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92화 (592/605)

592화. 소란

열사(熱沙)의 땅이 가까운 모나카 왕국 겨울과 북극이 가까운 볼탄 반도 겨울은 이름만 같은 별개 계절이었다.

인어해 남쪽에서는 그토록 보기 힘들던 눈이 북쪽 땅을 밟는 순간 펑펑 쏟아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볼탄 반도는 따뜻한 편이오. 네일 공국을 지나 북해 끝자락으로 가면 바다가 얼어 배도 다니지도 못한다오.”

배에서 내리지 않는 이안 선장이 위로했다. 눈길에 수레를 끄는 용병에게는 조롱이었다.

“이 길만 지나면 집이다! 다들 힘내라! 거기 너! 네 것만 챙기지 말고 같이 밀어!”

전리품, 약탈품, 쓰고 남은 보급품, 페닝 주고 사온 기념품, 전사자 유품, 부상자와 부상자 물품 등을 내릴 때쯤 로벨 왕과 울프 용병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로드릭 시티에 전해졌다. 적막한 겨울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얼마나 기쁜지 눈 쓸던 빗자루와 요리하던 국자를 그대로 가지고 나온 시민이 있었다. 울프 용병단의 가족과 친구들이었다.

“여보! 여보! 여기야! 여기 봐!”

“어? 어어! 이 자식! 살아왔구나!”

와이프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신혼 용병, 어린 아들을 번쩍 들어 목마 태우는 아빠 용병, 어릴 적 친구들과 주먹을 나누는 총각 용병 등등. 로드릭 시티로 가는 동안 꾸밈없는 진짜 개선식이 펼쳐졌다.

“이게 바로 고향이야.”

대열이 헝클어지고 이동이 지체되었지만 기분이 좋은 로벨은 제지하지 않았다. 현명한 결정이었다. 로벨의 가족도 마중 나왔으니 말이다.

“공왕 폐하! 키르케! 기타 등등!”

“컹컹컹! 컹컹!”

어린 집사와 늑대 남매가 인파를 헤집고 달려왔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세 마리 짐승을 반겼다.

“어서 와. 보고 싶었어.”

“엥? 그건 제가 할 말이죠. 어서 오세요! 키르케도 어서 와요! 애꾸눈도 고생 많았어요!”

로벨 옆의 호른 경이 헛기침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 번으로 안 되자 두 번, 세 번 반복했다. 어린 집사는 마지못해 콩알만하게 ‘오시든가 말든가...’ 옹알거리고 외팔이, 허풍쟁이, 싸움개, 과묵한 몬트 등을 열렬히 반겼다. 처가살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잇,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 냄새도 좀 나고. 빨리 가요! 먹을 것과 씻을 물을 준비했어요!”

“천천히 해. 천천히. 뒷정리가 남았잖아.”

정신없는 와중에도 할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늑대성으로 물자를 옮기고, 밀린 급료와 전투 수당을 지급하고, 전사자 유가족을 위로했다. 골치 아픈 것은 로드릭 시티에 거주하지 않는 파도성 용병과 에르나 왕국 용병이었다. 소속 없는 무장 집단은 그 자체로 근심거리였다.

“주머니가 두둑하니까 사고 치지는 않겠지만...”

어린 집사는 젖은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새 옷을 꺼내주었다. 품위 있게 입으려면 옆구리와 허리를 바느질해야 하지만, 품위보다 품이 널널한 게 좋았다.

“겨울이라 일거리도 없고, 고향 갈 생각도 하지 않을 텐데, 그냥 모나카 왕국에 두고 오지 그랬어요?”

“그건 좀 그렇잖아.”

로벨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마네킹에 걸었다. 갑옷 장인은 날 때부터 입은 것처럼 편한 갑옷이라 우기지만, 진짜 날 때처럼 편할 수 없었다. 가벼운 면옷을 입으니 날 것 같았다.

로벨은 백 플레이트, 카우터, 럼프 가드 등 입었을 때 살피지 못하는 곳을 확인했다. 긁히고 찌그러진 곳이 조금 있는데 심하지 않았다.

“그 먹지도 못하는 거 그만 보고요! 어쩔 거예요?”

“먹지는 못해도 먹을 것을 구해주는 물건이야.”

로벨의 반박에 어린 집사가 ‘오?’하며 감탄했다. 깡통도 나이를 먹으니 성장한 모양이다. 저대로 살다가 녹슬 줄 알았는데...

“어린 집사 말대로 주머니가 두둑하잖아. 우리 도시에서 페닝 쓰고 세금 내니까 좋은 일 아니야?”

“오오?”

어린 집사의 감탄이 더욱 커졌다. 로벨은 우쭐해서 계속 떠들었다.

