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88화 (588/605)

588화. 예측

두 명의 결투자가 땅에 떨어지자 환호와 탄식이 엇갈렸다.

전자는 외지에서 온 로벨 로드릭 군이고, 후자는 성과 건물에 옹기종기 모인 마도니아 시민이었다.

“좋아! 해냈다!”

호른 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체격으로 보나 완력으로 보나 자세와 기술로 보나 알폰소 경이 유리하니 기가 막힌 역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모네 경을 과소평가한 판단이었다. 혹은 알폰소 경의 맷집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안장에서 떨어진 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하는 거요! 끝장을 내시오!”

조루아 경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가장 끝을 내고 싶은 사람은 알폰소 경일 테니 의미 없는 조언이었다. 몸 아래 깔린 시모네 경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데 엉뚱한 곳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빗나가고, 네 번째에는 본인이 휘청거렸다. 그 틈에 시모네 경은 몸을 뒤집어서 벌떡 일어났다. 알폰소 경은 유리한 포지션을 살리지 못하고 발라당 넘어졌다.

“저 멍청한 기사가!”

“하긴, 그렇게 두드려 맞았으니...”

철퇴로 7, 8번을 얻어맞았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다고 뼈와 장기가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 맞을 때마다 충격이 쌓였다. 근육 덩어리 기사라 그나마 버틴 거지, 깡마른 농부였으면 진작 기절했을 것이다.

“어느 기사님이 이길까요?”

“글쎄...”

로벨답지 않게 말꼬리가 길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면 체구가 좋은 알폰소 경의 우세를 점쳤을 테지만, 지금은 상태를 알 수 없었다.

두 기사는 잠시 떨어져서 숨을 골랐다. 역시 어설픈 게 보였다. 상대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알았으면 바로 달려들어야 하는데 또다시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아직은 시모네 경이 유리했다. 알폰소 경에게는 롱소드, 메이스, 워 해머 같은 거병(巨兵)이 없었다. 허리 뒤에서 키드니 대거를 뽑아 자세를 잡았다. 반면, 부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온 시모네 경은 롱소드를 쥐었다.

“힘과 기술이 같을 때 승부를 가르는 게 뭔지 알아?”

“옛 신의 가호요?”

“...그것도 맞지만. 눈에 보이는 조건에서는 리치(Reach)야.”

기습이나 난전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주먹보단 칼, 칼보단 창, 창보단 활을 가진 사람이 유리했다.

“하지만 갑옷을 입었잖아요? 무기가 길어도 한 번은 버티지 않을까요?”

“한 번은 반드시 맞는다는 뜻이잖아.”

최고의 전문가가 하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구경꾼의 함성이 잦아들 무렵, 시모네 경이 움직였다. 로벨 기준에서 어설프다 해도 기사는 기사였다. 기본기가 있다는 뜻이다. 정직한 것 빼고 흠잡을 게 없는 수직 베기를 시도했다. 피하기는 다소 힘들지만, 방패가 있으면 쉽게 막을 공격이었다.

알폰소 경은 기사 종자가 발을 동동 굴리며 끌어안은 방패 대신 왼손을 비스듬히 올렸다. 플레이트 아머의 뱀브레이스는 어지간한 방패보다 튼튼했다. 칼날이 미끄러지며 옆으로 빗겨갔다. 그 틈에 거리를 좁히면 좋겠지만, 마상전투에서 쌓인 충격과 낙마 충격, 그리고 지금의 방어 충격으로 걸음을 떼지 못했다.

시모네 경은 오른쪽으로 미끄러진 칼날을 따라 왼발을 옮기고 몸을 한 바퀴 돌려 회전 베기를 시도했다. 원심력이 실린 강한 공격이었다. 알폰소 경의 옆구리를 제대로 가격했다. 깡-!

“저, 저런 미련한 자가!”

“덤벼! 덤벼서 쓰러트리시오!”

로벨의 예상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선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알폰소 경이 기를 쓰고 한 걸음 떼면 시모네 경은 두 걸음 물러나며 난타했다. 무릎을 굽히고 태클을 걸려고 하면 훌쩍 뛰어 멀어졌다. 호른 경이 로벨을 곁눈질했다.

“이번에는 진짜 졌습니다.”

