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무명
로벨은 사상자부터 확인했다.
목이 잘린 용병은 당연히 전사했지만, 앞발에 차이고 몸통에 깔린 용병은 정신을 잃었을 뿐 아직 살아있었다.
“키르케.”
마녀 키르케가 후다닥 뛰어가서 부상자를 살폈다. 사슬고리가 성긴 린넨처럼 뜯겨졌는데, 그 덕분에 상처는 깊지 않았다. 갑옷이 아니었으면 심장까지 도려졌을 것이다.
“충격 때문에 기절했어요. 살 수 있어요.”
“다행이야.”
로벨은 더 다친 사람이 있는지 쭉 둘러본 후 마지막에 괴물 늑대를 보았다. 괴물 늑대에는 입에 든 머리통을 우물거리다가 퉤- 뱉었다. 용병들 사이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저 쳐 죽일 괴물놈이!”
“가죽을 벗겨서 발닦개로 써주마!”
“대가리를 잘라서 성문에 걸어놓자!”
물론, 그 일을 할 사람은 로벨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 안장에서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려왔다.
“가족이 죽어서 화난 것은 알겠어. 하지만...”
지능이 높아서일까, 야성이 강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마도(魔道)의 본능일까, 괴물 늑대는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릴 뿐 덤비지 않았다.
“이 숲은 내 것이고, 내 사람을 공격했잖아.”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떤 짐승의 송곳니보다 길고 하얬다. 그 기세가 대단해서 100명의 용병 앞에서도 당당한 늑대가 꼬리를 말았다.
“크르르르...”
로벨이 한 걸음 전진하면 늑대는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이곳은 창벽에 둘러싸인 콜로세움이었다. 언제까지 도망갈 수 없고, 도망가서 살 수 없었다. 결심을 굳힌 괴물 늑대가 마침내 달려들었다.
“카하악-!”
웅크린 자세에서 그대로 뛰어들었다. 발리스타로 쏜 다트 느낌이었다. 용감한 용병이 속절없이 당한 공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사의 왕이자 무적무패 왕은 달랐다. 오른쪽으로 반걸음 옮겨서 몸을 틀었다. 빈자리는 눈부신 칼날이 채웠다. 괴물 늑대 주둥이가 가로로 길게 찢어졌다. 새빨간 핏물이 장막처럼 뿌려졌다.
“이야...!”
칼밥 좀 먹은 용병들은 모두 감탄했다. 바위를 집어던지며 무식하게 힘만 키운 기사와 달랐다. 아니, 힘도 대단하긴 대단했다. 저 단단한 몸뚱이를 찢었으니까. 하지만 역시 놀라운 것은 기술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이지?”
“괜히 그랜드 챔피언이 아니야.”
늑대는 자기 속도를 못 이겨 땅에 처박혔다. 찢어진 주둥이 사이로 삐뚤삐뚤한 송곳니가 보였다. 펄프 대장이 끔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런, 고기 씹기 힘들겠다.”
“고기 씹을 일이 있으면 말이오.”
이제 로벨이 공격할 차례였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왼손으로 옮겨서 길게 뻗었다. 복싱으로 말하면 잽에 가까운데, 거병으로 쓸 기술은 아니었다. 무기가 커지고, 갑옷이 커지고, 다시 무기가 커진 역사는 일격에 뼈를 부수기 위함이다. 어설픈 찌르기는 기사 종자도 못된 초보나 할 짓이다.
검술은 배운 적 없지만 싸울 줄 아는 늑대도 그리 생각했다. 찌르기를 피해 팔뚝을 물었다. 왼쪽 팔에 애환이 많은 외팔이가 탄식했다. 그러나 로벨의 몸은 강철이었다. 비유나 암시가 아니라 진짜 강철이었다. 콰득-!
뱀브레이스가 흉하게 찌그러졌다. 하지만 누구처럼 잘리지는 않았다. 로벨은 괴물 늑대가 매달린 왼팔을 끌어당기며 오른팔 휘둘렀다. 그 끝에는 언제 뽑았는지 모를 흐룬팅이 들려있었다. 푹-!
칼날이 괴물 늑대의 하악(下顎)에서 후두부로 뚫고 나왔다. 피와 피에 젖은 파편이 뚝뚝 떨어졌다.
“공왕 폐하가! 괴물을 해치웠다!”
