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80화 (580/605)

580화. 원망

로벨이 속았다.

작정하고 속인 것인지, 기회가 되어 속인 것인지 모르지만, 조반니 알비치 후작은 협상 시간을 벌어 수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로벨은 화내지 않았다. 어느 정도 상정한 일이고, 강행군의 후유증을 해소할 휴식이 필요했다.

“철수! 철수! 그냥 버리고 철수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당당히 맞아야 남자지만, 사람이 쏘는 비는 아니었다. 맨앳암즈 60명이 원형 방패를 머리에 이고 후다닥 도망쳤다. 쇠와 나무로 된 화살비가 뒤를 쫓았다. 억세게 재수 없는 한 명이 자빠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애꾸눈이 혀를 차고 보고했다.

“기름통 설치가 끝났습니다.”

하얀 모래 요새 격자 성문 앞에 크고 작고 둥글고 네모난 나무통이 잔뜩 쌓였다. 로벨이 짤막하게 명령했다.

“불 붙여.”

사냥꾼 집안에서 자랐거나 궁병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는 용병 7명이 롱보우를 재었다. 기름에 흠뻑 젖은 헝겊 뭉치가 화톳불 가까이 스쳤다. 7개의 화살이 7개의 불화살이 되었다.

“쏴라!”

급조한 아처 부대라 솜씨가 별로였다. 2발은 성문 근처에도 못 갔고, 3발은 엉뚱한 곳에 맞아 튕겨져 나왔다. 그나마 기름통에 꽂힌 화살도 힘이 부족한지 맞은 위치가 별로인지 아무 반응 없었다. 애꾸눈은 실망하지 않고 재차 명령했다.

“될 때까지 쏴라!”

그래도 세 번 안에 되어야 했다. 준비한 불화살이 21발뿐이기 때문이다. 첫 사격보다 명중률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불이 붙지 않았다. 이곳 시민은 기름통을 아주 튼튼한 걸로 쓰는 모양이다.

세 번째 사격은 통제 없이 마구잡이로 쏘았다. 긴장이 풀렸는지 성벽 위의 적들이 조롱했다. 아군의 조롱은 더 심했다. 아처들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다. 그런 화기 탓인지 마침내 효과가 나타났다.

콰과광-! 쾅-!

기름통 사이에 널어둔 화약이 폭발했다. 고작 3파운드 남짓한 양이지만, 주위를 둘러싼 발화물질에 힘입어 성을 뒤흔들었다. 쿵- 쿠쿵- 허벅지 굵기의 격자 성문이 반쯤 사라지고, 여닫이 성문에 불이 붙었다.

“이야-! 효과 좋은데요?”

강철로 테두리를 강화했고, 안쪽에서 물을 끼얹으며 대응하니 저 정도 불로 성문을 뚫지는 못했다. 설령 뚫려도 2차, 3차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으니 무턱대고 돌격할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사다리를 들쳐메고 대기하던 용병들이 맥 빠져서 돌아보았다. 전투수당을 약속받고 사기를 끌어 올린 참이라 허무했다. 하지만 첫 전투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내일은 파비스 설치하고 쿼럴을 쏘자.”

그리고 그것도 충분할 것이다. 로벨 진짜 목적은 성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적무패 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아니, 생각이란 게 있나?”

울프 용병단 소속이 아닌, 페르젠 가문이 중계로 고용한 프리랜서가 ‘놀랍게’ 의문을 제기했다. 무적무패 신앙으로 의심을 잊은 싸움개 일당이 불쾌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우리 왕을 모욕한 것이냐?”

예상 밖으로 분위기가 살벌하자 화급히 변명했다.

“아, 그렇잖소? 시간이 지나면 알비치인지 롱비치인지의 봉신들이 떼로 몰려와 도시를 포위할 텐데, 그때는 안팎으로 싸워야 하잖소?”