패배를 선언하고 중단시키는 게 어떠냐는 물음이었다. 약속대로 도시 밖으로 철수하면 알폰소 경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갈등했다. 오랜 시간 쌓은 정(情)은 없지만, 그래도 충성을 맹세한 기사를 죽게 둘 수 없었다.

“우리 기사님만큼은 아니지만, 칼을 잘 쓰네요.”

“저만하면 괜찮은 칼솜씨인데, 뭐 했기에 이름 한 번 못 날렸지?”

마녀 키르케가 칭찬하자 외팔이가 악연을 잊고 맞장구쳤다. 로벨 이하 기사 전문가도 다시 보았다. 크고 작은 챔피언 자리 하나씩 차지한 만큼 보는 눈이 정확했다. 시모네 경의 약점은 경험 부족이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약점이었다.

“...체력이 저질이잖아?”

기세 좋던 칼질이 점점 느려졌다. 일격필살이 안 나오는 것은 갑옷이 단단해서라 해도,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먼저 지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폐병이라도 있나?”

기사가 운동부족이면 웃을 일이고, 후천적인 장애가 의심되었다. 아무튼 승부를 종잡을 수 없었다.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투는 처음 봅니다.”

때리고, 맞고, 때리고, 맞고, 쒸익- 쒸익- 거리며 숨을 골랐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데 대여섯 명 죽은 분위기였다.

양쪽 다 움직이지 않자 로벨이 휘하 랜스를 보냈다. 과묵한 몬트는 혹시 몰라 준비한 백기를 들고 달려갔다. 진주성에서도 시모네 경의 기사 종자가 백기를 들었다. 일방적으로 때리는 유리한 상황에서 승부를 포기하는 것이 정말 장애가 있는 듯했다.

“이러면 누가 이긴 거죠?”

“이런 결투는 나도 처음이라...”

결투 역사에 거의 없는 일이었다. 로벨은 부족한 상식을 거꾸로 뒤집어 탈탈 털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으면...

“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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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진주성 결투가 끝났다. 지켜본 눈이 4천 개가 넘으니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소문이 퍼졌다.

결과는 무승부지만, 성과는 시모네 경이 많이 챙겼다. 악명 높은 볼탄 반도 기사를, 그것도 무적무패 왕을 모시는 로드릭 가문 기사를 ‘거의’ 이길 뻔했다는 명성을 얻은 것이다.

“저자는 에르나 왕국 출신이다! 공왕 폐하를 모신지는 100일도 안 됐고!”

정통 볼탄 반도 기사 하나가 반박했지만, 소문(所聞)은 풍문(風聞)이라 두 손으로 막을 수 없었다.

“알폰소 경의 명예를 챙겨주려다가 적의 명성만 높여주었습니다.”

호른 경 역시 탐탁지 않았다. 사랑하는 무적무패 이름에 먹칠을 했으니 비언어적인 수단으로 욕을 퍼부었다. 하루를 끙끙 앓고 일어난 알폰소 경이 항변했다.

“아니, 그놈이 시종일관 비겁하게...”

“패자는 말이 많을수록 추한 법. 조용하시오.”

“패자 아닌데...”

호른 경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알폰소 경을 닥치게 한 후 창밖의 진주성을 보았다.

“저쪽은 사기가 하늘을 찌르겠군.”

“저기... 그렇지가 않습니다요.”

허풍쟁이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1,200명의 군단을 지휘하는 각 부대 지휘관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다니?”

“저짝을 포위한 애들이 그러는데, 오히려 평소보다 어수선하다고 합니다요.”

“어수선? 자세히 설명해라.”

허풍쟁이가 직접 본 것과 주워들은 것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크게 요약하면 다음 같았다.

“수비병의 표정이 어둡고, 근무교대가 제멋대로다?”

“그 시모네 경이란 사위 나으리도 안 보입니다요. 매일 세 번씩은 순찰을 돌았는데 말입죠.”

로벨과 호른 경, 조루아 경과 알폰소 경이 서로를 보았다. 전쟁을 책으로 배웠어도 이해될 상황이었다.

“진짜로 안 좋은 모양이네?”

“기사 종자가 데려갈 때는 멀쩡했습니다.”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했을지도.”

“브루노 시모네 경은 영리한 자입니다. 공격을 유도하려는 속임수가 아닐지요.”

“고작 100명뿐인 성에서?”

