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90화 (590/605)

590화. 보상

중장보병의 방진(方陣)은 고대 왕국 시절 최강의 전술로 불리었지만, 등자가 등장하고 중장기병이 활약하면서 점차 사장되었다.

물론, 지금도 지휘관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밀집대형은 쓰이고 있다. 허나 과거처럼 대규모로 운영하지도, 전쟁의 주역이 되지도 않았다. 태생적인 약점 때문이다.

“방진의 약점이요?”

“기동성과 방향전환이야.”

중무장한 보병이 어깨를 붙이고 발맞춰 이동하니 빈말로도 빠르다 할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긴 창과 커다란 방패로 좌우반전이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방패를 들지 않은 오른쪽 측면에서 공격받으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에 고대 왕국 장군들은 기마부대와 경보병으로 측면을 보호했는데, 등자가 발명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등자는 활과 화약처럼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말(馬)은 더 이상 소수의 유목민족과 조기교육 받은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승마가 쉬워짐은 물론이고, 기수의 발딛음이 좋아져 크고 무거운 무기를 수월하게 다룰 수 있었다. 중장기병의 탄생이었다.

이제 기병끼리 싸워서 패배하면 몸이 둔한 중장보병은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아군 기병이 이기면? 이겼으니 그냥 집에 가면 된다. 결국 전쟁은 중장기병 대 중장기병의 싸움이 되었고, 그렇게 기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다시 방진을 사용하셨네요?”

“그냥 방진이 아니야.”

적의 기마전력을 견고한 왼쪽으로 유인하고, 거리를 충분히 좁힌 후 밀집대형으로 전환했다. 방진의 두 가지 약점, 기동성과 측면보호를 모두 해결한 것이다. 설마 이렇게 할까 싶은 상황에서 해낸 것이라 기습적인 효과도 있었다.

“지금으로는 이게 최선이야.”

여담으로 방진은 총화기가 사용되면서 다시 각광받는데, 그것은 한 150년 뒤의 이야기라 중요하지 않았다-대포의 발전으로 얼마 못 가 다시 사장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로벨의 방진은 꼼수라서 두 번 써먹을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한 번은 확실히 통했다.

“찔러! 찔러!”

“깔아뭉개!”

빽빽하게 늘어서 창에 질량이 더해졌다. 앞줄에 병사가 쓰러지면 뒷줄의 병사가 자리를 메꾸었다. 천 명이었다. 천 명이 한 덩이로 움직였다. 평균 몸무게로 계산해도 16만 파운드였다. 이쯤 되면 심장에 창이 찔리나 허벅지에 창이 찔리나 별 차이가 없었다. 어디 찔리든 쓰러지면 밟혀 죽었다.

“아, 안 돼! 저건 못 이겨!”

“뒤로 가! 뒤로 가라고!”

로벨 로드릭 군은 이동속도가 학살속도였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적을 말살했다. 반대로 마르키시오 공작 중앙군은 지옥이었다. 삽시간에 100여 명이 전사하자 전열이 붕괴되었다.

“마티아 경은 무엇하는 것이냐! 적의 측면을 쳐라!”

알폰소 경이 빠지고 방치된 마르키시오 공작의 좌익-마티아 경 부대가 허둥지둥 움직였다. 허나 격전을 예상하고 단단히 박아놓은 파비스를 회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기병을 막으려고 쇠뇌병 위주로 배치한 것이 패착이었다.

좌익 지휘관 마티아 경은 본대가 버틸 시간과 지원 갈 시간을 계산한 후 결단했다.

“파비스를 포기한다! 백병전 준비! 무적무패 왕의 옆구리를 친다!”

본대가 전멸하게 둘 수 없으니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현대 전술에서 좌군은 적의 주력인 우군을 막는 방패였다. 방패도 잘 쓰면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격에 적합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물며 진짜 방패도 버리고 왔다.

“랜스!”

로벨이 크게 소리쳤다. 두 가지 의미였다.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랜스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랜스. 전자는 허풍쟁이가 가져왔고 후자는 호른 경이 인솔해왔다. 정신이 없어서 합류하지 못한 일부 기사와 기사 종자를 제외하면 총 33명이었다.

