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한 글자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휘두르고 칼날을 살폈다.
투구를 세 개 쪼개고 뱃가죽을 일곱 번 헤집었는데 매끈하니 이빨 하나 나가지 않았다. 역시 호수 요정의 마법검이었다. 반면 싸움개 일당은 부러지고 휘어진 무기를 대신할 전리품을 수거 중이었다.
“무기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벌써 망가지냐?”
“이게 내 탓이야? 저 공왕 폐하가 미쳐가지고 날뛰니까...”
미친 왕이 옆에 있어 말꼬리가 흐려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고 붉은색 여장에 한 발 올렸다. 파레초 시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우뚝 솟은 후작의 아성(牙城)이 보였다.
“내 작전대로 성공했잖아?”
“그걸 작전이라 해야 할지요...”
도시 성문을 장악하는 것은 쉬웠다. 싸움개 패거리 10명을 데리고 태연히 접근해 그대로 칼부림했다. 시절이 시절이라 서른 명 가까운 성문 수비대가 있었지만 무적무패 왕의 깜짝 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름과 목적을 밝히고, 항복권유 1초 후에 지휘관 머리를 쪼개고, 사방팔방 칼질하며 기선을 잡으니 수비병이 모두 줄행랑쳤다. 여기까지 1차 전투였다. 숨 가쁜 소리로 살인의 여운을 공유하지도, 의미심장한 제스처로 승리를 자축하지도 않았다. 로벨과 싸움개 일당은 시내로 도주하는 수비대를 그대로 추격했다.
“후작이 있는 내성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쉬워.”
로벨과 싸움개는 상황판단을 못 한 파레초 시타델(Citadel), 붉은 모래 요새를 그대로 공격했다. 조금 전 싸움개 일당이 말했듯 미친 짓이었다.
호른 경과 애꾸눈 볼포스가 곧장 들이닥쳐 텅 빈 성문을 점거하고-이때쯤 알비치 가문 기사가 상황을 보고하러 갔다- 로벨을 돕기 위해 100명의 후속부대를 보냈는데, 그때까지 로벨과 싸움개 패거리는 요새 입구가 닫히지 않게 버텼다. 11대 300 싸움을 계속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싸움개 패거리 중 사상자가 쿼럴에 맞고 죽은 척한 ‘야비한’ 폴츠 1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죽은 척이 아니라 기절한 거라고! 중간에 깨어난 거야!”
변명을 확인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동, 남, 북쪽 성문에 각각 2개 소대를 보내고, 주력인 울프 용병단으로 알비치 후작이 있는 내성 요새를 포위했다. 고작 1시간 반 만에 도시 절반을 점령했다. 시민 중 상당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니 굉장한 속도전이었다.
“가장 중요한 곳이 남아 있지요.”
“가장 까다로운 곳이기도 합니다.”
유라피아 대륙의 수천, 수만 개 성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어떤 성은 대포 서너 방에 쉽게 함락되지만, 어떤 성은 몇 년에 걸쳐 공격해도 끄떡없었다. 알비치 가문의 본성(本城) 하얀 모래 요새는 후자에 속했다.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름은 엄청 부실해 보이는데요?”
“이 도시를 지나는 길이 ‘모래길’이라 이름을 빌린 것이지, 모래로 지은 성이 아니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모래길은 아이란드, 알베니아, 모나카 3국을 모두 관통하는 육상 무역로였다. 조선술이 발전하고 해운업이 발달하여 과거 같은 영광은 없지만, 적에게 거저 내어 줄 만큼 값싼 길이 아니었다. 호른 경이 용병 포로를 통해 알아낸 정보를 간략히 고했다.
“조반니 알비치 후작과 그 가족 모두 성안에 남아 있으며, 수행기사 3명과 사설 용병단 100여 명이 주둔 중이라 합니다.”
“생각보다 많은데?”
“예. 좋지 않습니다.”
알비치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와 용병이 그뿐일 리 없었다. 공성전 소식이 전해지면 주종계약에 따라 기사들이 모일 테고,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금방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래서 후작을 먼저 잡았어야 하는데...”
