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86화 (586/605)

586화. 성의

울프 용병단은 고용주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보여준 기적 같은 승리와 마상시합장에서 증명한 신화적인 무용(武勇)을 자신과 같은 ‘사람’ 범주에 포함시키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성벽을 한 발로 뛰어넘고, 성문을 주먹으로 부순다는 소문은 웃어넘겼다. 보통 사람이 아니란 말이 날개 달린 천사나 꼬리 달린 악마란 말은 아니니까. 사람이 어떻게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잘못 생각했네.”

“소문이 진짜였어...?”

지인의 평가보다 세인의 평가가 정확하단 말이 이런 걸까-아니다- 울프 용병단은 고용주를 잘못 보았다.

로벨 로드릭 왕은 진짜로 성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저리 비켜!”

좀 더 정확히 설명하면, 전력질주로 사다리차를 올라가 성벽을 향해 뛰었다.

발디딤이 안 좋은 통나무 사다리를 두 발로 오른 것도 놀랍지만, 성벽까지 남은 9~10피트 거리를 도약으로 넘는 게 기가 막혔다. 몸에 붙은 쇳덩이가 최소 80파운드란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이 정도면 ‘한 발로 성벽을 뛰어넘은’ 칭호가 진짜였다.

“괴, 괴, 괴물이다!”

“우와악-!”

가장 놀란 것은 성벽 위의 마도니아 시티 수비병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강철 인간에 기겁해 물러났다. 다리가 꼬인 병사는 나자빠지기까지 했다.

“후우...”

로벨은 숨을 고른 후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새하얀 칼날과 지저분한 전쟁이 괴리감을 주었다.

“나 로벨 로드릭이야.”

“무적무패 왕!”

이름을 밝히자 바로 별명이 나왔다. 그 힘은 불붙은 대포와 비슷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게 그러했다.

로벨은 전의 잃은 병사를 쫓는 대신 주위를 살폈다. 사다리차에 쏟으려고 준비한 기름 항아리와 화롯불이 있었다. 위험요소를 놔둘 수 없었다. 항아리를 깨고 화로를 발로 차 엎었다. 미련 많은 병사가 멀리서 탄식했다.

“아, 아, 안 돼...!”

로벨은 불씨를 발로 밟아 꼼꼼히 껐다. 수비병의 희망도 함께 꺼지는 기분이었다. 무적무패의 명성 때문일까, 성 밖에서 ‘날아온’ 기적 때문일까, 아무도 로벨을 제지하지 않았다. 하긴, 냄비를 쓰고 푸줏칼을 꼬나든 늙은 병사들이었다. 몇 명이 덤벼도 로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쿵-

그 사이 사다리차가 성벽에 닿았다. 싸움개 패거리가 천지만물을 욕하며 기어 올라왔다. 겁도 없이 혼자 성벽에 오른 고용주 욕도 조금 있었다.

도시 전체에서 사다리가 침범한 곳은 한 점에 불과하지만, 그것으로 함락이 시작되었다.

“후퇴! 후퇴해라! 진주성으로 후퇴하라!”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만 하루 동안 괴롭힌 기사, 마르키시오 공작의 유능한 부관이 칼을 휘저으며 명령했다. 이런 상황을 주지시켰는지 우왕좌왕하지 않고 후퇴했다.

“제법이야.”

로벨은 추격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뒀다. 저런 작자면 퇴로에 함정을 준비했을 것이다.

“공왕 폐하를 지켜라!”

“흐리얏! 다 덤벼라!”

싸움개 일당이 사다리를 올라와 로벨을 지키는 시늉했다. 열정적인 뒷북이었다. 텅 빈 성곽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성문이나 열어.”

“아, 예.”

@

북부의 무자비한 용병 군대가 마도니아 시티에 입성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무도한 용병들은 시뻘건 눈으로 시내를 배회하며 발이 네 개 이하인 생물을 가리지 않고 죽이고 반짝이는 것을 빼먹지 않고 챙기며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남김없이 불을 놓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쌈박질했는데 무슨 힘이 남아서 약탈해.”

“야, 야, 나 화살 맞았다니까. 마녀 아가씨 좀 불러줘.”

“거 깊이 박히지도 않았구만. 침 바르고 한숨 자면 다 나아.”

