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신령
굴뚝을 따라 올라간 수증기가 찬 공기에 응고되어 처마를 따라 방울방울 떨어졌다. 기온이 빙점 이하로 낮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면 처마 끝에서 조금씩 얼어 고드름이 되기도 했다.
“자연의 신비함이란.”
용이 불을 뿜고 요정이 숨바꼭질하지 않아도 이 세상은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지혜는 세상의 신비를 1%도 파헤치지 못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네요.”
어린 집사는 서류를 말아 봉인줄로 묶고 책장에 올렸다. 성 밖의 농부들은 눈이 녹고 싹이 나는 걸로 봄을 체감하는데, 늑대성의 총각 집사는 상반기 예산안으로 봄을 실감했다.
“이번 겨울에는 굶어 죽은 사람이 없어요. 뉴 로드릭 마을에 얼어 죽은 노인이랑 늑대한테 물려 죽은 외지인이 하나씩 있긴 한데, 촌장이랑 그람 형제가 잘 수습했어요.”
“늑대한테? 어쩌다가?”
늑대들은 어지간해서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다. 인간의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닌데다 쇠로 된 무기를 가지고 여럿이 무리지어 다니기에 위협적이었다.
싸워서 이기더라도 부상이 심하면 굶어 죽는 것이 야생의 법칙이라 포식동물끼리 싸우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양이나 닭 같은 가축이 필히 있으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봄가을에 하는 구제사냥도 가축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저 식충이들 때문이죠.”
“아야랑 이야카?”
로벨이 깜짝 놀라 식충이를 보았다. 엉덩이 깨물고 하울링하는 말썽쟁이긴 하지만 사람을 사냥하진 않았다.
“늑대성의 늑대는 신령하다는 소문이 돌아서 아무 늑대를 쫓아다니는 바보들이 있어요. 자기 영역을 기웃거리는데 가만있겠어요? 이맘때면 새끼도 배었을 텐데요.”
“아, 그런 거구나.”
아야와 이야카가 사람을 해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인명피해가 나오게 둘 수 없으니 신령한 늑대는 늑대성에만 있노라 포고문을 내렸다.
“가장 좋은 것은 사냥이죠. 봄이잖아요?”
“응. 봄이야.”
꼭 구제가 아니어도 고기를 얻기 위해 사냥할 때가 되었다. 결심이 서자 기다렸다는 듯 펄프 대장이 찾아왔다. 악마나 호랑이라서가 아니라 매일 하는 정기보고 때문이다.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이런 일은 조지나 볼포스가 하면 안 됩니까?”
왕의 용병대장으로 로벨과 어린 집사 다음 가는 권력자지만, 현실은 그냥 늙은 친구였다. 격의가 없어서 대접도 못 받는 그런 오래된 친구 말이다.
“응. 안 돼.”
펄프 대장은 긴 한숨을 쉬었다. 봄이 와도 찬바람은 죽지 않았다. 늑대성의 높은 언덕은 흰머리 성성한 노인이 오르기 조금 버거웠다. 그러나 로벨이 매정한 것은 아니었다.
“펄프 대장이 아니면 누가 울프 용병단을 통제해?”
영리한 용병과 용감한 용병은 많았다. 그러나 존경받는 용병은 극히 드물었다. 여기서 ‘존경’은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경력과 명성, 다시 말해 용병식 정통성이었다.
“그럼 전 언제 은퇴할 수 있습니까?”
“그만 살고 싶을 때?”
어린 집사가 중얼거렸다. 농담 같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그건 됐어. 새해 기념으로 사냥 가자.”
“사냥... 말입니까?”
펄프 대장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거듭 말하지만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다.
“사냥꾼을 고용하거나 덫을 놓는 게 어떻습니까?”
“에이, 그러면 페닝이 많이 들잖아. 영악한 늑대들은 덫에도 안 걸리고.”
로벨이 기각하자 어린 집사가 반박했다.
“아야랑 이야카는 고기 한 덩이만 둬도 구덩이에 냉큼 뛰어드는데요?”
“그리고 꺼내달라고 밤새 낑낑거립니다. 그 덩치를 끄집어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걔네는 좀... 순진하잖아.”
“멍청하다, 모자라다, 띨박하다, 왜 말을 못 해요.”