적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서두르느라 적의 정보가 부족했다. 수비병을 쫓아 붉은 모래 요새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성문 출입을 통제하고 시민들의 입을 막아도 결국 소식이 전해질 겁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호른 경, 애꾸눈, 싸움개, 마녀 키르케까지 로벨을 보았다. 직업과 출신은 다르지만 영리하고 경험 많은 가신이라 답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정답이 나왔다.
“협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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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과 달리 서방이 천년 동안 통일되지 못한 것은 종사제도(從士制度)로 통칭되는 뿌리 깊은 관습법 때문이다.
주종계약을 맺지 않은 자유민은 물론이고, 이미 주인이 있는 농민도 강제할 수 없으니 원 주인이 살아있는 땅은 점령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또한 봉토를 가진 기사들은 자신의 땅에서 절대적인 자치권을 행사해 복종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알비치 가문의 땅을 꿀꺽하려면 알비치 후작의 내·외척을 모두 제거하고, 충성서약을 한 기사들을 하나하나 굴복시킨 후 왕과 교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고, 가능해도 어지간해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후작을 사로잡았어도 종전 협상과 이권 거래의 카드로 쓰일 뿐, 후작의 땅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고로, 로벨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백기가 올라왔습니다. 협상에 응할 모양입니다.”
물론, 알비치 후작에게도 선택권은 없었다. 사람과 땅의 소유권 주장이 불가능한 것이지, 거래할 수 있는 재화는 주머니에 넣은 사람이 임자였다. 즉, 협상을 거부하면 시가지에서 불놀이를 즐기며 주머니를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그 꼴을 당하면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한 알비치 후작은 페닝 이상의 것을 잃었다.
파레초 시티의 심장, 하얀 모래 요새의 성문이 열리고 성벽에 건 것과 똑같은 가문기와 백기가 나왔다. 싸움개가 붉은 모래 요새에서 생포한 포로 옆구리를 찔렀다. 자지러지는 호응이 나왔다.
“후작 나리! 후작 나리가 맞습니다요!”
자기 안마당에서 대리인을 세울 만큼 겁쟁이는 아닌 모양이다. 로벨도 허풍쟁이가 급하게 준비한-그래서 좀 수상쩍은-백기를 가지고 직접 나갔다. 북쪽 나라의 공작과 남쪽 나라의 후작이 1천 마일을 넘어 마주섰다.
“모나카 왕국의 후작, 아이란드 왕국의 백작, 알비치 가문의 당주, 조반니 데 알비치요.”
“볼탄 반도의 공작, 포클랜드의 후작, 로드릭 공국의 적법한 왕 로벨 로드릭이오.”
평화로운 시절에 훈훈한 만남이면 시종을 앞세워 양피지 세 장 길이의 작위와 업적을 읊겠지만, 양측의 군대가 마주한 전장이고 그럴 기분도 아니라 최대한 간결하게 넘어갔다.
“일국의 왕이란 자가 비열하게 기습을 하다니, 옛 신과 조상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소?”
“본인의 군사가 이 땅에 온 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 그대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남에게 떠넘기지 마시오.”
시간상 비난도 형식적으로 끝냈다. 지나치게 상대를 모욕하여 협상이 파투나면 손해였다. 막말로 로벨이 기분 상해서 ‘협상이고 나발이고 한탕하고 집에 갈란다!’ 하면 큰일이었다.
알비치 후작은 마른 세수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고 애써 무게 잡았다.
“전쟁은 과부와 고아를 늘리니 조금도 생산적이지 못하오.”
정통성 없는 전쟁을 준비하는 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평화를 사시오.”
“페닝을 주면 내 땅에서 물러나겠소?”
“페닝과 충성을 내놓으시오.”
전자는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후자는 아니었다.
“...그대에게?”
“그럴 리가. 안토니오 엠마누엘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시오.”