“제대로 된 고대 왕국 전술이군.”

군사학을 배운 기사가 있는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맨앳암즈(중장병) 위주로 편성한 방진은 좌측 공격에 비교적 강했다. 마르키시오 공작의 기사가 두드려도 한동안은 버틸 것이다. 로벨과 로벨의 랜스가 오른쪽을 지키고, 그 사이 적의 본대를 박멸하면 승리였다. 기사가 주인공이 된 시대에서 보기 드문 전술이었다.

“방패를 버리고 온 용병들이오. 겁나면 지금 말하시오.”

로벨이 라이트 랜스를 살짝 들며 말했다. 기사와 기마 용병이 껄껄 웃었다.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 나쁘지 않았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창을 길게 잡았다.

“그럼 한바탕 달려봅시다.”

“Charge!”

@

개인의 기량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그 드문 개인 중 하나가 기병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병을 이끄는 기병대장이었다.

우수한 지휘관이 우수한 성과를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병은 그 정도가 심했다. 정확히 치고, 적절히 빠지고, 적당히 정비하며,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재주는 교육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폭넓은 시야와 동물적인 감각, 다시 말해 타고난 재능이 필요했다. 똑같은 부대, 똑같은 상황이라도 기병을 이끄는 대장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은 유라피아 대륙 최고의 기병대장이었다.

“히리야! 히럇!”

“공왕 폐하 만세-!”

고향도, 직업도, 출신도 다른 33명의 기수가 로벨의 지휘 아래 완벽한 쐐기꼴을 갖추었다. 부대배치, 공격위치, 돌파지점, 최고속도에 이르는 타이밍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그 완벽한 차칭은 적의 비명으로 보상받았다.

“으아아아악-!”

로벨의 뾰족한 랜스가 시속 36마일 속도로 사람을 때렸다. 사슬이 깨지고 가죽이 찢기고 뼈와 장기가 갈라졌다. 그러고도 기세가 줄지 않아 20야드를 끌고 갔다. 위로는 안 되겠지만 창에 뚫려 절명한 병사는 운이 좋았다. 전투마에 치여 날아간 병사는 내장이 파열돼 피를 토했고, 말발굽에 짓밟힌 병사는 두 다리가 으스러졌다. 이와 비슷한 참사가 좌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무적무패 왕이다!”

“괴물 왕이 왔다!”

마르키시오 공작에게 안 된 일이지만, 좌익의 용병 중 상당수가 자유도시연맹 출신이었다. 과거 로벨에게 호되게 당한 자들이란 뜻이다. 로벨의 하얀 투구를 보자마자 줄행랑치는 자도 있었다.

“말을 쏴라! 말을 노리란 말이다!”

강철을 두른 기사보다 가죽 한 장의 전투마가 취약한 것은 맞다. 하지만 파비스 하나 없이 맨몸으로 노출된 크로스보우맨보단 단단했다. 몇 발 쏘지 못하고 우르르 무너졌다. 그 사이 로벨 일당은 시체길을 만들며 돌파했다.

“워! 워워!”

우두머리를 쫓아가는 것은 갈기 달린 네발짐승의 본능이었다. 로벨이 속도를 줄이자 31마리의 말도 따라 줄였다.

“피해는?”

“곤흐 경과 용병 하나가 당했습니다!”

후미에서 달린 기사 종자가 보고했다. 첫 돌격에 2명 사상이면 나쁘지 않았다. 로벨은 다른 기사를 지목해 빈자리를 채우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Charge!”

적이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재차 돌격했다. 심리적으로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뭣 모르고 맞는 것보다 알고 맞는 게 무서운 법이다.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끌어낼 겨를 없이 공격이 시작되자 부대가 와해되었다.

“자리를 지켜라! 도망가면 다 죽는다! 가지 마!”

좌익 지휘관 마티아 경이 전열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용병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했고, 영지민은 눈치를 보다 무기를 팽개치고 뛰었다. 300명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부터는 전투가 아니라 사냥이었다.

“과묵한 몬드! 거북발! 오른쪽으로! 흉내쟁이! 더벅머리! 왼쪽으로!”

