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87화 (587/605)

587화. 기회

시모네 경은 조부의 조부부터 마르키시오 가문에 충성한 유서 깊은 봉신이지만, 최근까지 주목받지 못했다.

전쟁에서 세운 공훈도 없고, 결투나 마상시합으로 떨친 명성도 없었다. 상재 또한 그저 그러해 축적한 재산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키시오 공작의 사위가 되었다.

교외의 자그마한 농장 하나 가진 그저 그런 기사에서 하루 아침에 서부 무대 주인공이 된 것이다.

“사람 다루는 재주는 좋던데, 싸움 실력은 별로인가 봐?”

기사로 무명을 떨치지는 못했어도 능력은 있었다. 로벨이 정보에 만족하자 구즈만 경은 모자를 고쳐 쓰고 정중히 인사했다. 도시민이 다 아는 이야기로 부두 사용을 허락받아 기뻐했다.

“시민들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잖소.”

“공작의 비위를 건들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름처럼 좋은 사람(Guzman)이었다. 마르키시오 공작과 시모네 경에게는 아니지만.

“성을 공략할 방법을 찾았소.”

로벨이 입꼬리를 올리자 조루아 경과 알폰소 경이 경쟁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로벨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기사들이 어리둥절했다.

“시모네 경의 농장을 파괴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식솔을 인질로 잡아 항복을 강요하시려는 게...”

“...본인을 그렇게 치졸한 인간으로 본 거요?”

로벨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호른 경은 두 신참 기사를 무섭게 노려본 후 ‘합리적, 효율적, 실용적 평가’ 어쩌고 위로했다. 덕분에 자신감이 조금 돌아왔다.

“저쪽 성에 결투장을 보내겠소.”

기대에 찬 시선이 식었다. 여러모로 문제가 있는 말이었다.

“그건 좀... 무적무패 왕과 결투하려고 하겠습니까?”

“그 전에 불명예가 아닌지요. 공작의 사위라 해도 이름 없는 농장의 기사입니다.”

로벨의 적수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결투는 신분이나 명예가 비슷할 때 성립된다. 자신보다 직위가 낮은 사람과 결투하는 것은 자신의 격을 낮추는 행위라 이겨도 불명예였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몇 가지 있는데, 일국의 왕이자 그랜드 챔피언이 시골 촌구석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면 그중 가장 우스운 이야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본인이 아니오. 본인이 나서면 어떤 모욕을 해도 받아들일 리 없잖소.”

자의식이 치사량이었다. 무적무패가 아니면 크게 비웃음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희 중에서...?”

기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정확히는 조루아 경과 알폰소 경이 서로를 보았다. 호른 경은 장원이 두 개나 있고,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며 명성 쌓아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두 기사는 얼추 수준이 맞았다. 앞다투어 자신감을 어필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공왕 폐하께 승리를 바칠 기회를!”

“상대는 공작 가문의 사위요! 폭풍성의 후계자이자 버팅거 시티 챔피언인 본인이 격에 맞소!”

“그래봐야 서(Sir) 랭스터일 뿐이잖소! 로드(Lord) 랭스터가 아닌 이상 조건은 같소!”

“하! 그러다 무시 당해 비웃음이나 사지 마시오!”

“머, 뭐라고? 지금 본인을 모욕한 것인가!”

마녀 키르케가 이마를 짚고 ‘이래서 기사들이란...’ 하며 어린 집사를 흉내 냈다. 로벨이 말싸움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다가 대적자를 정했다.

“에르산 알폰소 경에게 부탁하겠소. 브루노 시모네 경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시오.”

두 사람의 칼솜씨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결투는 변수가 많아 승리를 점칠 수 없었다. 그저 필요에 따라 판단했다. 훗날 팔레모 항의 관리자가 되려면 모나카 왕국에서 명성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폰소 경은 뛸 듯이 기뻐했다.

“서 알폰소! 공왕 폐하께 공작의 성을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어디까지 이겼을 때 이야기지요.”