허풍쟁이가 우승자를 발표하는 광대처럼 소리쳤다. 여기까지 와서 ‘고작’ 늑대사냥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큰 전투에서 이긴 것처럼 기뻐했다.
“공왕 폐하 만세! 무적무패 왕 만세!”
“저 개 같은 괴물놈! 잘 죽었다!”
로벨은 왼팔을 좀 더 가까이 당겼다. 평범한 회색늑대보다 2배 커서 200파운드나 되지만 무거운 기색이 없었다. 역시 힘도 대단했다. 그러나 더 대단한 것은 죽어서도 상대를 놓지 않는 괴물 늑대였다.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
마녀 키르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벨은 미안한 표정을 지은 후 흐룬팅을 뽑았다. 칼날이 아래턱으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러자 비로소 늑대의 턱이 벌어졌다. 거체가 힘없이 떨어졌다.
“
@
로드릭 시티, 뉴 로드릭 마을, 그리고 호프 마을에 북쪽 숲의 늑대 무리가 퇴치되었을 공표했다. 봄이 시작되어 장작을 패고 버섯을 따야 하는 주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인데, 로벨 왕이 신령한 늑대의 후손이라 늑대를 해치면 3대가 저주받는다는 기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외지인이 멋대로 헤집고 다니면 ‘로벨 왕처럼 부자가 되게 해 달라’, ‘로벨 왕 같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 기도해서 교회와 싸우기도 했다.
“그거 우상숭배잖아?”
“공왕 폐하가 살아있는 복자(福者)라 망정이지, 까닥하면 이단재판 받을 뻔했어요.”
그런 이단 신앙이 만연하니 괴물 늑대가 나온 것이다. 로벨은 문득 새로운 문제를 깨달았다.
“잠깐, 아야랑 이야카는?”
“우리 귀염둥이요?”
로벨은 ‘늑대성에 늑대만이 신령한 늑대’라 소문냈다. 자칫하면 새로운 우상숭배가 되어 제2의 괴물 늑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로벨이 진지하게 걱정을 표시하자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었다.
“아야랑 이야카는 실체하는 존재잖아요.”
“실체? 인지의 반대말이야?”
“실체하는 존재는 믿음만으로 변하지 않아요. 그게 아니면 샘 포클 기사님이나 넥스 네일 기사님은 벌써 반신(半神)이 되었죠.”
로벨은 ‘그럼 나는?’이라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로벨이 마도의 수호자가 된 것은 그저 무명 때문이 아니었다.
‘로벨 로드릭도 실체하지 않아.’
불현듯 불안해졌다. 셋째 오라비를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리고 지금의 로벨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때는 어찌 되는 걸까. 뱀파이어 군주와 마법사의 왕이 말한 대로 새로운 신이 되는 걸까.
“저 가죽은 뭐야? 저건 진짜잖아?”
로벨은 수레에 씌여진 괴물 늑대 가죽을 가리켰다. 짚더미를 쌓고 그 위에 가죽을 입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꾸몄다. 펄프 대장부터 신참 용병까지 당한 게 많아 다분히 악의적이었다.
“기사님이 잡았으니까요.”
“내가 잡으면 진짜가 되는 거야?”
“꼭 기사님이 아니어도요. 고블린도 그렇고, 트롤도 그렇고, 요정왕이 준 흐룬팅도 그렇잖아요?”
쉽게 말하면 실존하는 존재로 인지하면 실존하게 되는 것인데, 그때부터는 실체의 세계와 인지의 세계가 구분 없었다. 마법 또한 그러했다. 마법으로 만든 불이 아궁이를 데우는 것을 생각하면 간단했다.
“아니야. 간단하지 않아.”
“어렵게 생각하지 마요. 마법은 생각이 많은 사람한테 오히려 잘 통하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몰라 가만히 듣기만 하던 어린 집사가 손뼉쳤다.
“그래서 우리 폐하가 마법에 면역이군요!”
“엣헴!”
“...칭찬 아닌데요.”
괴물 늑대 가죽이 실체하는 것은 좋았다. 시민들이 구경나와 크게 감탄했고, 사냥에 참가한 용병과 사냥꾼은 어깨가 7인치쯤 솟았다. 괴물 늑대를 잡은 것은 로벨이지만, 잡을 수 있게 몰아붙인 것은 용병과 사냥꾼이니 으쓱거릴 자격이 있었다. 어린 집사가 구경꾼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또 뭐가?”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은 로벨이 물었다. 허나, 현실주의자 집사는 현실적인 의문만 가졌다.