세상의 모든 늑대가 아야와 이야카 수준이라 해도, 군사훈련 겸 영내순찰을 위해 사냥은 필요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숲 속 깊은 곳에 병력을 보낼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한 번 사냥하면 영지민도 안심하잖아. 가끔은 밥값 해야지.”
고용주의 말은 옳지 않아도 옳은 법이다. 늙은 친구는 할 말이 없었다.
“고참병 위주로 모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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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용병을 잡고 사냥을 좋아하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그렇다 대답했다.
영주의 허락이 없어서 못할 뿐, 고기와 가죽을 얻을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로벨 왕은 특히 포상이 후한 편이라 더욱 그러했다.
“길이 엉망이다. 발밑을 잘 살피고 움직여라.”
“휴우... 이 나이에 늑대사냥이라니...”
그러나 먹고 살만한 중산계급쯤 되면 사냥은 귀찮은 행사였다. 고기는 가축을 잡으면 되고, 성과는 노력에 비해 짜기만 했다. 그래서 펄프 대장, 허풍쟁이, 겁쟁이 데비 등은 시큰둥했다.
“변했네. 변했어. 옛날에는 시키지 않아도 사냥 가자고 조르더니만, 요즘은 게을러 빠져서는...”
책상 앞에만 있으면 몸 상한다는 이유로 끌려나온 어린 집사가 투덜거렸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이 모두 부자는 아니고, 도시의 구정내를 맡다가 숲 속 맑은 공기를 쐬니 기분도 풀렸다.
“여기 늑대 발자국입니다요!”
그렇게 적극적인 용병 하나가 늑대 흔적을 찾았다. 눈이 녹지 않아 생각보다 쉬웠다.
“꽤 큰데요?”
경험 풍부한 용병이 크기를 가늠했다. 기형적으로 발바닥만 자란 늑대가 아니면 5피트 덩치의 성체였다.
“작년 가을에 다 잡아 죽인 줄 알았는데...”
“놓친 놈이 있었겠지. 아니면 외지에서 굴러 온 놈이거나.”
눈짓을 교환한 후 대열을 조금 넓혔다. 늑대는 영악한 짐승이었다. 쇠 냄새를 맡고 도망갈 가능성이 높았다. 넓게 포위해 몰아가는 게 정석이었다.
한숨만 푹푹 쉬던 허풍쟁이, 겁쟁이 등도 크로스보우를 장전해서 버트를 겨드랑이에 끼었다. 막상 사냥이 시작되니 혀끝이 간질간질한 게 흥분되었다.
로벨은 평소 같은 전개를 예상했다. 늑대를 발견한 용병이 기뻐서 소리치면 숲 곳곳에 흩어진 용병이 포위망을 좁히고 숙련된 사수가 기회를 보아 마무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은 시작부터 빗나갔다.
“여기 늑대가... 으아악!”
“아우우우우우-!”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포상을 받게 되어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야, 당한 거야?”
“어떤 멍청이가!”
용병들은 비명이 난 곳으로 빠르게 모였다. 여기까지는 상정범위였다. 보통은 인간을 피해 도망가지만 오래 굶주렸거나 새끼를 보호할 때는 먼저 덤비기도 했다.
“이, 이쪽에도 있다! 우와왁-! 저리 꺼져-!”
그때, 반대쪽에서도 비명이 나왔다. 베테랑 용병도 경험하지 못한 일에는 혼란을 느꼈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허풍쟁이! 겁쟁이! 더벅머리! 지금 소리 난 곳으로 가라!”
펄프 대장이 쩔렁쩔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10년 넘게 손발을 맞춘 용병들은 즉시 움직였다. 그러나 ‘적’도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도 늑대가 있다!”
“이 새끼들이! 겁도 없이!”
“우와아악! 늑대닷-!”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싸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쯤 되자 백전노장도 당황하여 ‘전부 짜고 날 속이는 거 아니야?’ 의심했다. 그 의심은 금방 불식되었다. 펄프 대장 앞에도 늑대가 나타났다.
“허, 무슨 늑대가...”
펄프 대장의 눈꼬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어이가 없으니 놀라지도 않았다. 아야와 이야카도 잘 먹어서 한 덩치 하는데, 이놈에 비하면 아직 강아지였다. 과장 좀 해서 말 대신 타고 다녀도 될 괴물이었다.
“네놈이 새로운 대장이냐?”
“크르르릉...”