1,200명 대 100명은 공격을 유도해서 어찌할 수 있는 전력차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피해가 커지는 게 싫어서 공격하지 않았을 뿐, 정공법으로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었다

“확실히 이득이 없는 짓이긴 하오나...”

“지쳐서 쓰러졌는지 아파서 쓰러졌는지 몰라도, 지휘를 못할 상황인 것은 확실하오.”

마녀 키르케가 알폰소 경을 향해 박수쳤다.

“와아! 알폰소 기사님 대단해요! 한 대도 안 때리고 적장을 쓰러트렸어요!”

마녀 딴에는 칭찬이지만, 자존심이 상한 기사는 고이 듣지 않았다.

“이 계집년이?”

“경! 말조심하시오! 공왕 폐하의 정인(情人)이오!”

조루아 경이 질책하자 진짜 정인이 움찔했다. 로벨은 진짜와 가짜를 번갈아 본 후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한테도 성과가 있었네?”

지휘관이 없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었다. 시모네 경의 부재가 사실이면 큰 피해 없이 진주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어찌할까요? 공격할까요?”

로벨은 명예로운 기사였다. 여기서 ‘명예’는 후대인이 생각하는 ‘착함’, ‘정직함’, ‘예의바름’ 따위가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승리하는 기사가 명예로운 기사였다.

“사다리를 준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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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 1,200명이 진주성 서쪽 문에 집결했다.

공손한 협박과 정중한 약탈에 싫증이 난 용병들은 신이 나서 병장기를 두드렸다. 이 도시에서 가장 부자는 마르키시오 공작이니 값나가는 것이 많을 거란 기대도 있었다. 반면, 시민들은 겁에 질려 꼭꼭 숨었다. 무적무패 왕이 결투 결과에 화가 나서 공격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주성을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잿더미로 만들 거란 소문도 돌았다.

로벨은 누구와 달리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괜한 사람이 끼어들어 피 흘리지 않을 테니 오히려 화난 척 연기했다.

“나는 펄펄 끓는 고기 스튜 같은 분노의 화신이다. 겁먹어라. 무서워라. 크앙-”

“저, 고기 스튜는 조금...”

“응? 고기 스튜도 뜨겁지 않소?”

“...하다못해 ‘크앙-’이라도 빼시지요.”

로벨의 부족한 연기력이 공개될 일은 없었다. 마르키시오 공작의 사위, 브루노 시모네 경은 정말 예측 불가능한 기사였다. 로벨 로드릭 군이 사기충천해서 전투나팔을 불기 직전, 성문을 열고 백기를 올렸다.

“백기라고?”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데, 이 경우는 의심의 여지없이 항복이었다. 기사와 용병이 한 마음으로 툴툴거렸다.

“허, 참나. 싸우지도 않고?”

“지금까지 시간 끈 게 우습군요.”

한껏 달아오른 것에 비해 맥 빠지는 승리였다. 좋게 해석하면 공작의 인척으로 체면치레할 만큼은 버텨서 항복하는 거니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다. 사상자 하나 없이 성을 점령했으니 도리어 자축할 일이었다.

백기를 바치는 자는 결투 마지막에 잠깐 본 시모네 경의 기사 종자였다. 이제 15살로 간신히 말을 탈 수 있게 된 종자는 북부인이라 해도 믿을 만큼 하얀 얼굴로 로벨 앞에 섰다.

“시모네 경께서, 자신이 지휘할 상황이 아니면, 헛되이 죽지 말고 항복하라고...”

아직 어린 종자였다. 인사를 생략하고 되뇐 말부터 꺼냈다. 부친을 닮아 불같은 조루아 경은 화를 냈지만, 이해심이 깊어 ‘기사 종자가 다 그렇지 뭐’하는 로벨과 호른 경은 질책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궁금한 것이 있었다.

“시모네 경은?”

“지병이 도지어서 병상에, 에, 병상에 누워 계십니다.”

무슨 지병인지, 얼마나 아픈지 묻지 않았다. 어린 종자를 내보낼 정도면 굳이 물을 필요 없었다.

“알폰소 경, 경의 부하를 이끌고 먼저 들어가시오. 조루아 경은 성벽에 사다리를 걸어두고 방어시설을 점거하시오.”

로벨은 만에 하나 함정일 가능성을 고려해 움직였다. 그러나 거짓도, 함정도 아니었다. 시모네 경은 고열로 쓰러졌고, 진주성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 전쟁은 마지막까지 예측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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