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화. 정치
로벨 로드릭 왕의 승전 소식이 남해 곳곳으로 퍼져갔다. 헌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탓에 결과만 정확하고 과정은 중구난방이었다.
“무적무패 왕이 창을 찌르니까 공작의 기사 100명이 피를 뿜고 쓰러졌다는구만.”
“어허, 그게 말이 되는가? 창 길이가 100피트쯤 되는 것도 아니고. 무적무패 왕이 고함을 지르니까 말 100마리가 놀라서 기절했다는 게 맞지.”
“역시 그게 맞는가?”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겠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들으면 배를 잡고 웃겠지만 모나카 왕국인은 진지했다. 그게 아니면 수년간 왕국을 휘어잡은 알비치 후작, 마르키시오 공작이 연달아 패배한 게 납득되지 않았다.
사실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받은 수호궁도 납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일리 산을 넘어서 마도니아 시티를 점령하고, 사기가 떨어져 회군한 마르키시오 공작을 정면에서 격파했다?”
“사상자는 백 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럼 아직도 1,100명 이상의 군사가 남았다는 말이군.”
그것도 사기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군사였다. 안토니오 왕자는 보고서를 한 번 더 읽은 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북쪽 친구들이 무적무패라 하면 벌벌 떠는 이유가 있었군. 파울로가 사람을 아주 잘 골라왔어.”
칭찬처럼 들리지만, 칭찬이 아니었다. 공멸까진 아니어도 피 좀 흘리길 바랐다.
‘승냥이를 쫓아내려고 사자를 들인 것이 아닐까.’
아무 정통성 없는 볼탄 반도 왕이니 모나카 국왕을 자처할 수는 없지만, 군사를 앞세워 이권을 쓸어 담을 수는 있었다. 팔레모 시티 하나로 만족 못해 파레초 시티나 마도니아 시티의 세금·무역권리를 요구하면...
‘...우리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라베노 시티가 불탈 차례일 수 있었다.
“공왕의 전령이 개선식을 요구했습니다.”
엠마누엘 왕가에 충성하는 군대면 하지 말라 해도 하겠지만, 외국 군대, 그것도 후작과 공작이 사라져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된 군대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위험했다. 허나, 문전박대하는 것은 더 위험했다. 안토니오 왕자는 고민 끝에 결정했다.
“시민들에게 알리고 반응을 보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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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가 애꾸눈을 흉내 내며 말했다.
“인간이란 참 간사하지 않은가.”
주위의 시선이 모였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고참이나 신참이나 이제 알 만큼 알았다. ‘저 인간 또 무슨 헛소리하려고...’ 그래도 이번에는 제법 공감 가는 소리였다.
“처음에 왔을 때는 무슨 도적떼 취급하더니만, 이기고 오니까 이러잖아.”
그 말이 맞았다. 로벨 로드릭 군을 대하는 라베노 시티 시민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겨울이 시작되어 꽃송이가 뿌려지지는 않았지만, 수천 명의 인파가 쏟아내는 열띤 환호만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지난번에 받지 못한 열정적인 남국 아가씨의 키스를 받은 병사도 있었다. 수염이 무성한 중년 아저씨의 키스도 섞여서 기겁했는데, 사소한 일이었다.
자고로 영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 위대한 승리에 기뻐하고, 지긋지긋한 내전이 끝난 것에 기뻐했다.
“엠마누엘 가문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호른 경이 모닝스타 옆에 붙어 나직이 조언했다.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기분이 좋은 하프 유니콘은 너그러이 옆구리를 허락했다.
“안토니오 왕자 말이오?”
로벨은 조금 떨어진 파울로 왕자를 보았다. 주위가 시끄러워 들리지 않는 듯했다.
“사람의 마음은 일어날 때와 누울 때가 다른 법입니다.”
마녀 키르케가 ‘화장실 아닌가요?’ 물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정적이 사라진 지금 공왕 폐하를 곱게 보지 않을 겁니다. 팔레모 항을 내어준다는 약속도 온전히 믿을 수 없지요.”
“인질이, 아니, 담보가 있잖소?”
