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96화 (596/605)

596화. 전통

애꾸눈이 지휘하는 ‘북군’ 제1중대와 찰드 촌장네 아들 사냥꾼 무리와 마녀 키르케가 북쪽 숲 경계면에 모였다.

인원이 늘어난 만큼 주먹구구식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임시 지휘소를 세우고 경계조와 순찰조를 운영했다. 사냥이 아니라 숫제 전쟁 분위기였다.

“고작 늑대 가지고...”

“고작이 아니야. 펄프 대장이 죽을 뻔하고 공왕 폐하가 간신히 쫓아냈다고.”

간신히는 아니지만,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가까이 불러 조그맣게 물었다.

“내가 생각한 게 맞지?”

“직접 보기 전에는 장담 못하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

마녀 키르케는 고깔모자와 지팡이, 검정색 꼬뜨로 제대로 된 마녀 복장을 갖추었다. 기분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마법을 쓰기 위한 장비였다.

“그럼 새로운 수호자일까?”

“마도의 수호자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기사님의 부록 같은 거잖아요.”

“부록?”

“그러니까... 기사 종자 같은 거요.”

로벨은 이해가 안 되어서 미간을 좁혔다. ‘네 발로 뛰는 기사 종자 둔 적 없어’ 마녀 키르케는 좀 더 쉬운 비유를 찾아 버벅이다가 버럭! 소리쳤다.

“아무튼 마도의 수호자 아니에요!”

“뭐, 그럼 다행이지만...”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무적무패 왕도 수호자는 꺼림칙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적은 아무래도 상대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인지의 세계에서 온 괴물인 것은 맞지? 창칼로 처치할 수 있을까?”

로벨이 막사 구석을 힐끔 보았다. 오랜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바바 야가의 창이 있었다.

“인지의 세계에서 빚은 무기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어요.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설득해서 보냈으면 해요.”

“설득? 늑대인데?”

“머리가 좋은 늑대잖아요.”

처치하든 설득하든 일단 잡아야 했다. 로벨은 주둔지가 정리되자 소대장 이상 지휘관을 소집했다. 부대 규모가 커진 만큼 지휘관도 15명이나 되었다.

“사냥이 토벌이 되었는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이해해.”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금방 이해했다. 로벨은 첫 전투 참가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늑대의 숫자와 행동패턴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대상은 늑대성의 신령한 늑대였다.

“혼자 상대하지 말고 꼭 나를 불러. 평범한 무기로 해칠 수 없으니까.”

외팔이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어떤 놈이 괴물 늑대인지 어떻게 압니까요?”

“음... 그냥 보면 알 거야.”

크기도 크기지만 인지의 생물 특유의 존재감이 있었다. 고블린을 처음 봐도 고블린이란 것을 아는 것과 유사했다. 본디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질문은?”

워낙 고참들이 모여서 싸움개가 떠밀렸다.

“저기, 폐하, 혹시 늑대를 잡으면 포상이 있습니까요?”

“그야 물론이지.”

로벨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고 노려보았지만 꿋꿋하게 약속했다.

“늑대 한 마리 잡으면 1페닝 줄게.”

2, 30마리로 추정되니 2, 30페닝이었다. 소대 단위로 나눠도 몇 푼 안 되지만 늑대고기에 맥주 한 잔 곁들일 정도는 되었다. 의욕이 살짝 샘솟았다.

“그럼 이제 시작하자.”

“Yes, My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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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작전은 ‘몰이’ 그대로였다.

군사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포위, 수색, 박멸 등으로 말할 수 있지만, 어떤 단어든 숲 바깥에서 조금씩 조금씩 공간을 줄여가는 것은 같았다.

“어제랑 같잖아요?”

“아니야. 규모가 다르잖아.”

역시 ‘군사적’이라 하면 웅장했다. 최소 10명 단위로 행동하며, 예비대와 보급대가 바짝 붙어 쫓아갔다. 덕분에 난리가 난 것은 숲 속 친구들이었다. 사슴 한 무리, 족제비 두 마리, 토끼 한 가족이 집을 잃고 쫓겨났다. 펄프 대장의 강력한 통제가 아니었으면 그 중 몇 마리는 오늘 저녁찬이 되었을 것이다.