“이런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달려올 사람이 있잖아요.”
“호른 경?”
1초의 고민도 없이 즉답이 나왔다. 호른 성과 자작나무 숲을 오가면서도 뻔질나게 찾아오는 양반이었다. 괴물 늑대 소식을 들었으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와야 정상이었다.
“닷새 전에 만나서 술 마시고 놀았는데?”
“닷새 전이요? 춘경지 밭갈이 살핀다고 나간 날이잖아요? 설마, 그 핑계로 호른 경이랑 놀러 간 거예요?”
“...웁스.”
로벨이 입을 잠그는 시늉했다. 어린 집사는 ‘몸종은 뼈 빠지게 일하는데, 주인이란 작자가 탱자탱자 노느냐’ 크게 질타했다.
“주인이 노는 동안 몸종이 일하는 게 원래 맞는 거 아닌가?”
“쉿! 쉿!”
상식 있는 용병 하나가 의구심을 표시했지만, 삶의 진정한 지혜를 가진 용병이 제지했다. 늑대성의 최고 권력자가 누군지 잘 알아야 했다.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이상한데요? 호른 기사님이 닷새씩이나 안 나타날 리 없잖아요?”
어제 사냥에 실패했으니 오늘 호른 성에 소식이 전해졌을 테고, 이 시각이면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쒸익- 쒸익- 거리며 나타나야 정상이었다.
어린 집사가 ‘자작나무 숲에 간 거 아니냐’ 물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닷새 전에 만난 것이 자작나무 숲에서 돌아온 호른 경이었고, 다시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면 늑대성을 그냥 지나쳤을 리 없었다.
“역시 이상하죠?”
“혹시 사랑이 식은... 웁! 웁웁!”
어린 집사가 마녀 키르케 입을 틀어막았다. 거리 한복판이라 듣는 귀가 많았다. 괴짜로 소문난 마녀가 떠들어봐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겠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로벨은 아웅다웅하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홀로 고민했다. 자의식 과잉일지 모르지만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호른 경은 아니었다. 그래서 걱정이 앞섰다.
“저 늑대 가죽은 내꺼지?”
로벨의 숲에서 로벨이 잡았으니 로벨이 내꺼 아니라 우겨도 로벨 것이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포장해줘. 호른 경에게 선물할 거야.”
반평생을 같이한 집사와 마녀는 곧장 속뜻을 이해했다. 진짜 선물은 늑대 가죽을 가지고 찾아갈 로벨 자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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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느 때보다 신이 나서 외출 준비를 마쳤다. 스케일이 성(城) 단위지만, 남자친구 집에 놀라 가는 일이었다. 신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말을 타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데, 왕의 직무와 주변인의 눈총으로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왕이 봉신을 수시로 찾아가면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무튼, 깨끗하게 씻긴 모닝스타에 깨끗하게 닦은 안장을 올리고 깨끗하게 손질한 무기를 걸어두니 완벽했다.
“보통은 깨끗한 옷과 깨끗한 보석을 챙기는데...”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었다. 연애를 해도 로벨은 로벨이었다. 여성성이 깨어나지 않아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서 깨어날 일도 없는 모양이다.
“수행원 없어도 돼요?”
“바로 옆집이잖아.”
로벨의 칼솜씨와 모닝스타의 달리기 속도를 생각하면 지키는 게 아니라 지켜줘야 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도 체통이 있는데...”
“괜찮아. 괜찮아. 재밌게 놀다 올게.”
괴물 늑대 가죽을 둘둘 말아 모닝스타 엉덩이에 묶었다. 그 때문인지 아야와 이야카가 칭얼거리며 달라붙지 않았다. 화난 건지 겁먹은 건지 조금 헷갈렸다.
“오늘 돌아오라곤 안 할게요. 호른 경도 체면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오셔야 해요. 점심때까지요. 조금이라도 늦으면 울프 용병단을 보낼 거예요.”
어린 집사가 몇 가지 당부했다. 통금시간 강조하는 엄한 아버지 같았다. 로벨은 기꺼이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썩 신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