“형제 또한 정적입니다. 잉그비아 속담을 빌려 일석이조라 여길지도 모릅니다.”
로벨은 ‘에이,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잡는 게 창칼만이 아니란 것을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래서 사랑스럽지만...’
호른 경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바이저를 내렸다.
북문에서 시작한 개선식은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 수호궁 앞에서 끝났다.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지루할 때 적당히 잘 끝났다.
이제 용병들은 보따리 싸들고 주둔지로 가거나 술집을 찾아 흩어질 것이다. 이탈자가 나올 걱정은 없었다. 페닝은 많을수록 좋고, 급료를 받으려면 볼탄 반도까지 따라가야 하니, 내일 아침이면 슬금슬금 모일 것이다. 하지만 로벨 이하 주요 지휘관은 일과가 끝나지 않았다. 안토니오 왕자의 초대를 받아 궁중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이히힛-! 모나카 왕국 술을 마실 수 있겠어요!”
책임질 것이 없는 마녀 키르케는 기뻐했지만, 책임이 많아 걱정도 많은 기사들은 불편했다. 그래도 다행히 로벨 일행만 초대한 것이 아니었다. 안토니오 왕자를 따르는 기사와 귀부인, 상인, 장인, 그리고 이교도 족장이 100여 명 참석했다. 북쪽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저 모자 좀 보세요. 거의 이야카만 해요.”
“코에다 뭘 달아 놓은 거지? 사슴뿔인가?”
저들이 볼 때는 고깔모자를 쓴 마녀와 강철판금을 두른 기사가 이상할 것이다. 로벨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와작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보다가 조루아 경에게 물었다.
“마르키시오 공작은?”
“왕자의 부하들이 데려갔습니다.”
지하 깊은 감옥에 가둘지 성탑 꼭대기에 가둘지 몰라도 좋은 기분은 아닐 것이다. 허나,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마르키시오 공작을 따르는 가문들이 있으니 목을 치면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건 뭐, 안토니오 왕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악마도 제 말 하면 찾아온다는 속담이 맞았다. 안토니오 왕자가 왕좌 앞 단상에 올랐다.
“오늘은 좋은 날이오.”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이목이 집중되었다.
“나의 벗이자 소중한 멘토(Mentor), 볼탄 반도의 왕이 대승을 거두었소.”
몇 번 봤다고 멘티를 자처하는지 모르지만, 의도는 알 것 같았다. 과시였다. 로벨에게는 ‘나는 이렇게 많은 세력이 있다’, 기사와 이교도에게는 ‘나는 이렇게 강한 북쪽 친구가 있다’ 정치적 수완이 대단한 자였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응? 무엇이 말이오?”
반면, 이쪽 왕은 수완이 없어서 문제다. 호른 경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다 그냥 하지 않았다. ‘공왕 폐하를 이용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으니 지저분한 암살 같은 것은 시도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목이 집중되어 오래 속삭일 수도 없었다.
안토니오 왕자의 찬사가 계속 이어졌다. 중간중간 자신의 업적과 엠마누엘 가문의 역사도 넣었는데 과한 정도는 아니었다. 국왕 대행 겸 연회 호스트라면 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럼 부디 파티를 즐겨주시오.”
드디어 긴 연설이 끝났다. 공용어를 몰라 절반도 알아듣지 못한 이교도 족장과 일곱 마디 이상은 요약이 필요한 기사들이라 약간 늦게 박수가 나왔다. 그래도 안토니오 왕자의 얼굴은 만족스러웠다.
“로벨 로드릭 왕, 정말 고생이 많았소.”
“기대에 보답할 수 있어 기쁘오.”
안토니오 왕자는 로벨의 측근들을 살피는 시늉하고 나직이 물었다.
“내 동생은 잘 지내고 있소?”
파울로 왕자는 함께 오지 않았다. 인질을 인질 가족 앞에 데려다 놓을 바보는 없었다. 사실 로벨은 바보라 데려오려고 했는데, 호른 경 이하 기사들이 간신히 뜯어 말렸다.
“좋은 벗으로 잘 지내고 있소.”
로벨은 순수한 마음이지만, 정치적으로 ‘벗’을 자처한 뱀 같은 왕자는 은유 내지 암시로 받아들였다.
