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방진
성 마르틴이 선언한 기사의 3대 덕목은 용기, 충성, 자비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 신념, 정의, 절제, 진실, 성실, 현명함 등이 추가되지만, 어렵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기사들은 성 마르틴의 기사도만 외우고 다녔다. 용기, 충성, 그리고 자비심이었다.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마! 공작의 가족을 해치면 똑같이 처벌할 거야!”
로벨은 기사의 자비심을 보였다. 기사와 기사의 가족을 죽이는 것은 불명예니 당연하고, 병사와 하인도 모두 보호했다. 그 대신 약간의 약탈은 눈감아주었다.
공작의 무기와 애마(愛馬), 레이디의 옷과 장신구, 성탑에 걸린 깃발 등은 건들지 못하게 했지만, 주방의 은식기와 은촛대, 저장고의 고급 와인, 서재의 양피지 서적 따위는 챙겨도 막지 않았다.
“기준이 대체 뭐야?”
“개인적인 것은 손대지 말라는 거지.”
“귀족 나리 자존심인가?”
“뭐, 공왕 폐하도 귀족이니까.”
로벨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모조리 사라졌다. 정원의 청동 조각상까지 깨지고 잘려서 흩어졌다. 시장이 가까우니 귀금속이 아니어도 페닝이 될 수 있었다. 공작이 무사히 돌아와 이 꼬라지를 보면 혈압으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로벨은 창밖의 소란을 감상한 후 몸을 돌렸다. 시모네 경과 시모네 부인이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을 것이오.”
“...자비심에 감사드립니다.”
시모네 경이 잔기침으로 말했다. 낯빛이 하얗고 숨소리가 불규칙한 것이 짐작대로 폐가 안 좋은 듯했다. 로벨은 동정심을 발휘했다.
“두 사람을 포로로 대우하겠소. 마르키시오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편히 지내시오.”
얼핏 생각하면 풀어주는 것이 자비 같지만, 성이 함락된 마당에 자비심-혹은 동정심-으로 풀려나면 큰 수치였다. 성을 넘겨주고 안전을 보장받았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차라리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다는 평가가 좋았다.
“어디까지 몸값을 낼 수 있을 때 이야기죠?”
물론, 제후쯤 되는 기사 이야기였다. 먹고 죽을 페닝도 없는 기사는 몸값 없는 석방이 최고였다.
“공작의 딸이잖아. 그 정도는 있겠지.”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시모네 부부의 침실을 나와 탈탈 털린 성안 풍경을 보았다. 로벨이 묵인하자 물병 하나 남기지 않고 쓸어갔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용병답게 적당히를 몰랐다.
“...너무 높게 부르진 말자.”
“그게 좋겠어요.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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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니아 시티를 완전히 장악한 지 열흘이 지났다.
에르나 왕국의 방랑기사부터 볼탄 반도의 떠돌이 용병까지 사기가 하늘을 뚫고 옛 신의 천사 엉덩이를 꼭꼭 찔렀다. 크고 무거운 현물을 작고 가벼운 페닝으로 바꾸고 고향에 가서 흥청망청 쓸 생각을 하니까 자다가도 웃음이 빵-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집에 가려면 큰 고비가 남아있었다. 마르키시오 공작의 원정군이 돌아왔다.
“숫자가 많이 줄었군요.”
하일리 산에서는 2,500명이나 되던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용병은 질 것 같은 싸움은 해도 페닝이 안 되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본거지가 털렸으니 밀린 급료를 줄 리 없었다. 심지어 서약을 한 봉신 중에도 이탈자가 있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 200명을 성과 도시에 남겨두고 1,000명으로 출진했다. 시민이 적대적인 도시에서 수성할 수 없으니 무조건 나가야 했다. 그래도 승산은 있었다.
로벨 로드릭 군 1,000명. 마르키시오 공작군 1,300명. 병력은 공작 쪽이 많지만 절대다수가 농민병이라 전력은 로벨 로드릭 군이 우세했다. 시기도 훨씬 높고, 도시를 깔고 앉아 푹 쉰만큼 체력도 유리했다. 유일하게 위협이 되는 것은 기사들이었다.
“기사님이 아주 많아요. 대충 봐도 30명은 되겠어요.”
기사 종자와 기마 용병을 합치면 기마 전력이 100명 가까이 되었다. 반면, 로벨 로드릭 군은 호른 경, 조루아 경, 알폰소 경, 에르나 왕국의 방랑기사 7인과 과묵한 몬트 소대 19명이 전부였다. 갓 성인이 된 기사 종자를 동원해도 40명이 되지 않았다.