호른 경이 못마땅하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역시 기사라 명예를 높이고 영광을 바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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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에 응하게 하는 것은 쉬었다. 예를 들어 주군과 부모 욕을 한 번씩 하면 본인은 참아도 주변 눈치 때문에 결투에 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경우는 결투 신청자 명예가 바닥으로 떨어지니 곤란하지만, 아무튼 피할 수 없는 조건을 걸면 간단했다.

“만약! 브루노 시모네 경이 이긴다면! 로벨 로드릭 공왕군은 마도니아 시티의 징발을 중단하고! 즉시 동쪽으로 회군하겠다!”

본인은 믿지 않아도, 주변 눈치 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저 약속을 정말 지킬까?”

“어차피 성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 세금 받아먹었으면 이럴 때 싸워야지.”

“만약에 지면? 더 악랄하게 나오지 않겠소?”

“무적무패 왕이 아니면 승산이 있지 않나?”

사실 생각해보면 파격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피를 보지 않는 조건에서 털어먹을 만큼 털었고, 마르키시오 공작이 돌아오면 어차피 도시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로벨의 입장이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용병 군대를 성 안에 둔 시민은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파레초 시티를 불태운 전적이 있어 더욱 그러했다. 결투 한 번으로 쫓아낼 수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시모네 경의 약점이 되었다.

“기사라면 나올 수밖에 없소.”

“공작의 사위라면 더더욱 말이지요.”

머리가 나빠 상황판단을 못하거나 겁이 많아 불명예를 감수하면 안 나올 수 있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르키시오 가문의 가난한 사위에게 불명예는 죽음 이상이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 결투장에 조롱과 멸시가 섞일 무렵, 진주성의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슬로 된 갑옷에 철판 넣은 가죽조끼를 겹쳐 입은 코트 오브 플레이트 기사였다. 전신 판금 갑옷이 아닌 것이 남부 기사다웠다.

“시모네 경인가?”

넥 가드와 연결된 배서닛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해비 랜스, 롱소드, 플레일, 버클러 등으로 무장한 것이 맞는 듯했다. 결투장을 반송하려고 저리 무장해서 나올 리 없으니 말이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고 호른 경이 눈짓하자 알폰소 경이 창과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양측의 군대와 마도니아 시민이 모두 구경하는 가운데 두 기사가 마주 섰다. 결투가 흔한 작금의 시대에도 이만한 관중이 모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알폰소 가문의 에르산 알폰소.”

알폰소 경이 창을 세우고 방패를 가슴에 붙이며 신분을 밝혔다. 시모네 경은 창을 왼손으로 옮기고 바이저를 올려 얼굴을 보였다.

“시모네 가문의 브루노 시모네.”

지금의 동작들은 먼 훗날 국가나 상관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경례가 되지만, 지금은 신원과 무기를 밝히는 기사의 풍습이었다.

두 기사는 상대의 정체와 무장을 확인한 후 말머리를 돌렸다. 도보로 나왔으면 바로 칼을 뽑겠지만, 말을 타고 나왔으니 마상창으로 시작하는 것이 옳았다. 왜 옳은지는 모르는데, 암묵적인 룰이었다. 알폰소 경이 돌아오자 자칭 마상창의 달인들이 조언했다.

“거리가 얼마 안 되오. 최고속도로 달릴 수 있는 구간이 짧으니 낙마에 주의하시오.”

“이 정도 거리면 해비 랜스보다 아밍 소드가 유용할 거요. 저자가 플레일을 가져온 게 꺼림칙하오.”

알폰소 경은 호른 경에 조언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조루아 경을 무시했다. 조루아 경의 표정이 사흘 굶은 아야와 이야카만큼 사나워졌다.

“갑옷은 달라도 약점은 같소.”

로벨이 턱과 겨드랑이를 한 번씩 만졌다. 얼핏 보면 성호를 긋는 것 같았다. 알폰소 경은 진지한 얼굴로 고마움을 표시한 후 헬름을 머리에 썼다.

좁아진 시야. 선명해진 숨소리. 가죽 내피의 꿉꿉한 냄새가 흥분을 진정시켰다. 성문 가까이 돌아간 시모네 경이 보였다. 알폰소 경과 비슷하게 해비 랜스를 세우고 전투마를 다독이고 있었다.