공성전으로 지친 탓도 있지만, 이곳이 적진인 탓도 있었다. 약탈하겠다고 뿔뿔이 흩어지면 성난 괭이와 쇠스랑에 영영 복귀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점령군이 점잖은 손님은 아니었다. 식량, 무기, 거점을 확보해야하기에 시장, 부두, 창고, 마구간 등에 병사를 보냈다.

상인들은 올 게 왔구나 하는 얼굴로 순순히 협조했다. 지난 전쟁에서 숱하게 겪은 일이라 놀라지도 않았다. 심지어 로벨이 요구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금화를 내놓는 상인도 있었다. 사람이 상하고 건물이 망가지기 전에 자진 납세하는 것이 좋았다.

주는 페닝 마다할 기사 없으니 주는 것은 냉큼 받아먹었다. 그리고 마르키시오 공작의 성, 진주성을 포위했다. 외팔이 더치가 내키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사다리를 만들깝쇼?”

도시 외벽보다 7, 8피트 더 높고, 폭은 좁지만 나름 해자도 파여 있고, 격자문과 투석구 같은 방어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병력차가 크고 공성 경험이 풍부하니 시간을 들여 공략하면 점령 못 할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이 문제였다.

“꼭 점령할 필요 없지?”

“뭐, 그렇지요.”

집주인도 없고, 가질 수 있는 땅도 아닌데, 피 흘려 점령할 필요 없었다.

“마르키시오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내버려두자.”

근거지가 포위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사기가 떨어져 회군할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서 싸우든 협상하든 결정하면 되었다. 안토니오 왕자는 싸우기를 희망하겠지만, 피해가 크면 굳이 싸울 생각 없었다.

“그때까지 뭘 합니까요?”

외팔이가 기대에 차서 쳐다보았다. 파레초 시티의 즐거운 추억이 떠올랐다. 로벨은 점잖게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수금해.”

@

점령군에게 협조하는 상인도 있지만, 혹시나 해서 모른 척 버티는 상인도 있었다. 그런 곳을 찾아가 예의 바르게 칼과 도끼를 자랑하고 예의 바르게 기념품을 챙겼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즐거운 행사였다.

“도시놈들은 죄다 부자라니까.”

“괜히 성 안의 사람(Bourgeois)이 아니잖아.”

전쟁터에서 10년 구를 급료를 한 번에 챙겼지만, 그래도 만족하지 못하는 용병이 있었다.

“한두 놈 멱따고 협박하면 좀 더 토해낼 거 같은데...”

순순히 내놓은 페닝이 이 정도면, 꼬불쳐둔 페닝은 몇 배가 될 것이다. 외팔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서라. 저놈들이 싸우겠다고 들면 골치 아파.”

“그래 봐야 순한 양들 아니오.”

“양 머리에 치여도 아프다.”

외팔이는 그럴듯한 비유라 생각했는지 혼자 뿌듯해했다. 용병들은 개떡 같은 소리라 생각했지만, 외팔이의 덩치가 부담스러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조합을 털고, 가게를 털고, 턴 곳을 또 털고, 왜 또 왔냐고 화내는 상인의 턱을 45도 회전시켜주고, 젊은 여자에게 추파 던지고, 외팔이에게 정강이 까이고, 금화 한 닢 삥땅치고, 허풍쟁이에게 고자질 당하고, 시무룩하게 돼지 잡으러 가는 일이 하루 동안 벌어졌다.

“정말 재미난 병사들이오.”

명령하지도, 명령받지도 않는 ‘참관인’ 파울로 왕자가 한 마디로 평했다. 정의롭지는 않은데, 악랄하지도 않았다. 농부가 낫질하고 어부가 그물 걷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을 하는 태도였다.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어느 집단이나 대장을 닮는 법이지요.”

“대장의 통솔력이 강할 때 말이지.”

저들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출신과 소속이 다르니 공통된 마인드를 가질 리 없었다. 저들이 저리 행동하는 것은 오직 로벨 로드릭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무적무패 왕이 재미난 것이군.”

“예. 훌륭한 왕입니다.”