펄프 대장은 크로스보우를 겨냥하고 천천히 옆으로 걸었다. 저런 괴물과 일대일로 싸울 생각 없었다. 기회를 봐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대장인 줄 알고 잡으러 온 모양인데...”
늑대는 사람 말을 알지 못했다. 혹은 알아도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펄프 대장이 도움을 청하기 전에 달려들었다. 카학-!
“제길!”
주둥이를 벌리니까 2배쯤 커보였다. 펄프 대장은 발작하듯 방아쇠를 쥐었다. 너트가 눕고 시위가 풀리며 철제 쿼럴이 탄성으로 쏘아졌다. 거리는 가깝고 표적은 거대했다. 활을 쏘면 두 발 맞히는 늙은이지만 쇠뇌는 달랐다. 늑대 오른쪽 앞발에 쇠촉이 박혔다. 그러나 저지력이 모자랐다. 강철 프로드로 된 아바레스트를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절구통 같은 주둥이가 펄프 대장을 덮쳤다.
“큭-!”
빈 쇠뇌를 내밀어서 주둥이를 막았지만, 150파운드에 달하는 충돌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연장을 다루는 두 손을 대가로 안정감 있는 네 발을 잃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다.
크르르- 크르르릉-
펄프 대장은 벌러덩 넘어져서 필사적으로 늑대 머리를 밀었다. 엄지손가락만한 송곳니가 무섭게 좁혀왔다. 침방울이 쇳물처럼 뜨거웠다.
“늑대란 것들은... 연장자를 공경할 줄 몰라... 내 나이의 10분지 1도 안 되는 것이... 그리고...”
절체절명의 위기인데 버틸만한 듯했다. 헛소리가 술술 나왔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난 대장이 아니라고 했잖아, 이 좆만아!”
“그대로 있어!”
진짜 대장이 나타났다. 거대한 늑대가 훅- 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펄프 대장은 갑자기 가벼워진 중력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설탕보다 달았다.
“펄프 대장, 괜찮아?”
고개를 조금 돌리니 이쪽 괴물이 보였다. 로벨이 창을 기울이고 성난 모닝스타를 다독였다.
“전 괜찮습니다. 제 쇠뇌는 그렇지 않지만요.”
로벨은 쇠뇌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깟 무기는 몇 개든 사줄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
“어? 아직 살아있네?”
인간 괴물과 말(馬) 괴물이 합심해서 창을 찔렀는데 죽지 않았다. 확실히 보통 늑대가 아니었다.
“우리 이야카보다 큰데?”
로벨은 창을 붕붕- 소리 나게 돌린 후 자세 잡았다.
“저런 크기면 신령한 늑대라 오해할만해.”
전세가 바뀌었다. 앞다리와 옆구리가 찢어진 늑대는 꼬리를 내리고 슬금슬금 숲 속으로 이동했다. 허나, 늑대 괴물이 그랬듯 인간 괴물도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우리 집 늑대가 더 잘생겼어!”
어깨를 당겨 창을 힘껏 던졌다. 새하얀 창날이 차가운 바람을 찢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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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착잡한 표정으로 부상자를 보았다. 천만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지만, 사지 멀쩡한 사람도 없었다. 크고 작은 타박상은 기본이고, 손가락이 절단된 용병도 하나 있었다.
“활쏘기에 참가 안 한 것은 자신이 없어서죠?”
“뭐?”
“그게 아니면 어떻게 코앞에서 놓쳐요?”
로벨은 억울한 듯 어깨를 올렸다가 그냥 내렸다. 랜스가 얼마나 던지기 힘든 물건인지, 나무가 얼마나 빽빽한 장소인지 변명하지 않았다. 괴물 늑대를 놓친 것은 사실이었다.
“우두머리를 쫓아내서 피해가 이만한 것이오.”
펄프 대장이 고용주를 두둔했다. 괴물 늑대가 도망가자 다른 늑대도 따라 사라졌다. 자칫하면 여러 사람 죽을 수 있었다.
“무적의 울프 용병단이 늑대한테 당하다니!”
“어쩔 수 없잖수. 쟤네가 원조인데.”
허풍쟁이가 중얼거리자 낄낄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살만하니 다행이었다.
“병사를 늘리고 무장을 제대로 갖춰서 다시 오죠.”
“그리고 키르케도.”
“키르케요? 왜요?”
로벨은 그냥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신령한 늑대’를 잡으려면 사냥꾼보다 마법사의 힘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