칼밥을 뒷구멍으로 먹진 않았는지 제법 일리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10년의 세월 동안 검증된 신앙을 흔들지는 못했다.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뭐, 그렇겠지. 공왕 폐하잖아?”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믿음이 부족해서 구원 받지 못한 프리랜서가 자기 가슴을 때렸다. 하지만 광신도와 싸워 이길 수 없으니 더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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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생각을 읽을 만큼 지혜와 식견이 있는 자는 드물었다.

“소문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 ‘지혜로운 자’에 마녀 키르케가 끼어있어 여러 사람이 불편하였다.

“소문이 나면 안 좋잖소? 적들이 더 많이 몰려올 텐데?”

외팔이가 심각하게 따졌다. 외팔이 수준이 그러했다. 마녀가 뒷짐 쥐고 늙은 교수처럼 ‘어흠! 어흠흠!’ 하였다. 저런 행동 때문에 불편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그래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지혜를 구하러 왔으니 합격입니다. 조퇴하세요.”

“졸업이겠지.”

“앗, 건방지군요. 퇴학입니다.”

“아, 좀! 공왕 폐하의 속내 좀 들읍시다! 그쪽은 따로 들은 게 있지 않은 거 아니야!”

로벨의 정부(情婦)로 소문나 가끔 이렇게 오해 받았다. 마녀는 로벨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해명하지 않았다. 입술을 한 번 삐쭉이고 지혜를 나누어주었다.

“소문은 적에게 내는 게 아니에요.”

“적이 아니면 아군?”

“수도에 있는 왕자들이 지원 오기를 기다리는 건가?”

답을 구하러 올 만큼 탐구적인 용병들은 모나카 왕국 지리를 그려보았다. 그럴듯하지만 아닌 것 같았다. 라베노 시티는 너무 멀었다. 알비치 후작의 기사들이 먼저 모일 것이다. 마녀가 조용하라는 듯 손가락을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아군도 아니에요.”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면, 누가 소문을 듣는단 말이오?”

“적의 적이요.”

모두가 뻥졌다. 마녀가 ‘이히히힛!’ 웃으며 말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이 있지만, 꼭 그렇지 않잖아요? 엠마누엘 왕자에게 반항하는 제후는 서로 적대적이니까요. 그런 제후가 지금 많잖아요?”

“설마, 마르키시오 공작?”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확인했다. 마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딩동댕!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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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같지 않지만, 마녀 키르케만큼 지혜로운 기사 호른 경도 로벨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 문제까지 지적했다.

“최선보다는 최악을 가정하는 게 안전하지요. 마르키시오 공작이 어부의 마음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혹은 알비치 후작이 아니라 우리를 노리면 어찌 됩니까?”

로벨도 고민한 문제였다.

“잉그비아 왕국이 바다에 버티고 있으니 에르나 왕국군은 움직이지 못하오. 공작의 병사만 싸운다면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소.”

마르키시오 공작의 휘하 병력도 1천 명은 될 텐데 가벼이 말했다. 무적무패 왕이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오. 변화가 있어야 기회도 있지 않겠소?”

역사적으로 위대한 왕, 위대한 장군의 일화를 들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작전을 세워 이기는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신이 아닌 이상, 설령 신이라 해도 피조물에게 자율성을 부여한 이상 변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인생은 카드게임보다 체스에 가까웠다. 정해진 결과를 맞춰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대응하여 승리하는 것이다. 설령 미래에서 회귀한 자가 있다 해도 로벨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상대가 수를 바꾸면 로벨도 수를 바꿔서 응수할 테니까. 뭐, 그런 회귀자라면 로벨을 이기기 위해 애쓰기보다 로벨의 편에 서는 것을 택하겠지만.

“다른 이가 그리 말하면 열과 성을 다해 비웃겠으나, 공왕 폐하라 그러지 않겠습니다.”

“본인을 사랑해서?”

“그, 그것도 있지만, 이 경우는 신뢰입니다.”

사랑보단 못하지만 좋은 단어였다. 로벨이 귀한 미소를 감추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오. 알비치 후작의 봉신들이 위험 수준으로 모이기 전에 철수해야 하오.”