왕은 포악해서도 안 되지만 온화해서도 안 되었다. 적을 늘리지 않으면서 아군을 만족시키는 재주가 필요했다. 그것은 지식이나 교육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충분한 권위와 알맞은 명성이 있어야 가능했다.

“하긴, 무적무패 왕이 시키는 대로 하면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겠지.”

파울로 왕자가 다소 뚱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살인, 방화, 강간을 금지시켰으면 어느 개가 짖나 하고 무시할 것이다. 아니, 피로 본보기를 보이지 않으면 욕심 많은 상인이 먼저 ‘성의’를 표시할 리 없었다. 북해 끝에서 남해 끝까지 통하는 명성을 가진 로벨이 부러웠다.

“어? 애꾸눈? 공왕 폐하 계셔? 손님이 왔는데?”

명성이 높으니 찾는 사람도 많았다. 로벨의 직속 랜스 소속인 흉내쟁이가 사람을 데리고 왔다. 애꾸눈이 하나뿐인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이 까맣지만 선천적인 것은 아니고 햇볕에 오래 그을린 색이었다. 옷은 고급소재인데 금은으로 된 장식이 하나도 없었다. 케이프를 고정하는 상아 브로치가 유일한 사치품이었다.

“에르나 왕국에서 오신 기사 나으리십니까?”

까만 얼굴에 하얀 이가 드러났다.

“과연 무적무패 왕의 부하군. 한눈에 알아본 사람은 처음이오.”

애꾸눈이 애꾸눈인 것을 지목한 농담이었다. 본인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당사자는 웃지 않았다.

“오실 때가 되었다 생각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애꾸눈은 파울로 왕자에게 목례하고 몸을 돌렸다. 진주성이 바로 보인다는 이유로 징발한 무슨무슨 조합 건물이었다. 커다란 뼈와 고래 그림이 있는 거 봐서 포경과 관련된 조합일 것이다.

“그자는 누군가?”

호른 경이 워 해머에 슬쩍 손을 얹고 물었다. 조루아 경, 알폰소 경, 과묵한 몬트 등이 함께 돌아보았다. 에르나 왕국 기사는 풀 플레이트 아머 차림의 정통파 기사 시선에 살짝 주눅이 들었다.

“에르나 왕국 제2함대 소속 서(Sir) 구즈만이오.”

구즈만 경은 기사 작위를 가졌지만 정통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가문이 아니라 소속을 밝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뱃놈 기사로군.”

에르나 왕국 출신 알폰소 경이 비웃었다. 에르나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은 외해를 개척하면서 솜씨 좋은 선장을 기사로 많이 임명했다. 과거 포츠담 해전에서 승리한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대표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명예로운 일이지만, 최소 3대 이상 기사로 복무한 ‘뼈대 있는’ 가문들은 몹시 싫어했다.

“억양을 봐서 동향 사람 같은데... 하하! 그럴 리 없지! 내가 잘못 들었나 보오.”

구즈만 경이 즉시 반격했다. 에르나 왕국 기사가 왜 볼탄 반도 왕에게 충성하냐는 뜻이었다. 어느 나라나 갈등은 있는 법이니 외국인 로벨은 간섭하지 않았다.

“군사작전 중이라 대접이 소홀한 점 이해하시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무슨 일로 오셨소?”

짐작은 가지만 확인차 물었다. 구즈만 경은 으르렁거리는 알폰소 경을 외면하고 품위 있게 인사했다.

“무적무패 로벨 로드릭 왕의 승리를 축하드리며, 본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고자 왔습니다.”

에르나 왕국인은 점잔 떠는 깍쟁이란 편견이 있는데, 기사와 선장을 보면 꼭 그러지 않았다. 구즈만 경은 간단명료하게 목적을 밝혔다.

“적대행위를 하지 않을 테니 항구를 이용하게 해 달라?”

선상생활이 유쾌하지는 않으니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나 1천 명의 병력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다.

“에르나 왕국에 악감정은 없으나 혈기왕성한 병사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제약이 필요하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한번에 200명만 상륙하고, 부두에서 500야드 이상 이동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아, 한 가지 더 있소.”

로벨이 말을 끌자 구즈만 경이 불편함을 보였다. 양보할 만큼 양보했다는 입장이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로벨이 바란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금 진주성을 지키는 기사에 대해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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