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81화 (581/605)

581화. 혈족

모나카 왕국 수도. 라베노 시티.

일반적으로 ‘수도’라 하면 역사가 좀 있는데, 라베노 시티는 예외적으로 80년이 안 된 신생 도시였다.

“그래도 로드릭 시티보단 길잖아요?”

“아니야. 아니야. 로드릭 ‘시티’가 된 게 좀 짧지 지역 역사는 330년이 넘어.”

로벨이 고향의 역사를 추켜세웠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늑대성이 세워진 것은 샘 포클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라베노 시티는 3세대 전만 해도 야만의 땅을 지나는 유목민이 잠깐잠깐 머무는 야지(野地)였다.

“그런 땅에 왜 수도를 만든 걸까요? 뭐, 저걸 보면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요.”

라베노 시티는 처음부터 수도로 지정해 만든 계획도시였다. 농촌에서 상업 도시로 지금도 확장해가는 로드릭 시티와 달랐다.

늑대성을 두 개쯤 넣을 수 있는 거대한 왕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직선대로가 뻥 뚫려 있었다. 그렇게 자연히 나누어진 4개 구역을 북 시가지, 남 시가지, 시장과 행정구역, 공방구역으로 활용했다. 주거공간이 도시의 절반이지만 넘쳐나는 사람을 다 수용하지 못해 도시 외곽에는 어쩔 수 없는 빈민촌이 있었다. 지금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것만 제외하면 아름다운 도시였다. 세 왕자의 조부 되는 페데리코 엠마누엘 1세가 20년에 걸쳐 지었다는 수호궁(守護宮)이 특히 압권이었다.

하중을 어찌 버티는지 궁금한 거대 둠 천장 아래 색유리를 이어 만든 스테인드글라스가 큼직큼직하게 자리하고 용, 가고일, 하피, 늑대, 원숭이 등의 짐승조각이 빈자리를 빼곡히 채웠다. 마녀 키르케가 3초에 한 번씩 감탄했다.

“늑대성도 유리창을 달면 안 돼요?”

“유리창은 비싸.”

그냥 유리도 비싸지만, 판유리를 만들 기술력이 없어 작은 유리를 이어붙인 유리창은 아주 비쌌다.

“에이, 기사님은 부자잖아요.”

그건 그렇다. 예전에 토너먼트로 생활비 벌던 로벨 로드릭이 아니었다. 유리가 비싸 봤자 볼탄 반도 최고 권력자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도시 교회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하니 로벨도-그리고 어린 집사가-마음먹으면 늑대성을 유리창으로 바꿀 수 있었다. 허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예쁘긴 한데, 잘 깨지고 약하잖아. 창이 크면 화살도 많이 들어와.”

비바람보다 화살을 걱정하는 게 참으로 기사다웠다.

한가로운 척 풍경을 구경하고 잡담을 나누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시민들만 못마땅한 게 아닌 듯 창을 겨누고 위협하는 엠마누엘 왕실 병사가 있었다.

귀까지 덮는 맞춤형 투구를 쓰고 촘촘하게 엮은 사슬갑옷을 입은 것이 한눈에 봐도 정예 병사였다. 숫자가 50명이 안 되어 그냥 지켜보는 것이지, 2배만 되었어도 위협으로 간주하고 무력 대응했을 것이다.

“왜 저러는 걸까요? 기사님, 혹시 저 몰래 사고 쳤어요?”

“공왕 폐하가 무슨 사고를 치느냐! 네가 마녀라 그러겠지!”

“전 호른 기사님한테 물은 건데요?”

“뭐라고?”

“조용해. 왕자가 오면 알겠지.”

로벨 일당은 기약 없이 기다렸다. 성문은 활짝 열려있고, 무장 인원은 왕실 병사를 포함해도 7, 80명밖에 안 되니 힘으로 뚫고 갈 수 있지만, 셋째 왕자나 조루아 랭스터 경이 올 때까지 예의 바르게 기다렸다.

개선식 비슷한 것을 기대하고 하루 23마일씩 행군한 군대에게 힘든 일이었다. 열정적인 남국 아가씨의 키스를 기대하며 세수하고 수염을 다듬은 매운 발효 배추 스프 청년도 많았다.

