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어유
인생의 많은 것을 산에 비유하는데, 가만히 들으면 올라가는 이야기만 있고 내려가는 이야기는 없었다.
산을 오를 때는 포기할 수 있지만, 산을 내려갈 때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가는 게 힘들다고 그만두는 사람은 없으니 굳이 힘내라, 참아라,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겨라 등을 조언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인생으로 비유하여, 산을 오르는 것이 ‘삶’이라면, 산을 내려가는 것은 ‘죽음’이었다. 옛 신의 품으로, 자연으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귀가(歸家)라 말할 수 있었다. 삶은 포기할 수 있지만, 죽음은 포기할 수 없으니, 현인들은 오직 살아갈 지혜를 빌려줄 뿐이었다.
“그러니까, 산에서 내려가면 사람이 죽는다는 거지?”
“그런 뜻이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네요.”
로벨 로드릭 군은 신이 나서 산을 내려갔다. 고용주와 마녀가 나누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에 관심 없었다. 네 자릿수 무장병력에 놀라 버리고 간 모나카 상인들의 수레와 가축이 더 중요했다.
“우어억-! 당신들 누구야! 지금 뭐하는 것이오!”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도망치지 않고 질문하는 상인도 있었다. 외팔이가 손도끼를 꺼내 붉은 수염에 쓱쓱 문질렀다.
“돈 내놔.”
700년 역사의 바바리안 피가 어디 가지 않았다. 상인은 즉시 돈주머니를 던지고 선지자들을 쫓아갔다. 외팔이는 낄낄거리며 주머니를 주워담았다. 묵직한 것이 은화만 들었어도 2, 30페닝은 될 듯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마도니아 시티로 가는 내내 이어졌다.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마.”
“페닝을 내놓지 않는 사람은 어쩝니까요?”
에르나 왕국 용병이 탐욕스럽게 물었다. 울프 용병단 소속은 ‘뭘 그런 거 묻냐. 알아서 좀 하지’ 눈총을 주었다. 로벨은 짧은 고민 후 말했다.
“무기가 있으면 죽여.”
산 넘고 바다 건너 수십 일을 고생한 용병이었다. 주머니를 채우지 못하면 크게 화를 낼 것이니 약탈을 막을 수 없었다. 사실 막을 생각도 없었다. 저들의 페닝이 곧 마르키시오 가문의 군자금이니 많이 뺏을수록 전쟁이 빨리 끝났다. 그래도 페닝이 목숨만큼 귀하진 않아 대부분 순순히 내주었다.
마르키시오 가문이 통치하는 마도니아 시티까지 한걸음이었다. 중간에 십여 필의 기마병이 나타났지만 애꾸눈이 위협사격 한 번 하자 말머리를 돌려 사라졌다. 기사라 해도 1,200명의 중무장 군대에 덤비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은 성문을 지키는 수비대도 마찬가지였다.
젊고 건강한 영지민은 마르키시오 공작을 따라 출정했고, 성에 남은 이는 젖니도 안 빠진 꼬마와 허리와 무릎 중 필히 하나가 안 좋은 중늙은이 사내뿐이었다. 서해 최대 교역도시답게 1만 명의 자유민이 있지만, 이교도가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싸울 리 없었다. 고로 로벨 로드릭 군을 막을 병력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아니, 싸우지 않을 거면 성문을 열어놓던가.”
싸움개가 투덜거렸다. 성벽 위아래를 봐도 적은 없는데,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시간을 벌려는 건지, 알량한 의무감인지 모르지만 귀찮게 되었다.
“사다리 없지?”
“당연히 없습니다요.”
구름이 걸린 산맥을 타면서 공성장비를 챙겨온 미친놈은 없었다.
“그럼 만들어야겠네.”
물론, 로벨이 만들지는 않았다. 용병들이 한숨 쉬고 흩어졌다. 그래도 다행히 자재로 쓸 것이 많았다. 수레를 부수고 포대자루를 찢어서 사다리 유사하게 생긴 것을 뚝딱뚝딱 만들었다. 서너 명만 넘어가면 되니 많이도 필요 없고 튼튼할 필요도 없었다.
“공왕 폐하! 준비되었습니다요!”
로벨은 각목과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은 20피트 길이 부실 장비를 불안하게 마주했다.
“...몸이 제일 가벼운 사람이 올라가.”
