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외해
프라우드 마르키시오 공작은 농부, 어부, 양치기, 강도, 야만인, 자유무역도시의 프리랜서까지 최대한 긁어모아 2,500명의 대군을 만들었다. 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지 3년이 안 된 시점에서 대단한 능력이었다. 로벨 외에는 쉬이 칭찬하지 않는 호른 경마저 인정했다.
“왕좌를 탐낼 만한 수완이군요.”
계획대로 하일리 산과 바드바라 평야를 장악하고 기사들의 충성을 받았으면 4천 명은 거뜬히 모았을 것이다. 오합지졸이라도 숫자가 가진 힘이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산(山)사람에게 고마워해야겠어요.”
마녀 키르케가 모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로벨도 동의했다.
“고마움은 직접 전하는 게 예의라지?”
세상에는 드물게 예의 바른 사람을 싫어하는 이가 있었다. 마르키시오 공작과 하일리 백작이 그러했다.
로벨 로드릭 군은 마르키시오 공작군이 포진한 하일리 산 북쪽 분지가 아니라 계곡길을 따라 간신히 숨 돌린 하일리 성으로 향했다. 요즘 말로 패싱한 것이다. 로벨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하였다.
“저, 저런 비겁한...!”
로벨이 오니까 자발적으로 포위를 풀고 길을 열어준 꼴이 되었다. 당연히 회전을 벌일 거라 생각한 마르키시오 공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로벨은 회전의 회자도 꺼낸 적 없었다. 수천 명의 군사가 모였다고 꼭 정면승부하란 법은 없었다.
전장에서 바람맞은 공작도 어이없지만, 자칭 사자 대신 자칭 늑대가 들이닥친 하일리 백작도 어이없었다.
“성문을 여시오! 그대들을 돕기 위해 볼탄 반도의 로벨 로드릭 공왕이 왔소!”
산비탈을 따라 늘어선 로벨 로드릭 군은 장엄했다. 그러나 1대 10 전력 차에도 완강히 저항한 하일리 산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적법하게 왕위를 계승한 모나카 국왕 외에 따르지 않는다! 볼탄 반도 나부랭이건 마르키시오 비렁뱅이건 썩 꺼져라!”
“뭐? 산속에 틀어박힌 거지 떼가 감히 뭐라는 것이냐!”
호른 경, 랭스터 경, 알폰소 경이 악다구니 쓰듯 마주 욕했다. 그러나 정작 볼탄 반도 나부랭이는 좋아했다.
“아주 훌륭한 기사야.”
기사도(Chivalry)의 근본은 성실한 계약이행이다. 일부 동방대륙 사람은 맹목적인 충성이 기사도라 생각하는데, 어릴 때 세뇌된 야만족 황제의 소년병을 기사라 하지 않았다. 계약에 따른 충성과 무조건적인 충성이 뭐가 다르냐 묻는다면, 저 산사람을 보여주면 되었다.
“저 사람들이요?”
“사람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왕’이라는 자리에 충성하잖아. 저들은 누가 왕이 되든 관심 없을 거야. 하일리 산의 통치 권리를 인정받는 게 중요하지.”
“에헤, 그건 농민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렇지. 따지고 보면 기사나 농노나 같은 종사(從士)잖아.”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잡담하며 산성 가까이 다가갔다. 가장 서투른 활잡이도 두 번 중 한 번은 맞힐 거리였다.
로벨 로드릭 군은 최고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 침묵했고, 하일리 백작군은 상대가 침묵하니 덩달아 침묵했다. 고요한 산중에 로벨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볼탄 반도의 왕, 늑대성의 공작, 포클랜드의 후작, 크레타 시티의 정복자, 북부대로의 관리자, 청옥성의 지배자, 푸른 고래 함대의 주인, 로벨 로드릭이오.”
언제 들어도 장황한 자기소개였다. 자세한 지명과 작위를 몰라도 보통 사람이 아니란 느낌을 주었다. 성안이 웅성거렸다.
“보, 본인은 하일리 가문의 시모네 하일리 백작이다!”