재미있는 요구였다. 알비치 후작은 안토니오 왕자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 법률적 이유로 충성맹세는 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반푼이’ 왕위계승자에게 충성맹세하는 것을 거부하고, 둘째 안토니오 왕자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뿐이다. 왕으로 추천하지만 왕이 아니기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고, 지금껏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 나라의 왕위계승자는 첫째 왕자요. 본인의 독단으로 충성 대상을 정하면 여러 제후들과 기사들이...”
“그만.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마시오.”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지만 로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로벨은 모나카 왕국 사람이 아니고 정치의 문외한이었다.
“고작 맹세 하나로 본인을 묶을 수 있을 것 같소?”
“옛 신의 사제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면 지켜야하지 않겠소?”
로벨이 순진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알비치 후작은 이를 갈았다.
알비치 후작의 가장 큰 협력자는 아이란드 왕국이었다. 그리고 아이란드 왕국은 교단 본부가 천 년 동안 엉덩이를 붙여온 만큼 옛 신의 교세가 가장 강한 나라였다. 옛 신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1년도 채우지 않고 어기면 매우, 매우매우 심각한 비난을 받을 게 당연했다. 아이란드 왕국 내부의 알비치 가문 지지 세력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역시 이런 일은 즉석에서 결정할 수 없었다. 로벨은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3일 기다리겠소. 3일 후 이 시간까지 답을 주지 않으면 본인이 결정에 도움을 주겠소.”
각오해라, 죽을 줄 알아라, 따위보다 격조 있게 무서운 말이었다. 알비치 후작은 침울하게 고립된 요새로 돌아갔다. 성문이 닫히고,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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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초 시티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 성문과 요새에 못 보던 깃발이 걸리고, 길거리에 낯빛이 허연 북쪽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후작 일가족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만 빼면 평소처럼 농부가 오고, 상인이 나가고, 시장이 열리고, 흥정이 오갔다.
그렇다고 분위기까지 평소 같지는 않았다. 아비들은 약탈에 대비해 귀중품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겼고, 어미들은 철부지 아들딸이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단속했으며, 근심·걱정이 유별난 자들은 아예 가게 문을 잠그고 도시 밖 친인척을 찾아 떠났다.
로벨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 3일간 어떤 군사행동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못 한 거지만, 무리해서 피를 흘리지 않았다.
“피 흘리지 않는 싸움도 있지요.”
“주먹 싸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주먹 싸움도 코피 정도는 흘리지 않습니까?”
정보전, 첩보전, 탐색전이었다. 호른 경은 파레초 시티 토박이를 고용해 알비치 가문의 봉신들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하지 않는지 감시했다.
기사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서 즉각 움직이지 않았다. 자유민을 고용하고 농민을 징집하는데 기본 2~3일이 걸렸다. 혹여 시절이 수상하여 미리 모아놓은 작자가 있어도 사람 하나하나가 재산이라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려 무적무패 왕이었다. 지난날의 전공은 거론할 것 없이 하루 만에 파레초 시티를 점거한 괴물이었다. 어설픈 병력으로 덤빌 생각하지 않았다. 아예 덤빌 생각을 안 하는 기사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아침이 밝았다. 로벨은 여전히 조용한 백기를 한번 보고 결심을 전했다.
“공성전 준비해.”
로벨의 측근들은 하나같이 전쟁 전문가였다. 크게 놀라고, 크게 걱정하고, 크게 반대했다.
“지금 병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대포도 없고, 사다리도 부족한데...”
“아군의 피해가 클 겁니다.”
로벨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해 속삭였다.
“준비만 해.”
한 글자 추가하니까 매우 안심되었다. 호른 경 이하 전문가들은 ‘그럼 그렇지’, ‘무적무패가 질 싸움을 할 리 없지’ 등등의 시선을 교환한 후 떨어졌다.
“목공소를 징발하여 사다리를 만들겠습니다.”
“기왕 징발하는 거 목수들도 부리시오. 가까운 곳에 조합이 있을 것이오.”
“그럼 저희들은 기름을 모으겠습니다.”
“화약도 있으면 챙겨와. 겁쟁이 소대 출신 데려가고.”
짧은 휴식이 끝났다. 피를 먹고 사는 짐승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피가 많이 흐를지는 아직 몰랐다.