제작자도 불안한지 까치발을 들고 가슴을 부풀리며 내 몸은 날 때부터 무거웠노라 어필했다. 자원자가 아무도 없어 말싸움 끝에 제비뽑기로 세 명을 골랐다. 외관만으로 열외 된 외팔이가 껄껄 웃으며 위로했다.
“원래 성문을 여는 것은 제일의 용사가 하는 거라고.”
“자기 일 아니라고 아무 말이나 하는 거 보쇼.”
창, 방패, 도끼 등 무거운 무기를 풀고 사다리를 기어올랐다. 이번 전쟁 최고의 고비였다. 디딤대가 두 개 부러지고 버팀대 하나가 휘청할 만큼 휘었다. 자칫 셋 다 떨어질 뻔했는데, 운이 좋아 한 명만 떨어졌다. 쿵-
“아악-! 허리! 내 허리!”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인드의 무자비한 용병들은 난쟁이 공연이라도 본 것처럼 웃었다. 그러나 잠시 뒤 웃음이 싹 가셨다. 운이 좋은 줄 알았던 두 용병이 사실은 가장 운이 없었다.
챙- 챙챙- 끄아악-!
칼부림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였다. 7, 8피트 높이에서 떨어져 허리 삐끗한 일과 달랐다. 눈 덮인 산에서 다져진 전우애로 출신 불문하고 표정을 굳혔다.
“이 자식들이?”
무슨 일인지 설명할 필요 없었다. 여장 너머로 사라진 용병 하나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성벽 아래에서도 보일 만큼 상태가 안 좋았다. 목에서 핏줄기가 솟는데 좋을 리 없었다.
칼 맞은 용병은 뭔가를 피하려는 듯 여장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핏물은 미끄럽고 찢어진 근육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버둥거리다가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수평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수직으로는 까마득한 20피트 높이였다. 머리부터 떨어져 즉사했다. 깨진 머리에 빨간 핏물이 소름끼쳤다. 기사도 용병도 웃지 않았다.
성벽 위로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 모나카 왕국인 특유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젊은 기사였다. 그는 성 아래의 로벨 로드릭 군을 훑어보고 엉성한 사다리를 밀어 쓰러트렸다. 그리고 잠시 뒤 화살이 날아들었다.
“제기랄! 빈집이 아니잖수!”
“진작에 성벽을 넘었어야 했는데! 그 사이 준비를 단단히 했잖아!”
성 밖에서 약탈한다고 시간을 낭비한 대가였다. 로벨은 왼손으로 얼굴을 보호하고 오른손으로 지시했다.
“적은 얼마 안 돼! 방패 들고 천천히 물러나!”
용병들도 그 정도는 알았다. 방패를 머리에 이고 뒷걸음쳤다. 등에 파비스를 맨 크로스보우맨은 거북이 흉내를 내기도 했다. 화살은 계속해 날아왔지만 개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침착하게 물러난 덕분에 성벽에서 추락한 1명 말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무적 ‘무패’ 자존심은 크게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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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본격적으로 공성전을 준비했다.
가까운 농가를 털어 지휘 막사를 세우고, 큼직한 상수리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었다. 이쪽으로는 에르나 왕국 용병이 달인이었다. 복잡한 공정 없이 통나무에 홈을 파고 수레에 올려서 앞뒤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화살을 막을 방벽을 세우고 우마가 끌 수 있게 축을 설치하면 좋겠지만, 시간과 인내심이 부족했다.
“적은 많아야 100명이오. 무장이 부실하니 성벽에 오르기만 하면 쉽게 점령할 수 있소.”
로벨이 300야드로 멀어진 마도니아 시티를 보며 말했다. 이때다 싶은 조루아 경이 제안했다.
“적의 숫자가 적으니 부대를 나눠서 여러 곳을 공격하는 게 어떻습니까?”
본인 딴에는 그럴듯하다 생각하는지 의기양양했다. 알폰소 경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사다리가 두 개뿐인데?”
“가, 갈고리를 이용하거나! 해안에 부실한 곳을 공략할 수 있잖소!”
“갈고리는 도끼질 한 번에 끊어지고, 바다는 갑옷 입은 용병이 헤엄칠 곳이 못 되오. 저들이 눈뜬 봉사들도 아닌데 그걸 못 볼까.”
말단 용병들은 동고동락하며 친해졌는데, 지휘관이 문제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고작 100명의 수비병을 뚫는데 복잡하게 굴 것 없소.”