“갑옷은 우리가 더 좋아. 전투마도 건강하고.”
“그리고 무적무패 공왕 폐하가 계시지요.”
호른 경이 은근슬쩍 한 마디 덧붙였다. 로벨은 ‘에헴!’ 소리를 낼 뿐 부정하지 않았다. 정리해서, 로벨 로드릭 군이 숫자는 적지만 질적으로 우수했다. 회전으로도 이길 수 있었다.
또 다시 하루가 지나고, 마도니아 시티 동쪽 1.5마일 지점에 양군이 포진했다. 구릉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굴곡 평야에서 눈 덮인 하일리 산맥을 병풍 삼아 마주 섰다. 전쟁을 좋아하는 남아라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좌·우익 부대를 통솔하는 조루아 경과 알폰소 경을 대신해 호른 경이 말했다.
수천 명이 싸우는 회전도 기본은 골목 싸움하고 같았다. 싸울 준비가 끝났다고 다짜고짜 ‘죽어랏!’ 할 수 없으니 화난 이유를 밝히고 적당히 욕을 주고받는 요식행위가 필요했다. 그래야 어색하지 않게 싸울 수 있었다.
“아니오. 본인이 직접 가겠소.”
로벨이 전투마를 두드렸다. 그러나 멍청한 블랑크산 전투마는 콧김을 뿜고 꼼짝하지 않았다. 사람보다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모닝스타가 아니었다. 로벨은 무안해서 잘 안 쓰던 말채찍을 꺼냈다. 엉덩이를 두 번 두드리자 그제야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스발이 깃발을 들고 호종했다.
로벨 일행이 전장 중심에 이르자 마르키시오 공작도 기사 두 명을 대동해 나왔다. 양측 합계 2,300명이 집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시민과 농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대가 무적무패 왕이시오?”
마르키시오 공작의 첫인상은 추레함이었다. 평균수명 기준으로 적은 나이가 아닌데, 몸고생 마음고생을 많이 한 듯 유난히 늙어 보였다. 공작은 피로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말했다.
“내 도시를 약탈했으니 협상은 불가하고, 싸워야 할 입장에서 긴 말은 필요 없지.”
로벨은 미소 지었다. 나이를 먹어도 아직 기사였다.
“안토니오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길이 있소.”
“그 찬탈자에게?”
공작이 재미난 소리란 듯 손사래 쳤다. 화를 내는 것보다 모욕적인 거절이었다.
“그럼 싸워야겠군.”
“조금 있다가 다시 봅시다.”
각자 진영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기사와 병사가 모두 직감했다. 피를 볼 시간이었다.
부우우우우우웅-!
과묵한 몬트가 뿔나팔을 불었다. 병장기를 내리고 느슨하게 서 있던 용병들이 대열을 갖췄다. 소대장에 따라 기도문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사나운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군대란 신기한 조직이다. 열 명이 모이면 정신없지만, 백 명이 모이면 한 덩어리 같고, 천 명이 모이면 강이나 호수처럼 자연물 같았다. 그 속의 개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병사 하나하나는 가족이 있고, 꿈이 있고, 추억이 있는데, 뭉치면 집단의식만 남았다. 군대라는 거인의 작은 세포가 된 것이다.
로벨은 ‘오른팔’을 움직였다. 알폰소 경의 깃발이 좌우로 흔들렸다. 기마용병과 방랑기사가 앞장서고, 에르나 왕국 용병이 뒤를 따랐다.
“기사가 없으니까 속도가 느려.”
우익은 칼이었다. 가장 강력한 공격수단이었다. 기마돌격으로 맹렬히 적을 찔러야 하는데 기마병이 적어 느릿느릿 이동했다. 로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왼팔’로 보조를 맞췄다. 빠른 공격이 안 되면 묵직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로벨 로드릭 군이 거리를 좁히자 마르키시오 공작군도 대응했다. 얼마 안 남은 자유도시 용병들이 크로스보우를 쏘았다. 가장 가까운 부대도 200야드가 떨어졌으니 위협사격이었다. 그래도 첫 전투에 한해서 효과가 있었다. 겁 많은 병사가 쿼럴 그림자에 움츠러들어 대열이 헝클어졌다.
“여기까지 안 날아온다! 계속 가!”
“화살에 맞아도 기사 나으리가 먼저 맞지! 가라고!”
경력직으로 뽑힌 소대장들이 휘하 용병을 닦달했다. 아주 신참은 없어 금방 속도를 회복했다. 마르키시오 공작이 혀를 짧게 찼다.
“북방 야만족이군.”