불만이 얼굴에서 목구멍으로 옮겨갈 때, 뻥 뚫린 북문대로로 십여 필의 기마가 나타났다. 눈이 좋은 애꾸눈이 아는 얼굴을 발견했다.

“파울로 왕자와 조루아 랭스터 경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선두가 아니었다. 초면이지만 익숙한 낯짝의 30대 사내가 맨 앞에 있었다. 좀 더 가까워지자 왜 익숙한지 깨달았다. 파울로 왕자 얼굴에 칼자국을 내고 수염을 붙이면 딱 저 얼굴이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로벨 이하 고참 용병들은 씨종자에 감탄하다가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은 불쾌감을 표시할 때였다.

“그쪽이 안토니오 왕자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듯 말(馬)이 거칠게 숨 쉬었다.

“그리 묻는 그대가 로벨 로드릭 왕이군.”

생김새는 닮았는데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셋째 왕자에게서 느낄 수 없는 권위의식, 달리 말해 위엄이 있었다. 로벨도 짐짓 왕의 위엄을 세웠다.

“그대의 부탁을 받고 1,200마일을 달려온 사람에게 할 말이 그것뿐이오?”

양심이 있는 인간이면 굽힐 수밖에 없는 대사였다. 그런데 왕자는 양심이 없거나 인간이 아닌 모양이다.

“파레초 시티를 무단으로 공격했다고 들었소.”

질문도, 확인도 아니었다. 책망이었다. 로벨이 의아해서 물었다.

“적의 의표를 찔러 승리한 것이 잘못이오?”

“그대가 외국인이란 것이 잘못이오.”

인어해 북쪽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전쟁을 하는데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외국인이 쏜 화살에 죽으면 지옥 가나?’ 다국적으로 구성된 북군(北軍)과 프리랜서라 더욱 어리둥절했다. 조루아 경이 로벨 쪽으로 말을 몰아왔다. 모자 대신 바이저를 고쳐 올려 경의를 표시하고 나직이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공왕 폐하가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배타적입니다.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부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공포와 불안이었다. 북쪽 바다와 남쪽 바다에서 5개국이 모인 모나카 왕국이었다. 자칫하면 자신도 당할 수 있다는 막연한 공포가 있었다. 그런데 조루아 경의 행동이 변화를 가져왔다. 그럴 의도로 자리를 바꾼 것은 아니지만, 조루아 경과 조루아 경의 군대가 로벨 휘하란 것이 강조되었다. 안토니오 왕자는 갑자기 초라해진 자신의 일행에 헛기침했다.

“자세한 것은 수호궁에서 이야기합시다. 사람을 보내 초대할 테니 군사를 도시 밖으로 물리고 호위 병력만 추리시오.”

그리 말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호른 경이 발작적으로 워 해머를 쥐었다.

“저런 무례한...!”

“그만.”

로벨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기분 따라 침을 뱉고 계획을 철회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무엇보다 셋째 왕자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저쪽도 저쪽 입장이 있을 것이오. 일단 대화부터 합시다.”

@

로벨에게 불만이 많아도 직접적으로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루아 경이 이끌고 온 남군(南軍) 포함 579명과 로벨이 이끌고 온 북군(北軍) 포함 422명을 합치자 순수 전투인원만 1천 명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거기다 알폰소 경이 모집한 후속부대가 팔레모 항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집 앞에 호랑이가 있으니 기침도 크게 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무례를 용서하시오.”

로벨은 사과를 받지 못했다. 옹졸해서가 아니라 딴 데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수호성(城)이 아니라 수호궁(宮)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다. 멀리서 볼 때도 화려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왕좌는 5년째 비어있고, 제후들의 반란과 외세의 간섭이 끊이지 않소. 이럴 때 본인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시민이 불안에 떨게 되오.”

과장이나 은유가 아니라 진짜 눈이 부셨다. 로벨은 황동으로 된 비늘갑옷에 손을 뻗다가 흠칫해서 몸을 돌렸다. 호른 경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어린 집사였으면 한심하게 쳐다보았을 것이다. 로벨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아니, 금인가 해서...”

“설마 금이겠습니까.”