귀가 많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용병들이 통제에 벗어날까 걱정이었다. 시가지에 불을 지르거나 에르나 왕국 함대를 공격하면 골치 아팠다. 호른 경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에르나 왕국군이 주둔 중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적대적으로 나오면...”
“잉그비아 해군이 외해에서 버티고 있는 한 우리와 싸우지 않을 것이오. 병력 손실을 크면 함대 운영에 차질이 생길 테니 말이오.”
에르나 왕국이 참전했으면 진작 성벽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어떤 작전을 세우든 제1방어선을 비울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이 시각 에르나 왕국군을 전함을 타고 부두 밖으로 피신 중이었다.
“그렇다면 저 오합지졸만 치우면 되겠군요.”
고무적이 말이었다. 로벨은 애꾸눈 이하 용병 중대장에게 명령했다.
“저녁 든든히 먹고 일찍 쉬어. 내일 아침 공격을 시작할 거야.”
할 말을 다 했는데 뭔가 부족한 듯 다들 쳐다보았다. 로벨은 잠깐 생각한 후 몇 마디 덧붙였다.
“내일 저녁은 마르키시오 공작의 집에서 먹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그제야 모두 만족하고 각자 자리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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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약속을 잘 지켰다. 해가 뜨기 무섭게 뿔나팔을 불며 공격을 시작했다.
크로스보우맨이 먼저 나가 적정 거리에 파비스를 설치했다. 성벽 위의 적은 어떻게든 훼방 놓으려 활을 쏘았지만, 성인 남자 두 명이 숨을 수 있는 방패벽은 설치하는 동안에도 주인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힘 좋은 풋맨들이 사다리차를 끌며 돌격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파비스 뒤에서 쿼럴을 날아갔다. 사상자는 소수지만 꾸준히 나왔다.
“음... 무난하군요.”
호른 경이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만지며 전황을 분석했다. 크고 무거운 통나무 사다리를 올린 탓에 속도가 다소 느린데, 적의 활솜씨가 별로인지 아군의 엄호가 훌륭한지 꾸준히 전진했다. 사다리차 두 대 중 한 대만 붙어도 성공이었다. 그때, 마녀 키르케가 입을 열었다.
“어제 본 기사님이요.”
호른 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기사? 너는 전부 기사님이라 부르는 습관을 고쳐라.”
“저쪽에 있는 기사님이요. 보통 기사님이 아닌 거 같아요.”
로벨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수비병력을 숨겨서 방심시키고, 기습적으로 사격해 선공을 취했다. 경험이 많고 무장이 잘 된 울프 용병단이 아니었으면 제법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만한 도시를 다스리는 제후인데, 유능한 부관 하나쯤은 있겠지.”
“그래도 병력부족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다리만 올라가면...”
호른 경이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이곳은 서해 최대 규모 교역도시였다. 서해에 도시가 몇 개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해도 충분히 큰 도시였다. 다시 말해 병사는 부족해도 물자는 풍부했다. 특히 어유(魚油)가 아주 많았다.
“어? 어어? 기, 기름이다!”
성벽에 닿은 사다리 위로 반질거리는 기름이 쏟아졌다. 사다리 오르는 용병을 미끄러뜨리겠다는 온건한 의도는 아닐 것이다.
사다리를 따라 기름이 흘러오자 반쯤 올라간 용병부터 사다리차를 끄는 용병까지 기겁해서 도주했다. 무기와 방패를 팽개친 인간도 있는데 직업정신이 부족하다 탓할 수 없었다. 마녀 키르케가 지목한 ‘기사님’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던졌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화르르르륵-!
기름을 얼마나 부었는지 200야드 떨어진 지휘부에서도 눈이 부셨다. 화공을 처음 본 조루아 경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앗! 저 망할 놈들이!”
로벨은 남은 사다리차를 보았다. 첫 번째 사다리차와 거리를 두고 전진 중이었다. 아직 성벽에 닿지 않았지만 결과는 같을 것이다.
“저것까지 잃으면 싸움이 힘들어져.”
로벨은 옆구리에 찬 파나케아 투구를 머리로 옮겼다. 하일리 성에 놓고 온 모닝스타가 아쉬웠다. 바람을 가르는 네발 친구가 있었으면 눈 깜짝할 사이 전선에 갈 수 있을 텐데. 호른 경의 점잖지 못한 소리를 뒤로하고 전장으로 뛰어갔다. 대충 들으니 전장에서 죽은 왕이 생각보다 많다는 역사교육인 듯했다.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