“싸우시오. 그리고 승리하시오.”

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알폰소 경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강제 차출한 이름 모를 말의 옆구리를 때렸다. 주인이 바뀌어도 금방 순응하도록 훈련받은 전투마였다. 투레질을 생략하고 용감하게 달려갔다. 시모네 경 역시 돌격을 시작했다.

마상시합장에서 볼 수 없는 진짜 랜스와 진짜 랜스 차칭이었다. 시민들이 함성을 질렀다. 창날이 갑옷을 뚫고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조금 다르게 충족되었다.

시모네 경은 랜스를 랜스 레스트에 걸지 않고 옆으로 버렸다. 랜스 차칭은 속임수였다. 안장에 걸어놓은 호스맨즈 플레일을 뽑으며 말 등에 납작 엎드렸다.

“본인이 말했잖소!”

조루아 경이 소리쳤다. 대상이 잘못되었다. 호른 경은 올바른 상대를 비난했다.

“비겁하다!”

“비겁하지만 잘못은 아니오. 결투에 응한 사람은 무기를 자유로이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전투마는 네 다리로 낼 수 있는 최고 속도에 이르렀다. 양쪽이 마주 달리니 체감상 시속 60마일에 이르렀다. 눈 한 번 깜박이면 상대가 두 배로 커졌다.

‘제기랄!’

알폰소 경의 마상창 솜씨는 딱 평균이었다. 한 번 이기면 한 번 지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가볍고 날렵한 라이트 랜스라면 모를까, 크고 무거운 해비 랜스로는 안장에 바짝 붙은 상대를 맞힐 수 없었다. 전투마를 노리고 창끝을 내리면 창의 무게에 공기 저항이 더해져 창을 놓칠 수 있고, 용력으로 버텨도 찌르는 순간 본인이 위험했다. 결국 랜스 차칭을 포기해야 했다.

“아주 영리해.”

알폰소 경의 해비 랜스가 허공을 가르자 로벨이 감탄했다. 해비 랜스를 보여서 해비 랜스를 들고 오게 한 것도, 성문 앞에서 기마돌격을 시작한 것도 전부 작전이었다.

알폰소 경은 급하게 속도를 줄였다.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신성한 결투라고 하지만 적진 가까이 가면 위험했다. 그것은 시모네 경도 마찬가지라 금방 말머리를 돌렸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말이고, 미리 준비한 계획이라 두 박자 반쯤 빨랐다. 거리를 좁히고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그쯤 빨랐다.

깡-!

두 개의 철구가 투구와 완갑을 때렸다.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지 않았으면, 장인이 만든 플레이트 아머가 아니면 즉사했을 것이다. 알폰소 경은 허리에 찬 칼을 반쯤 뽑았다가 놓쳤다.

시모네 경은 승기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 플레일을 휘둘렀다. 알폰소 경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전투마를 때렸지만 주인의 명령이 낯선 말은 뛰지 않고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골고루 때리라고 대주는 모습이었다. 호른 경이 한숨 쉬었다.

“이거 졌군요.”

“저를! 저를 보내주십시오!”

조루아 경이 자신의 종자에게 랜스를 가져오라 소리쳤다. 그래도 아군이라고 당하는 꼴은 못 보겠는 모양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로벨이 폼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구즈만 경의 정보가 맞았다. 시모네 경은 영리하지만, 싸움 실력이 별로였다.

기사를 때려죽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지금 상황이면 말 머리를 때려서 쓰러트린 후 짓밟거나 칼을 뽑아 마무리해야 하는데, 요령 없이 갑옷만 두드리고 있었다. 저렇게 때려도 운이 좋으면 낙마하겠지만...

“알폰소 경에게 기회가 있소.”

마상창 솜씨는 그저 그래도, 나이프 한 자루로 일곱 명을 죽일 만큼 전투 레슬링에 달인이었다. 알폰소 경이 안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승리를 확신한 시모네 경을 붙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두 기사의 몸이 땅에 떨어졌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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