로벨 일행이 속닥이자 한 걸음 앞서가던 안토니오 왕자가 돌아봤다. 로벨과 호른 경은 반사적으로 아무 말을 날렸다.

“정말 멋진 곳이오! 소문대로 남쪽 나라는 부자 나라인 모양이오?”

“우리 폐하께서는 항상 진지하시오. 그 근엄함은 금붙이에도 흔들리지 않소.”

뭐하는 짓인지 모르지만, 성문 밖 무례에 화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안토니아 왕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과를 받아주어 고맙소.”

로벨은 ‘내가? 언제?’ 표정을 짓다가 호른 경 도움으로 아슬아슬하게 관리했다.

안토니오 왕자는 두 손으로 안내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다시 앞장섰다. 궁궐이 얼마나 큰지 회랑이 끝없이 이어졌다. 모스크가 있는 중앙 건물까지 한참 남았다.

“마르키시오 공작이 남쪽으로 군대를 이동시켰소.”

로벨은 벼락치기로 공부한 모나카 왕국 지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부족한 기억력을 시인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곳이오?”

“오늘 들어온 정보는 에볼리 지방을 지났다는 것뿐이오. 아, 에볼리 지방은 공왕이 지나온 모래길 반대편이오. 하일리 산맥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소.”

로벨의 사정을 이해하고 설명을 조금 붙였다. 그래도 어딘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본인이 아니군.”

“그렇소.”

마르키시오 공작의 목표는 로벨 로드릭 군이 아니었다. 바다가 아니라 산으로 간 것이 증거였다.

“공왕을 탓하고 싶지 않으나, 공왕이 알비치 후작의 콧대를 부순 탓에 세 다리의 균형이 깨졌소.”

그걸 의도한 것이지만, 일단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비난 받고, 후작이 의심 받는 동안 세력을 불릴 것이오. 왕위계승자인 형님을 추대하고 있으니 정통성과 명분 또한 문제없을 테지.”

로벨은 조금씩 불편함을 느꼈다. 할 말이 있는데 하지 않고 뜸 들이는 사람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이었다. 눈치가 좋으면 속내를 읽고, 눈치가 없으면 아예 신경 쓰지 않을 텐데, 어설프게 느껴서 더욱 답답했다. 다행히 이쪽으로는 호른 경이 있었다.

“정말 무례하시군.”

호른 경이 사납게 중얼거렸다. 안토니오 왕자가 발을 멈췄다.

“북해 4국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한 무적무패 왕이오. 그대가 감당할 수 있겠소?”

호른 경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았다. 옆구리를 찔러 묻고 싶지만 체통 때문에 참았다. 다행히 호른 경이 먼저 설명했다.

“공왕 폐하를 조종하려는 수작입니다.”

“응...?”

로벨을 책망하고, 시민의 적개심을 내세우며, 묻지도 않은 군사정보를 일러주었다. 고상한 척을 빼면 뻔한 의도였다. 안토니오 왕자는 순순히 시인했다.

“솔직하지 못해 미안하오. 짐작한 것이 맞소. 공왕께서 마르키시오 공작을 막아주길 바라오.”

“그러고 또 다시 공왕 폐하를 탓하겠지! 그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우리를 모욕하는 것 아니오!”

“그럴 작정으로 온 것 아니었소?”

“뭣이라?”

로벨도 이제 알았다. 호른 경 말대로 정말 무례했다. 한 번은 참았지만 두 번은 참지 않았다.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진심이 담긴 협박을 빠르게 골랐다. 안토니오 왕자의 다음 대사가 없었으면 로드릭-엠마누엘 동맹은 지금 깨졌다.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는 듯하니 이 자리에서 약속하겠소. 프라우드 마르키시오 공작을 죽이시오. 그러면 로벨 로드릭 왕이 옛 신의 품에 귀의할 때까지 팔레모 항구의 모든 권한을 양도하겠소.”

성격은 마음에 안 드는데, 씀씀이가 아주 좋았다. 로벨은 혓바닥 위에 올라온 협박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오?”

오늘 밤 잠자리에서 후회할 반문이었다. 안토니오 왕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큼직하게 웃었다.

“원한다면 혈족의 피로 증명하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