“정식으로 팔레모 항을 양도받기 전까지 군사력을 유지하는 게 좋아. 즉시 고용할 수 있는 용병이 가까이 있으면 좋잖아. 내년 봄까지는 현상을 유지하고, 그다음에 쫒아내든가 정착시키든가 하자.”

어린 집사가 손뼉으로 정답을 맞혔다.

“호른 경이 말해준 거죠? 그렇죠?”

“...함께 생각한 거야.”

페닝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만큼 좋지 않기에 펄프 대장을 시켜 도시 안팎 치안을 강화하기로 했다. 마침 겨울이니 야간근무를 5경으로 늘리고 순찰을 수시로 돌리면 되었다. 불만이야 나오겠지만, 그걸 찍어 누르기 위한 것이 권력이고 재력이었다.

“그럼 파울로 왕자는요?”

고향에 돌아와 기쁜 사람이 있으면 고향을 떠나와 슬픈 사람도 있었다. 우정의 담보 파울로 엠마누엘은 가족 한 명, 시종 한 명 없이 추운 겨울을 맞이했다.

“알폰소 경을 옆에 붙여뒀어. 이것저것 배울 것도 많고, 친해지면 좋을 테니까.”

어린 집사가 자세를 바꿔서 팔짱끼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나오는 자세였다.

“그 기사한테 팔레모 항구 관리를 맡길 거예요?”

“그렇게 약속했잖아.”

“그 항구의 가치는 알고 약속한 거죠?”

“그야 물론이지!”

로벨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러나 혹여 구체적인 숫자를 물을까 꼬리를 내렸다.

“아마도.”

어린 집사는 날카로운 숫자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까칠한 의심을 꺼냈다.

“에르나 왕국 출신에 나름 명문가잖아요. 장남은 아니라지만, 믿어도 될까요?”

로벨은 집무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절이 바뀌도록 비어 있었는데 먼지 한 톨 앉지 않았다. 어린 집사의 꼼꼼함을 알 수 있었다.

“상속 가능한 봉토가 아니잖아. 누구든 마찬가지야.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배신한다면 에르나 왕국이 아니라 엠마누엘 왕가에 붙을 테니까.”

로벨치고 꽤 매정한 소리였다. 어린 집사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누구한테 맡겨도 안심할 수 없으면,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알폰소 경이 가장 나아.”

“그게 공정하니까요?”

“그게 안전하니까.”

로벨은 꿈과 희망과 쇳가루를 먹고 사는 요정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도시를 태우고 약탈한 기사잖아. 주변 제후들이 싫어할 거야. 자연히 배신할 가능성도 낮아지고.”

“우와...”

어린 집사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것도 호른 경인가요?”

“내 생각이야!”

호른 경은 호른 성과 자작나무 숲이 있고, 조루아 경은 폭풍성을 물려받을 테니, 알폰소 경 말고 적임자가 없었다. 로벨치고 그럴듯한 정치판단이었다.

“집 나가면 철든다더니, 우리 폐하가 달라졌어요.”

“에험! 내가 원래 철 좀 들었어.”

기사라서 철을 많이 들긴 했다. 어린 집사도 인정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공왕 폐하 뜻대로 진행하죠.”

로벨은 의자에 앉아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늑대남매가 반사적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실감나네.”

어린 집사가 또 뭐냐는 듯 쳐다보았다. 로벨은 소매를 걷고 얼추 마른 머리카락을 묶었다.

“이제 집에 돌아온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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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시티는 계절이 무색하고 쌓인 눈이 머쓱하게 활기찼다. 오늘만 사는 용병들이 아낌없이 페닝을 뿌렸기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페닝은 마법과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도 졸리지 않고 밤새워 일해도 지치지 않으며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자아냈다. 술도가는 매일 같이 밀려오는 술 주문에 기쁨의 비명을 질렀고, 사창가는 장사 시작 이래 처음으로 손님을 돌려보냈다. 재화가 풀리면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 경제 상식이라 시장 상인, 대장장이, 무두장이, 제빵사, 목수 등도 덩달아 바빠졌다.

“이 자식이! 공왕 폐하 도시에서 칼부림을 해?”

“넌 교수형과 참수형 중 하나니까 각오해라.”

페닝과 술이 있는 곳에 사건사고가 있는 것도 상식이라 그만큼 범죄도 늘어났다. 울프 용병단 요새 감옥이 범죄자로 가득 찼다. 죄목도 다양해서 살인, 강도, 강간, 폭행, 사기 등이었다. 방화가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장, 이제 빈방이 없는데?”

“범죄자 편의 봐줘서 뭐하게? 누울 자리 있으면 대충 집어넣어!”

“그러다 단체로 난동부리면 어쩌려고?”

여섯 개나 되는 옥사가 가득 찼으니 최소 서른 명을 잡아넣었다. 수감자 숫자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가만, 늑대성에도 감옥이 있지 않수?”