최고의 문명국이라 자부하는 에르나 왕국 출신에게 억울한 평가였다. ‘북방 야만족은 네일 공국인이나 볼탄 반도인이지!’ 그걸 구분할 수 있으면 남부인이 아니었다. 사실 북부인도 모나카 왕국인과 알베니아 왕국인을 구분하지 못하니 탓할 일은 아니었다. 구분 안 되는 볼탄 반도 ‘야만인’이 움직였다. 울프 용병단 북군(北軍)이 지원사격을 시작했다.
길고 짧은 화살이 날아다니고, 창과 방패를 가진 병사가 열 맞춰 행진했다. 현장에서는 눈앞에 적만 보이지만, 조금 떨어지면 거인의 형체가 보였다.
“좌우익을 동시에 밀어 넣고 중앙에서 지원사격이라... 우리를 포위하겠다는 건가?”
“중군은 로벨 왕의 개인 용병단입니다. 피해를 줄이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쟁이 끝나면 해산할 프리랜서보다 충성스러운 사설 부대가 소중한 것은 당연했다.
“무적무패 왕도 사람이군. 정공법으로 간다.”
주공(主攻)이 우익인 것은 공작 쪽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자 기사와 기사 종자가 말 머리를 모았다. 하늘 높이 솟은 창날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적의 좌익을 격파하고! ‘무적’이라 자칭하는 야만족 두목을 사로잡는다!”
일국의 왕도 야만족이라 부르니, 이쯤 되면 야만족은 ‘저쪽에 계신 신사분’ 정도의 뜻이 아닐까. 모나카 왕국 기사들이 바이저를 내렸다.
“Charge!”
모나카 왕국 3년 내전을 끝낼 마도니아 시티 회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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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경험이 있다면, 혹은 전쟁 관련된 책을 읽고 상상할 수 있다면 포위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숫자는 같으니 앞뒤로 등을 맞대고 싸우거나 한쪽 방향으로 뚫고 나가면 될 것 같지만, 인간은 그리 이성적인 짐승이 아니었다. 아군의 깃발보다 적의 깃발이 많이 보이고, 도망칠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백이면 백 패닉에 빠졌다.
이처럼 승리가 보장된 전술이지만, 실전에서 포위 섬멸을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적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책을 읽어서 포위당하는 일은 필사적으로 피하기 때문이다.
“역시 좌군을 노리는군요.”
마르키시오 공작은 포위당하기 전 기사들을 동원해 조루아 경을 공격했다. 편자(U)의 왼쪽 끝이라 엄호를 받지 못했다. 성급한 사람은 마르키시오 공작의 1승을 점쳤다. 허나, 전쟁의 달인 로벨 로드릭이 포위진 격파를 예상 못 했을 리 없다.
“울프 용병단, 속보로 전진해.”
로벨은 정예 중의 정예 울프 용병단 북군을 최고속도로 이동시켰다. 여기서부터는 용병술이었다. 최고 지휘관이 소대 단위로 부대를 통솔해 전열을 유지했다. 10년 동안 손발을 맞춰온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마르키시오 공작이 변화를 감지한 것은 편자가 거꾸로 뒤집히기 직전이었다.
“적의 중앙군이 치고 나옵니다!”
“뭐? 벌써?”
기병이 배치된 우익보다 중앙군이 빨랐다. 마르키시오 공작은 적의 좌익을 신명 나게 두드리는 아군 기사들을 보았다. 울프 용병단이 예상보다 빠르지만, 네발짐승을 탄 기사보다 빠를 수 없었다. 조금만 버티면 용맹한 모나카 왕국 기사가 적의 좌익을 분쇄하고 뒤를 칠 것이다.
“장창병 앞으로! 이 자리에서 로벨 왕을 상대한다!”
“우, 우익이 철수합니다!”
그때, 부관의 보고가 비명처럼 터졌다. 마르키시오 공작은 무슨 헛소리냐 소리쳤다.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데 기사들은 잘 싸우고 있었다. 부관은 실수를 깨닫고 다시 보고 했다.
“아군이 아닙니다! 적의 우익이 철수합니다!”
이번에도 잘못된 보고였다. 철수가 아니라 우회였다. 알폰소 경과 에르나 왕국 용병 부대는 쇠뇌를 가진 마르키시오 공작의 좌익 대신 앞으로 뛰쳐나간 울프 용병단을 쫓았다.
인간의 시야는 6피트를 넘지 못해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것은 방진이었다. 로벨 로드릭 군은 1,000명의 대군으로 하나의 방진을 만들었다. 고전에 참신함을 더한 신박한 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