“정신 단단히 차려라! 슬슬 나타날 때가 됐다!”

자유로이 사는 것 같은 짐승도 자신의 영역이 있었다. 새끼를 보호할 안전한 거점과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는 곳이다. 무리 짓는 짐승이면 더욱 그러했다. 북쪽 숲을 가르는 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추측했다. 그 추측은 정확히 맞았다.

아우우우우우우-!

헐벗은 가시덤불 어딘가에서 하울링이 울렸다.

“저쪽 정찰대인가?”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만지다가 빠르게 말했다.

“저건 무시하고 계속 이동해.”

페닝을 탐한 일부 소대가 방향을 바꿨지만 펄프 대장의 40년 경력이 응축된 쌍욕을 먹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하울링이 있었는데 방향이 이상했다. 일정 거리와 방향을 벗어나지 않았다. 싸움개가 굵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우리를 유인하려고 한 건가?”

“뭐? 늑대 주제에?”

시간이 지나자 의혹이 확신이 되었다. 포위망을 흔들려는 늑대들의 수작이었다. 평범한 늑대가 아니란 말이 이해되었다. 허나, 아직은 포위범위 안이었다. 이대로 계속 몰면 한곳에서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우스운 말이지만, 일자무식 두 발 늑대가 아는 것을 영리한 네 발 늑대가 모를 리 없었다. 어느 순간 하울링이 사라졌다. 북쪽 숲에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거 갑자기 싸한데...?”

이성이 아니라 본능으로, 지식이 아니라 직감으로 다음 상황을 예측했다. 울프 용병단은 숏 스피어를 앞으로 기울이고 둥글게 뭉쳤다. 애꾸눈이 하나뿐인 눈을 내리깔았다.

“...온다.”

숲 그늘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빨랐다. 굉장히 빨랐다. 앙상한 나무줄기를 좌우로 빗겨가며 쏜살같이 울프 용병단을 덮쳤다.

“이 개자식이!”

개과(科) 짐승이라 욕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험악하긴 했다. 검은 늑대의 주둥이는 좌우로 갈라진 40개의 화살촉이 되어 ‘주걱턱’ 톰슨의 목을 노렸다.

허나, ‘주걱턱’은 정예 울프 용병단에서 정예 ‘북군’ 1중대에 소속될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목덜미에 송곳니가 박히기 전 숏 스피어를 세워 늑대 배때기를 뚫었다. 힘줘서 찌르지 않았는데 절묘한 카운터가 되어 내장을 찢고 등뼈를 부수었다. 즉사였다. 그러나 관성은 어쩔 수 없었다.

시속 31마일로 달려온 중량 120파운드 늑대는 죽은 채로 ‘주걱턱’을 덮쳤다. 무게를 감당 못한 주걱턱은 그만 창을 놓고 넘어졌다. 불가항력이지만, 치명적이었다. 검은 늑대를 뒤쫓아 온 작은 늑대들이 ‘주걱턱’을 차례로 덮쳤다. 오른팔에 한 마리, 왼쪽 다리에 한 마리, 그리고 검은 늑대가 물지 못한 목덜미에 한 마리... 새빨간 피가 하얀 눈밭에 뿌려졌다.

“뭘 보고 있냐! 빨리 죽여!”

여기까지 고작 7, 8초였다. 1중대 ‘주걱턱’ 동료들은 뒤늦게 정신 차리고 가진 무기를 휘둘렀다. 원한을 갚는데 정신이 팔린 늑대들은 창에 찔리고 도끼에 갈라져 쓰러졌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 주걱턱! 괜찮아?!”

주걱턱의 몸이 들썩였다.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구멍 난 목에서 핏물이 뿜어졌다. 애꾸눈이 코와 입에 손가락에 대었다.

“...죽었어.”

이와 같은 공격이 몰이하는 인간 진영 곳곳에서 벌어졌다. 주걱턱 외에도 용병 셋이 다치고 사냥꾼 하나가 죽었다. 늑대를 13마리 잡았지만, 옛 신께서 가라사대 인간과 짐승의 목숨값은 같지 않으니 인간이 손해였다.