하일리 산에 사는 사람이라 하일리일 뿐인 시모네 하일리 백작이 기죽어서 대답했다. 기사들이 칭호작을 괜히 하는 게 아니었다. 로벨은 작은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본인은 산사람의 충성을 요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당장 떠나라! 우리는 지배하지도, 지배받지도 않으니!”
그럴듯하게 외쳐도 ‘우리 좀 내버려 둬!’였다.
“그럴 수 없소. 우리가 물러나면 마르키시오 공작이 그대들의 복종을 요구하며 공격할 것이오.”
“그것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당연히 그럴 것이오. 허나, 우리와 함께하면 더 쉽지 않겠소?”
로벨은 성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를 높였다.
“본인은 안토니오 엠마누엘 왕자의 부탁을 받아 프라우드 마르키시오 공작을 격퇴하러 왔소! 그것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소! 그대들이 고향을 사랑하는 만큼 본인 또한 본인의 고향을 사랑하오! 이 전쟁이 끝나면 내 땅, 내 가족에게 돌아갈 뿐이니, 그대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생각도, 관심도 없소!”
로벨 치고 긴 대사였다. 그만큼 진심이기도 했다.
“싸우는 이유는 달라도, 싸우는 상대는 같지 않소? 우리 힘을 합칩시다.”
고집불통 산사람이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로벨이 마르키시오 공작을 골탕 먹여 자신들을 도와준 일은 알고 있었다. 그 일을 내세워 협조를 요구하면 고지식한 성품에 모른 척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로벨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살짝 마음에 들었다.
“마르키시오 공작이 물러날 때까지요. 그때까지만 협력하겠소.”
로벨의 뜻도 그러했다.
“그대의 호의에 감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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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리 가문 이름을 따서 하일리 산이라 주장하지만 하일리 산사람의 동의를 하나도 받지 못한 하일리 백작이 껄껄 웃으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무적무패 왕의 풍문은 익히 들었소! 10만 군사를 쳐부수고 인어해 북쪽 땅을 모두 지배한다지?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시오!”
어디서 그런 풍문이 났는지 당혹스러웠다. 로벨이 점잖게 정정해 주었다.
“그럴 수 있었지만, 다른 왕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좀 봐주었소.”
애꾸눈이 술을 뿜고 화급히 사과했다. 그리고 거짓말과 허세의 심리적 차이를 고찰했다.
“으하하핫! 솔직히 소문이 과장이라 생각했소! 하지만 오늘 공왕을 보니 진실이란 것을 알겠소!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이번 겨울에 서른일곱... 아니, 마흔한 살이 되오.”
“허어? 진짜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젊음의 비약이라도 잡수었소?”
하일리 성은 요새처럼 지어진 산성이라 아성(Keep)이 없었다. 병사와 주민이 지낼 작은 집들이 한 곳에 모여 있고, 그 중 가장 큰 집을 백작을 사용했다. 지금 연회가 열린 곳이 백작의 거처였다.
술은 넉넉하지만, 음식은 많지 않았다. 겨울을 날 식량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로벨은 휘하 기사들이 듣지 못하게 나직이 물었다.
“이 성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하일리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기사는 자존심으로 살아간다는데, 기사의 정석 같은 백작이었다.
“본인이 대답할 이유가 없군.”
어린 집사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기사다운 게 꼭 좋지는 않았다.
“눈이 쌓이면 공작과 일전을 치를 것이오. 30일이 될지 100일이 될지 알 수 없으니 식량 사정을 꼭 알아야 하오.”
로벨이 계획을 밝히자 하일리 백작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그렇다면 문제없소! 열흘이 지나면 첫눈이 내리고, 열닷새가 지나면 거북할 만큼 쌓일 것이오!”
“열흘? 어찌 장담하시오?”
“우리 가문은 이 땅이 하일리 산이라 불리기 전부터 살아왔소.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는 시기를 모를까.”
볼탄 반도에서 300년을 살아온 로드릭 가문은 매년이 새로워 동의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스무날쯤은 배불리 먹을 식량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로벨이 술잔을 들고 중얼거렸다. 이름 모를 영감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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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네 하일리 백작의 예언은 ‘거의’ 맞았다.
열흘이 아니라 열이틀 후에 눈이 내렸고, 중간에 해가 떠서 열아흐레가 지난 후 쌓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얼추 맞았다.