사흘 전에 첩보 활동을 시작하여 타이밍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방해였다.

“성 안의 후작과 기사들이 순순히 보내주겠습니까?”

“보내줘야 할 것이오.”

로벨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로벨을 오랫동안 지켜본 호른 경은 저 시큰둥이 무엇인지 알았다. 내키지 않는 일을 준비 중이었다.

“도시를 떠날 때 불을 지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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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모래 요새 공성전은 재미없게 진행되었다.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공격과 수비를 반복했다. 사상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닷새 동안 싸웠는데 양쪽 합계 20명만 죽거나 다쳤다. 거의 민속놀이 수준이었다. 이 시대 민속놀이가 좀 과격한 편이다.

전술적으로 보면 알비치 후작의 승리였다. 죽지도, 항복하지도 않고 적을 막아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로벨 로드릭의 승리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횃불 가져와.”

파레초 시티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협상기간 3일, 전투시작 5일 동안 귀중품을 챙겼고, 대피할 시간도 충분히 주었기에 시민 피해는 크지 않았다.

“아아아...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엄마! 엄마아-!”

물론, 폭력을 동반한 약탈과 분별이 없는 방화보다 낫다는 것이다. 가장 큰 재산인 집이 불타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정신적 피해는 별도였다. 애꾸눈이 그을림 묻은 안대를 만지며 보고했다.

“관공서와 조합건물 위주로 불을 놓았고, 크게 번지지 않게 열 집에 한 채씩은 손을 봤습니다.”

로벨은 모닝스타 위에서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연기 나는 곳이 20곳이었다. 10집씩만 불타도 200채 건물이 재가 되었다.

도시행정과 경제활동에 필수적인 곳은 빠트리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군이 철수해도 알비치 후작에게 추격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아래로 당기며 속삭였다.

“사람들이 많이 화내겠죠?”

“...각오한 바야.”

로벨에게 화내는 만큼 알비치 후작에게도 화낼 것이다. 본인이 평소 주장하던 대로 둘째 왕자에게 충성맹세하면 될 것을 자존심 세우다 피해를 끼쳤다고 말이다. 이래서 명분이 중요했다.

“이제 출발하자. 외팔이는 길 잃고 헤매는 부하 없는지 확인하고 따라와.”

“예! 걱정 마십쇼!”

울프 용병단 1중대가 장전된 크로스보우를 좌우로 겨냥하고, 전리품과 징발한 물자를 실은 수레가 뒤따랐다.

도시 외곽으로 화마를 피해 모인 시민이 원망 서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로벨 딴에는 자비를 베풀었지만, 저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는 힘들었다.

“뭘 꼬라 봐! 확 마! 눈깔을 파버릴까!”

자비롭지 못한 용병들은 강제로 동의를 구하는 법을 알았다. 사내 몇 명 잡아다 목을 치면 전부 납짝 엎드릴 것이다. 그런 폭력의 낌새를 느꼈는지 구경꾼이 뿔뿔이 흩어졌다. 괜히 성질 낸 용병이 투덜거렸다.

“하여간 우리 폐하는 착해 빠져가지고.”

“그게 존경스러운 거지.”

제일 처음 점령한 도시 서문으로 빠져나갔다. 무기, 식량, 금·은화를 채운 수레 열다섯 대가 추가되고, 불타는 시가지가 배경으로 자리했다.

불이 붙은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모나카 왕국 정세에도 불이 붙었다. 로벨이 의도한대로 적과 적의 적에게 소문이 퍼졌다. 알비치 후작의 권위가 도마에 올랐고, 마르키시오 공작에게 칼이 쥐여졌다. 요리사의 솜씨를 테스트 받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장기인 급속 행군으로 진작 갔어야 할 라베노 시티를 향했다.

영리한 호른 경이나 우매한 외팔이나 이 땅에 오자마자 승리했으니 환대 받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라베노 시티의 반응은 남해 왕국치고 차가웠다. 잘 하면 서리가 내릴 것도 같았다.

“여기 분위기 왜 이래?”

“조루아 경을 불러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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