로벨이 몇몇 용병을 지목해 양쪽으로 보내고 돌격대열을 일(一)자로 넓게 펼쳤다. 그리고 도주하는 마르키시오 공작의 좌익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아주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늘에서 보면 빗자루로 쓸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먼지 대신 피와 살점이 휘날렸다

“아아...”

마르키시오 공작과 부관은 희망이 박살나는 것을 보았다. 북부인이 ‘무적무패 왕, 무적무패 왕’ 노래를 부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전략, 전술, 용병술, 기마술, 기병통제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 중앙군도 무너졌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충직한 부관이 쓸모없는 충언을 했다.

“어디로?”

고향 마도니아 시티는 적의 정예 200명이 지키고 있고 봉신은 얼마 남지 않았다. 도시를 태운 알비치 후작을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어디가 되었든 가셔야 합니다!”

부관이 공작의 말고삐를 잡아챘다. 겁 많은 짐승 위에서 위험한 행위지만 시시각각 쪼여오는 창날보단 나았다. 공작을 대신해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그만.”

공작이 신경질적으로 부관을 뿌리쳤다.

“패자에게는 패자의 자존심이 있다. 추하게 도망 다니며 굴욕을 당하느니 당당히 패배하겠다.”

“허, 허나! 저들에게 붙잡히면!”

명예로운지, 명예로운 척하는지 몰라도 ‘기사의 왕’이라 불리는 로벨은 공작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왕좌에 앉은 안토니오 왕자도 그러할까?

“그것이 옛 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종교에 의지하는 이유가 이것인 모양이다. 로벨 로드릭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있으리라.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마르키시오 공작이 백기를 들었다.

피와 폭력에 흥분한 기사와 용병은 백기를 보지 못하고 한참 더 살인을 저질렀지만 간신히 일부 포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투규모에 비해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군은 전사자 51명, 부상자 55명이고, 마르키시오 공작군은 전사자 250여 명, 부상자는 37명이었다. 양쪽도 좌익에서 피해가 많이 나왔다.

“부상자가 이것밖에 없어?”

“뛸 수 있는 놈들은 전부 도망갔습니다.”

도시가 가까우니 도망갈 의욕이 있는 모양이다. 조루아 경이 ‘잡아올까요?’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몸값으로 계란 한 바구니 낼 수 없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공작을 사로잡았으니 됐소.”

로벨은 피해상황을 확인한 후 무장해제된 마르키시오 공작을 찾아갔다. 기사 신분을 고려해 포박은 하지 않았지만 사방에서 겨누어진 창칼로 딱히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공작의 뜻대로 다시 보는군.”

“...승리를 축하하오.”

최후의 자존심일까. 살려 달라, 놓아 달라, 우리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잖은가,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았다. 비굴한 것보단 보기 좋았다.

“본인을 어찌할 것이오?”

그래도 겁은 좀 나는 모양이다. 대화가 길어질 거 같자 허풍쟁이가 간이의자를 가져왔다. 무기가 될 수 있어 공작에게는 주지 않았다. 로벨은 의자에 앉고 공작은 서서 경청했다. 승자와 패자가 선명히 갈리는 광경이었다.

“수호궁의 주인이 판단할 것이오. 조언하자면 충성맹세를 하시오.”

“수호궁의 주인은 첫째 왕자요.”

“자신이 주인이란 인식이 없으면 주인이 아니오.”

그것은 마도의 법칙이기도 했다. 로벨은 식솔들의 처우도 솔직히 말해주었다. 전쟁에 가담한 아들들은 함께 수호궁으로 보내고, 기사들은 몸값을 낼 때까지 군영에 잡아둘 것이다. 단, 공작의 직계가족이 아닌 시모네 경은 마도니아 시티의 치안을 위해 석방할 예정이다.

“시모네 경을?”

공작도 사위의 재주를 잘 아는 듯했다. 도시가 혼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궁금증이 풀렸으면 준비하시오.”

“무슨 준비 말이오?”

로벨은 의자에서 일어나 피 칠갑한 울프 용병단을 보았다. 고생했으니 보상을 받을 시간이었다.

“개선식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