“옛 신이시여! 제 명예를 지켜주셨나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나이다!”
장담한 열흘 이후 매일 피가 마른 하일리 백작은 첫눈 맞은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머리에 털이 난 지 반세기가 지난 중년 기사치고 경박했다. 호른 경이 못 볼 꼴 본다는 듯 마지못해 인정했다.
“다행히 비슷하게 맞췄군요. 인정할 만합니다.”
“음... 그런데 어떻게 알아맞힌 거지? 마법인가?”
“에헴! 인어의 바다에서 만들어진 비구름이 계절풍을 타고 내려오다 높은 산맥에 걸려 눈이 되는 모양이에요. 매년 이맘때에 첫눈이 온다네요.”
기사가 마법을 의심하고, 마법사가 과학을 설명하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로벨은 복잡한 자연과학에 학을 떼었다.
“이제 마르키시오 공작은 산을 오르지 못할 거야. 그냥 올라와도 힘든데 눈 맞으며 싸울 수 없으니까.”
“산 아래에서 포위하고 기다릴 겁니다.”
산 아래는 아직 쌀쌀한 정도라 추위가 무기가 되지 않았다. 추워질 때까지 기다리면 하일리 성의 식량이 바닥날 것이다. 로벨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우리는 서쪽으로 갈 것이오.”
“서쪽... 서쪽은 그냥 산입니다만...”
하일리 산맥은 라베노 시티에서 서쪽 바닷가까지 길게 늘어져 모나카 왕국과 야만의 땅을 가르는 장벽 같았다. 중간중간 사람이 넘는 샛길이 있어 못 갈 곳은 아니지만, 아침저녁 산책하듯 오갈 곳도 아니었다.
“산 능선을 따라가면 그리 험하지 않소. 이곳 기사들이 충고하기를, 눈, 추위, 가파른 길이 위험하다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눈 내리는 언덕 나라에서 온 기사와 용병이 실소했다. 북부인의 자존심이 인정하지 않았다.
“과연, 이걸 노리셨군요.”
“확실히 마르키시오 공작은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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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군장을 단단히 꾸려서 하일리 성을 출발했다.
시모네 하일리 백작이 길잡이를 붙여주었지만 시킬 일은 많지 않았다. 시야가 좌우로 확 트인 능선이었다. 오른쪽으로는 큰 강물이 흐르는 평야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침엽수가 듬성듬성 자란 고지대 숲이 보였다. 산맥에 가로막혀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 듯했다.
어느 날은 머리가 하얀 산봉우리를 보았고, 어느 날은 구름인지 안개인지 산속의 호수를 보았다. 그림 같은 절경 속에서 1,200명의 무장인원이 산양처럼 걸어갔다.
“전쟁하러 온 건지, 산 타러 온 건지...”
“조금만 참아. 곧 있으면 마르키시오 공작령이다.”
웅장한 자연과 달리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었다. 기사와 용병은 마르키시오 공작의 마을을 약탈할 생각에 꿋꿋이 참았다. 주력이 하일리 산에 묶여 있으니 후방은 자물쇠 없는 곳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하좌우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고향에 갈 수 있었다.
“바, 바, 바, 바다닷!!”
산봉우리 아래로 반짝이는 물이 보였다. 태양조차 전부 비추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물이었다. 첩첩산중에서 바다를 찾는 게 해괴한데, 진짜 바다였다.
“저기가 세상의 끝이구나.”
로벨이 새삼스럽게 중얼거렸다. 북해와 인어해는 자주 보았지만, 외해는 처음이었다. 실제로는 사흘쯤 부지런히 걸어가야 할 거리였으나 눈에 보이니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혹은 새로운 세상의 관문이죠.”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짚고 헐떡이며 말했다. 모처럼 마법사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끝이라고 하죠. 늑대성에서 족히 1,500마일은 온 것 같아요. 으앙! 우리 귀염둥이 보고 싶다!”
이것은 마녀 키르케다운 말이다. 로벨은 빙그레 웃고 외해와 가까운 작은 도시-실제로는 인구 1만 이상의 대도시-를 가리켰다.
“저기서 배를 타면 어린 집사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어.”
로벨은 귀염둥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마녀 키르케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