울프 용병단 요새를 짓기 전에는 늑대성에서 죄인을 취급했으니 당연히 있었다.

“성은 그대로지만 성주가 바뀌었어.”

“성주? 왜? 계속 공왕 폐하잖아?”

“그때는 시골 기사였고, 지금은 공왕 폐하잖아. 야, 임마. 니가 왕이면 니 집에 범죄자 두고 싶겠냐?”

“...그냥 공왕 폐하 기분 나빠서 안 된다고 하면 되잖수. 왜 어려운 말로 지랄이야.”

펄프 대장은 곱게 늙게 허락하지 않는 전우들을 기꺼이 두드렸다. 외팔이가 골이 나서 ‘자꾸 때리면 은퇴하고 가만 안 둘 거요!’ 소리쳤다. 대장 대행직을 놓아야 복수한다는 것이 실로 훌륭한 군인이었다.

“흉악범은 바로 처형합시다.”

조지 솔트가 말했다. 펄프 대장의 주름을 펴주는 효자 부관이었다.

“내 재량이 아니야.”

“어린 집사를 설득하시죠. 성문 앞에 ‘본보기’를 걸어놓으면 치안이 좋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여름이면 벌레와 악취 때문에 못할 짓이지만, 겨울이라 오래 장식해도 문제없었다.

“그렇기야 한데...”

펄프 대장은 저 멀리 성탑 꼭대기만 솟은 늑대성을 보았다. 눈이 쌓여서 찾아가는 것이 곤욕이었다.

“...일단 이야기해보마. 저놈들 잘 관리하고 있어.”

노구를 이끌고 가파른 언덕을 오를 일은 없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노인을 공경해서는 아니고, 두 사람이 시내로 놀러 나온 탓이다. ‘덕’이 아니라 ‘탓’인 이유도 있었다. 아무도 보고 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챈 이유와 같았다.

“싸움이야! 싸움 났다!”

“또 용병놈들이냐?”

“아니! 이번에는 기사 나으리야!”

펄프 대장의 주름이 깊어졌다. 로드릭 시티에 거주하는 기사는 열이 되지 않는데, 그중 로벨 왕의 비위를 건드릴 만큼 용감한 기사는 로벨 로드릭 경 하나뿐이었다.

“무슨 왕이란 인간이 맨날 사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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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대장의 오해를 애써 바로잡자면 사고 친 것은 로벨이 아니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한 용병이 가게 주인을 괴롭히고 있어 끼어들었을 뿐이다. 폭력을 쓴 것도 용병이 먼저였다.

“이 못된 것들이! 세금 내는 선량한 시민을 괴롭혀? 더 때려요! 아주 아프게 때려요!”

비록 ‘세금 내는’ 부분에 악센트가 있지만 어린 집사의 허락도 있었다. 로벨은 두 주먹으로 두 용병을 때려눕혔다. 맨 정신으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되는데 세 걸음도 직진 못 할 만취 상태라 아주 쉬웠다.

“저 꼴이 아니면 덤비지도 않았겠지만.”

벽에 처박힌 용병이 침을 주르륵 흘렸다. 로벨은 장갑을 벗어 대충 털고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서는 못 마시겠어.”

“그러게 그냥 성에서 마시라니까요. 꼭 시내에 나와야 해요?”

로벨은 후드를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용병 입장에서 퍽 억울한 일이었다. 으리으리한 판금갑옷을 입었으면,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보였으면 아무리 취했다 한들 무적무패 왕에게 덤비지 않았을 것이다.

“지미네 여관으로 가자.”

어린 집사가 투덜거리며 구경꾼을 몇 명 지목했다. 울프 용병단이 오면 잘 설명하라고 당부하고 10로닝 동전을 몇 개 주었다. 금전에 예민한 친구라 바로 변명이 나왔다.

“내 땅이고 내 사람이야. 내가 직접 봐야지.”

“호른 경이랑 약속 잡은 건 아니고요?”

“아니라니까!”

호른 경도 오랜만에 집에 와서 바빴다. 유능한 집사가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작 불렀을 것이다. 구 시가지로 두 블록쯤 갔을까, 또 다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왜 순서가 바뀐 거죠? 저희 쪽에서 먼저 주문했는데요? 시체 파는 상인은 상도덕도 죽여서 파나요?”

“이, 이 여자가 무슨 말을...!”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상회에 정식으로 재판을 요청할 거예요. 제가 재판에 쌓인 게 많은 거 알아요?”

도시가 시끌시끌하니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한숨을 쉬고 걸음을 멈췄다. 당나귀가 끄는 수레 보아 이번에는 상인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사람이 낯이 익었다. 로벨보다 기억력이 좋은 어린 집사가 정체를 밝혔다.

“어라? 레이디 뮬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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