“우리 울프 용병단이라 이만한 건지, 어설프게 마을 주민을 모아왔으면 두 자릿수가 죽었을 겁니다.”

위로가 되진 않는 위로였다.

“저대로 놔뒀으면 봄과 가을에 얼마나 불어났을지 짐작조차 안 가는군요. 숲지기를 다시 고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래도 조언은 일리 있었다. 숲지기 역할은 나무꾼과 채집꾼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사냥이 끝나면 생각해 볼게.”

전쟁의 끝이 다가왔다. 적은 영리하고 용감하지만, 병력, 무기, 훈련, 기술, 경험에서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린 새끼 늑대를 데리고 몰래 빠져나가려 시도한 어미 늑대가 있었으나 숙련된 사냥꾼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만물의 영장부터 보잘것없는 개미까지 무리 짓는 짐승은 모두 같았다. 어린 객체가 희생되는 단계에 오면 그 집단은 끝난 것이다. 폐위된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와우... 진짜 큰데?”

“펄프 대장 대가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을 만하네.”

“안 씹혔다. 아직 살아있다.”

“머리통을 물렸는데 돌머리라 살아난 거 아니었수?”

“누가 그런 헛소리를... 허풍쟁이! 또 너냐?!”

입은 가벼워도 손발은 묵직했다. 창을 세우고, 쇠뇌를 겨냥하고,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북쪽 숲의 고고한 왕은 도망가지 않았다. 실은 못 간 것이다.

“옆구리와 앞발은... 공왕 폐하 작품인가?”

펄프 대장이 ‘앞발은 내 작품이야!’ 주장했지만, 용병들은 입 밖에 꺼낸 것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저 상태면 나도 해볼 만할 것 같은데...”

“아셔라. 공왕 폐하한테 맡긴다.”

칼밥 먹고 사는 사내가 호승심을 버리기란 힘들었다. 자신이 이길 것 같은 싸움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펄프 대장의 지시에도 슬그머니 거리를 좁혔다. 괴물 늑대가 먼저 덤비면 고용주의 명령을 지키면서 우두머리를 처치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오늘 밤 주인공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을 떨쳐 훗날 소대장, 중대장이 되는 발판이 될 수 있었다.

“그만! 도발하지 마라!”

칼밥을 가장 많이 먹은 펄프 대장이 모를 리 없었다. 욕심을 담느라 겁을 버린 부하들을 막았는데, 약간 늦었다. 괴물 늑대가 흉악한 몸뚱이를 움직였다.

“카아하악-!”

한 번의 도약으로 7, 8피트를 뛰었다. 옆구리에 구멍 난 몸놀림이 아니었다. 갑자기 움직여서 당황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한 발 더 나간 용병은 대응하지 못했다.

“이 시발 것이!”

허풍쟁이의 허풍은 잘못되었다. 괴물 늑대는 머리통을 씹지 않았다. 이빨이 날카롭고 악력이 대단해도 철로 된 투구를 씹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머리통을 통째로 삼키고 목을 씹었다. 늑대 입속에서 비명이 울렸는데 좌우로 한번 흔들자 금방 사라졌다. 머리도 사라졌다.

“괴, 괴물!”

좌우 옆자리 용병이 분노 반, 공포 반으로 창을 찔렀다.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매일 같이 기름칠한 창이었다. 억센 힘을 실어 괴물 늑대의 목과 등을 찔렀다. 창끝이 두 마디쯤 파고들었다.

“뭐, 뭐야! 뭐가 이렇게 단단해!”

털가죽을 치우고 보면 사실 두 마디도 아니었다. 괴물 늑대는 몸을 비틀어 두 용병을 쓰러트렸다. 앞발로 사슬 갑옷을 찢고 몸통을 굴려 깔아뭉갠 후 훌쩍 뛰어 물러났다. 피에 젖은 주둥이가 처음보다 몇 배 더 살벌했다.

“내가 기다리라고 했잖아.”

“옛 신이시여!”

핏빛으로 점철된 끔찍한 분위기에 천사 나팔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벨 왕이 도착했다. 질린 용병들이 얼굴이 밝아졌다. 우두머리는 우두머리가 상대하는 게 오랜 전통이었다. 용병들 표정이 다시 사나워졌다.

‘넌 이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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