‘여차하면 파울로를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건가?’
셋째인 파울로 왕자에게도 정통성이 있었다. 허수아비 왕을 세우려 시도한 이가 이미 있으니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 그렇다면 다행이오.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안토니오 왕자는 ‘역시 만만치 않군. 이것이 스스로 왕관을 쓴 자의 힘인가’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겉보기에는 친근해 보였다. 아니, 적어도 한 사람은 진짜 친근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다른 한 사람이 무서워했다.
모나카 왕국 연회는 에르나 왕국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술과 음식은 충분히 제공하지만, 춤과 음악은 경건했다. 치맛자락 휘날리며 아무나 손잡고 빙글빙글 도는 네일 공국 연회에 비하면 장례식장에 가까웠다.
‘더운 나라라서 움직이길 싫어하나?’
그것보다 옛 신의 교세가 강한 아이란드 왕국 영향이었다. 교회가 음주가무를 싫어하니 연회도 조용했다. 아무튼, 볼탄 반도 출신에게 재미없는 연회였다.
“이히히힛! 그래서 우리 기사님이 칼을 채앵-! 뽑으니까 다들 도망가는데...”
그런데 의외로 마녀 키르케는 인기가 좋았다. 잘생긴 로벨 왕의 정인으로 소문난 탓에 귀부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교도가 참석한 연회인 만큼 직업적인 편견도 없었다. 그리고 속물적인 진짜 이유인데, 후사가 없는 로벨 왕이니 마녀 키르케가 아들을 낳으면 왕좌의 차기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일은 옛 신이 지상에 내려와 천지가 개벽해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헛된 기대였다.
“저 친구라도 즐거우니 다행이군요.”
그런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동년배 동성 친구가 없는 마녀는 마냥 신이 났다. 쉴 새 없이 목구멍으로 사라지는 와인 탓도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무적무패 왕의 이상형이 술을 물처럼 마시는 여자라 소문날 것이다.
“경은 왜 마시지 않소? 아직도 안토니오 왕자를 의심하는 것이오?”
호른 경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티격거리던 조루아 경과 알폰소 경도 사이좋게 한 잔씩 걸친 것을 보면 지나친 조심성이었다.
“우리 중 한 명은 정신을 차려야지 않습니까.”
“에이, 그런 일 없다니까.”
“물리적인 위협만 위협이 아닙니다.”
로벨의 정체를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의 성과를 지켜야 한다.
“팔레모 항의 권리를 두고 협상하고자 할 겁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작은 집사가 크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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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의 짐작대로 은근슬쩍 실무진이 접촉했다. 팔레모 항의 양도를 ‘평생’에서 ‘20년’으로 줄이려는 시도가 한 번, 군항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시도가 한 번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린 로벨과 호른 경은 한 호흡에 한 번꼴로 ‘약속과 다르잖소!’를 외쳤다. 막상 주려니까 아까운 모양인데, 차기 국왕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두 말하지 못했다.
“교회의 영향이 강해서 좋은 점도 있소.”
“공왕 폐하께서 살아있는 복자(福者)시라...”
“그거 말고. 하루 만에 끝났잖소.”
좀 크게 잔치한다 싶으면 기본 3일인 볼탄 반도와 달리 하루 만에 끝이 났다.
“음식은 먹을 만하지만, 술이 취향이 아니오. 춤도 못 추게 하고...”
로벨이 추는 춤은 기둥 잡고 빙글빙글 도는 막춤이라 특히 안 되었다. 호른 경은 살짝 삐진 주군이 귀여워 웃었다. 그냥 웃으면 무례하니 헛기침으로 잘 숨겼다.
“늑대성에 도착하면 다시 연회를 여시지요.”
“어린 집사가 싫어할 텐데...”
“남해의 항구를 가져왔는데 싫어하겠습니까.”
왕좌에 앉은 왕자는 앞으로도 싸워야 하지만, 북쪽에서 온 기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로벨의 전쟁은 끝났다. 배를 가득 채우고 집에 갈 시간이었다.
“늑대성으로.”
“우리의 집으로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