여자 친구였다. 호른 경은 똑 부러지게 ‘제 권리이고! 제 권한입니다!’ 주장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 더, 로벨 역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였다. 어린 집사의 구박으로 익힌 통치 가닥이 있었다.
“그냥 죄인이 아니군.”
“그게 그러니까...”
“본인 몰래 처리할 일이라면 경의 명예와 관련된 죄인일 터, 지금 상황에서 명예가 걸린 일이라면 그 ‘도적’이겠지. 내 말이 맞소?”
호른 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침묵은 긍정이었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일어났다. 호른 경이 눈짓으로 말리니 역시나 눈짓으로 안심시켰다.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기사 종자에게 말했다.
“안내해.”
기사 종자는 역시나 거부권이 없었다.
@
호른 성의 지하 감옥은 옛 늑대성보다 열악했다. 계단도 없고, 쇠창살도 없었다. 지하 구덩이에 사다리 하나 넣어 오르내리는 저장고가 감옥이었다.
옛 신이 만인에게 하사한 자연권(自然權)을 배제하고 생각하면 가장 효율적이 형태였다. 바꿔 말하면 현존하는 감옥 중 가장 끔찍한 형태였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에서 무엇도 보지 못하고, 누구와 대화하지도 못하며 자신이 싼 오물을 옆에 두고 생활하면 백의 백 모두 미쳐버렸다. 기사를 습격할 만큼 간이 큰 도적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가둬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음...”
로벨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대단했다. 자해라도 했는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끄집어 올리겠습니다.”
로벨은 갈등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늑대성이면 직접 내려가 심문하겠지만, 호른 경의 성이라 악취가 배면 곤란했다. 씻기도 힘들고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기사 종자가 용병 둘을 지목해 명령했다. 용병은 사용인의 처지에 한탄하면서 마지못해 지하실로 내려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꾹 참는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욕설과 함께 구타 소리가 조금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미 비슷한 죄수가 끌려 나왔다. 먹고 내놓은 것이 있으니 굶진 않았을 텐데 어째 물 한 모금 못 마신 몰골이었다. 기사 종자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마스터를 공격한 도적 중 하나입니다. 다른 놈들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도적은 닷새 만에 햇님을 영접하고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고용주를 잃을 뻔한 용병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오금을 차서 무릎 꿇리고 머리와 등을 밟았다. 깨끗하지 못한 바닥에 납작 붙었다.
“무적무패 왕이시다! 얌전히 굴어라!”
“무, 무적무패...”
“네놈의 죗값을 물으러 친히 늑대성에서 오셨느니라! 각오해라! 살아나가지 못할 테니!”
그거 때문에 온 게 아닌데, 아니라고 밝힐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굳이 협박하고 회유할 필요 없었다. 도적은 ‘왕’이란 단어에 격렬히 반응했다.
“제가,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위대한 공왕 폐하 만세! 살려주세요! 제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지하실에 갇혀 지낸 폐쇄공포, 무적무패 왕에 대한 심리적 공포, 그리고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합쳐져 정신이 나갔다. 그래도 딱히 안쓰럽진 않았다.
“거짓말을 하면 죽을 때까지 저기에 가둘 거야.”
“히이이-익-!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니, 죽여주세요! 그냥 죽여주세요!”
누가 봐도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로벨은 목소리를 깔고 나직이 물었다.
“누가 시켰어? 누가 호른 경을 죽이라고 한 거야?”
도적은 기대대로 즉시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정말, 정말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무적무패 왕 만세! 공왕 폐하 만세!”
다시 말하지만, 도적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골치가 아파졌다.
도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도적이 한 짓이 아니다. 어쩌면 도적도 아닐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